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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맛비가 오는 날 마을회관 모정에 다들 모였다.
ⓒ 전희식
기회는 항상 예고 없이 불쑥 찾아온다. 요모조모 기회를 엿볼 때는 좀 체 틈을 내 주지 않다가, 생각지도 않고 있는데 덜컥 코앞에서 그 순간이 펼쳐지면 부랴부랴 이전 기억 속으로 들어가 옛 상상들을 현실로 끄집어낸다.

어머니를 모시고 마을회관에 가서 동네 할머니들과 부침개 한번 구워먹는 게 그것이었다. 동네 마을회관은 비탈길을 1km쯤 내려 간 마을 가운데에 있으므로 두 가지가 충족되야 우리 모자에게 '기회'가 오는 셈이다. 하나는 동네 할머니들이 자연스레 한데 모여 있는 때이고, 또 하나는 적당한 구실을 만들어 부침개를 부칠 수 있게 만드는 것이었다.

전주에서 국악을 하는 후배가 전화를 걸어 온 것은 지난주 월요일 이른 시간이었다. 소리를 하는 친구가 여름휴가를 이용 해 산 속에 들어가서 소리 공부를 하려는데 적당한 장소 하나 마련해 달라는 것이었다. 먹고 자고 하는 문제를 맡겨놓고 공부만 할 수 있으면 하는데 아는 암자에 들어갔더니 피서객들이 산골짜기마다 넘쳐서 공부를 할 수가 없어 하루 만에 보따리를 쌌다고 한다.

그런 장소라면 우리 집 외에 이 세상 어디에 있으랴 하고 우리 집으로 불렀다. 정작 만나고 보니 전라북도 도립국악원 창극단 단원이었는데 안면이 있는 사람이었다. 세 사람이 괭이랑 낫을 들고 인적 없는 계곡에 들어가 멋진 소리 터를 하나 마련했는데 정작 하늘에 구멍이 뚫렸는지 깨진 바가지 물 새듯이 여름 장맛비가 그칠 듯 하면서도 계속 질금거렸다.

후배는 전주로 돌아가고 소리꾼과 나는 비에 젖는 북을 대책 없이 끌어안고 하늘을 살피고 있는데 바로 이때, 이것이야 말로 하늘이 주신 '기회'라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 흥이 오르자 소리판은 춤 판으로 변했다.
ⓒ 전희식
비가 오니 들에 나갈 수 없어 동네 할머니들이 마을회관에 모여 있을 것이오, 소리하는 친구가 가서 빗소리에 장단을 맞춰 북채를 휘두르며 창을 한바탕 내 지르면 부침개 판 벌이기에 안성맞춤이 아니겠는가?

어머니께 기저귀를 채워드리고 고운 옷도 한 벌 꺼내서 입혀 드렸다. 나도 생활 한복으로 갈아입었다. 부엌에 가서 감자도 한 봉지, 토마토도 한 봉지 꺼내서 묶었다. 오래 전부터 내 머릿속에 들어 있던 목록들이었다.

마을회관 앞 모정에는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잔뜩 계셨다. 이미 햇감자를 삶아서 나눠 드시고 있었는데 소주잔도 보였다. 배도 부르지요 비는 추적추적 내리지요 만날 하던 이야기 거리들도 동이 났지요, 적당한 재미거리 없나 하고 심심해하고 있던 순간에 우리가 나타났으니 무슨 구경거리 하나 생기나 하는 표정으로 다들 내려다보시는 것이었다. 의기양양 나는 북을 치켜 올려보였다.

이 순간을 뭐라고 적어야 할까? 대대적인 환영을 받는 운명을 타고 났다고 밖에 달리 설명 할 방법이 없을 것 같다.

소리꾼이 먼저 '쑥대머리'로 한 곡을 술상 위에 올렸다. '딱 따닥 떠엉~' 북채가 움직이고 내가 추임새를 넣으며 분위기를 띄워가자 얼마 안 있어 노인네들의 어깨가 들썩이는가 싶더니 손바닥으로 무릎장단을 맞추시는 분도 생겼다.

그 다음 순서는 '뻔할 뻔자'였다. 고개와 상체를 좌우로 흔드는 분이 늘어가더니 드디어 일어서서 덩실덩실 춤을 추는 분이 등장했다. 소리꾼은 동네 할아버지가 맥주잔에다 가득 따라 주는 소주를 거푸 받아 마시더니 "소리 공부가 별거냐"하며 시골마을 노인네들과 흥을 맞추고 신명을 잘 돋워내면 그게 공부지 싶었는지 만사를 잊고 소리에 취해 갔다.

노인네들 좋아하는 민요를 한 가락 뽑았다. '노들강변'을 돌아 '진도아리랑'으로 이어졌다. 춤을 추는 할머니가 "늙으믄 몬 놀아. 일라. 다들 일라" 하면서 앉아 있지를 못하게 사람들 손을 잡아끌었다.

▲ 밤 늦게 집으로 와서 우리는 다시 더 놀았다.
ⓒ 전희식
우리 어머니도 얼굴이 활짝 펴져가지고 춤추는 할머니들을 보고 "잘하네. 잘하네" 하셨다. 동네에서 제일 나이가 많으신 아흔 넷 되시는 할머니가 어머니 옆에 앉아 "올해 몇이여?"라고 묻자 어머니는 무슨 생각에선지 "낼 모래 백이오"라고 해서 그 할머니가 입을 쩍 벌리셨다. 생각이 있어 한 말인지 아니면 아무 생각 없이 그냥 한 말인지 모르지만 신경 쓸 일도 아니었다.

소리꾼이 '사철가'를 부를 때였다. 젊었을 때 한 소리 하신 것으로 전해 오는 할아버지 한 분이 우리의 소리꾼 앞에 척 앉더니 장단을 맞추며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나도 그 옆에 앉았다. 한 할머니가 내 옆에 또 앉았다. 소리꾼은 신이 났다. 갑자기 애제자들이 셋이나 생겨나니 "자아~ 해 보더라고이!" 하더니 한 소절씩 가르치기 시작했다.

"이산저산 꽃이 피니."
"잇싼젓싼 꼬치이."

이때 소리꾼은 북을 '당당당당' 때리더니 우리를 중단시켰다. 제자들은 긴장을 하였다.

"잇싼젓싼이 아니고 이산저산! 자아 다시, 이산저산!"
"잇싼젓싼!"

나는 일부러 더 힘을 주어 '잇싼젓싼' 했더니 소리꾼이 얼굴이 벌개가지고 북채를 허공에 대고 갈지자로 막 휘저었다. 동네 할머니 할아버지들은 배꼽을 잡고 웃었다. 잘 들리지 않는 우리 어머니도 영문을 아는지 모르는지 따라 웃었다. 소리꾼도 덩달아 웃어버렸다. 소리꾼은 '놀부가'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낮이면 자빠져 자고 밤이면 싸돌아 다니고오~" 하니 한 할아버지가 "쟤 어릴 때 쟤가 저랬어" 라고 한 할아버지를 가르쳤다. 그 할아버지는 "먼 소리여어?" 하면서 펄쩍 뛰었다. '비오는 날 장독열고 물동이 이고 가는 아낙네 치마 들추고오~" 하니 먼저 당했던 할아버지가 처음 할아버지 팔을 붙들고 "이놈이 그랬어. 이놈 얘기하고 있네 이놈 얘기 하고 있어"라고 복수를 했다.

소리꾼은 이렇게 슬슬 싸움박질 붙이는 가사를 만들어 내고 우리는 웃고 몇몇 할머니들은 분주하게 움직이며 예정에도 없는 저녁밥을 하기 시작했다. 모정에는 아예 물 호스까지 빼 놔 가지고 가스레인지와 식기 소쿠리가 다 준비되어 있었다. 각자 집에서 반찬 한두 가지씩 들고 나오니 진수성찬이 따로 없었다. 시골의 한 여름 밤은 '잇싼젓싼' 넘으며 깊어만 갔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삶이 보이는 창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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