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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 전희식
장맛비가 계속되던 때였는데 한울님이 실수를 한 것인지 구름이 길을 잃고 애먼 데로 흘러 가버린 건지 어쨌든 갑자기 햇볕이 났다. 파란 하늘이 오랜만이었다. 이럴 때 관록 있는 농부는 침착해야한다.

'늙은 마누라 잔소리 같다'는 장맛비는 끝나가려니 싶다가도 이어지고, 그쳤구나 하면 그때부터 시작인 법이다. 하늘이 걷혔다고 불쑥 들에 나갔다가 소나기 만나기 일쑤다. 계속 하늘을 쳐다보면서 마당 텃밭에서만 호미 한 자루로 한 나절을 때우고 있는데 아랫집 할머니가 고무 함지박을 옆구리에 끼고 흙투성이로 뒷밭에서 내려오신다.

"온다던 비는 안 오고 빌어먹을 햇볕이 우리 들깨 모감지 다 뿐질러 놔분지네."
"들깨 모 옮기셨어요?"
"그렁게. 이것봐아. 싱구믄 싱군대로 폭폭 꼬꾸라지니 흑으로 암만 끌어다 묻어도 헛것이여 헛것."


ⓒ 전희식
할머니 함지박에는 장맛비에 웃자란 들깨 모종이 가득했다. 한자 길이는 됨직하다. 잎은 팍 시들어 기운을 잃었고 할머니 말처럼 들깨 끝이 다 꺾여있다. 헛고생 한다 싶어 밭에서 철수하던 할머니가 다시 뒷밭으로 들깨 함지박을 이고 종종걸음으로 내달린 것은 한 시간도 채 안 지나서였다.

갑자기 하늘을 시커먼 구름들이 뒤덮는다 싶더니 꽈르릉 꽈르릉하는 천둥소리가 산골짜기를 흔들고 이내 소나기가 내렸다. 뽑았던 풀들을 부랴부랴 거름자리로 옮기고 호미랑 낫을 빗물에 닦아 창고 안에 넣고 나오는데 할머니는 밭으로 다시 올라가신다.

"할머니. 여름비는 잠비라는데 깨는 비 그치면 심고 낮잠 한 숨 주무세요."

우리 어머니랑 동갑이신 할머니가 비옷 하나 걸치고 밭으로 나가시는 걸 뻔히 보면서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집안으로 드는 게 체면 없어서 해 보는 말이다. 할머니는 내 빈말을 귓전으로 흘리며 활짝 되살아 난 들깨 모종들보다 더 생기 있는 발걸음으로 밭에 가서 쪼그리고 앉는다.

ⓒ 전희식
멀쩡하던 하늘에서 갑자기 내리는 비는 아랫집 할머니에게서는 환대를 받지만 누군가로부터는 푸념거리가 되고 있을 것이다. 그 반대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얼마 전만 해도 그랬었다. 하도 비 그치는 날이 없다보니 할머니는 "3년 가뭄에는 살아도 석 달 장마에는 못 산다"고 한탄을 했었다.

오후에도 비는 질금질금 계속 내려서 논에 물꼬 보러 갔다. 오는 길에 하도 왁자지껄하여 동네 마을회관에 들렀더니 동네 할머니들이 모여서 수제비를 끓이고 있었다.

"장마 때 하는 일은 일도 아니여. 팔월 바람 불어봐. 사과는 다 떨어져 뿐지고 가지도 분질러지고 나락이 팰락카다가 자빠져 버리먼 일을 해도 해도 끝이 안 보이는 게 팔월 바람 불 때여."

ⓒ 전희식
호박잎 껍질을 벗기고 있던 한 할머니가 비에 쫄딱 젖어 들어오는 나를 고생한다고 격려를 하자 옆에 있던 할머니가 대뜸 말허리를 자르고 하는 얘기다. 작년 8월에 옥수수대가 다 부러져 날아가고 지붕이 날려서 개골창에 처박혔던 이야기가 시작된다.

밭에서 따 온 토마토 소쿠리를 할머니들 앞에 내려놓고 잡수시라고 하자 한 할머니는 "집에 어머니 갖다드리지 여기 줄 게 어딧냐?"고 사양했다. 그러자 또 다른 할머니는 토마토 소쿠리를 휙 끌어당기면서 무슨 소리냐고 하신다.

"주는 거는 일단 받아먹는 겨. 고맙다 그러고 우선 챙겨놓고 보는 겨." 억척스런 그 할머니의 말투에 할머니들이 와르르 웃었다.
"맞어 맞어. 자식들이나 사위가 돈 줄때 '괘안타. 나도 있다.' 그러면 안 돼야. 그러면 담부터 절대 안 줘어."
"있을망정 받아야지 무슨 소리여. 저것들이 도시 나가서 돈 벌먼 지 에미 용돈이나 푸짐하게 줘야지 안 그럴꺼면 돈 왜 번디야?"
"요즘은 돈 벌기도 힘들어 야."
"돈 있으먼 뭐 해여어! 동네에 수퍼가 있나 도가가 있나. 쓸데가 있어야제?"
"그 돈 다 저것들 자식들한테로 도로 되돌아가는 거여. 손자손녀들 귀엽다고 주는 돈이 그 돈이 그 돈 아녀?"
"저 아래 형엽이네 손자는 이번에 셋째 놧다매?
"여름휴가 때 집에 아들은 온대 안 온대? 우리 아들은 해외로 간다고 몬 온다나 어쩐다나."

토마토 한 소쿠리를 놓고 할머니들의 이야기는 온 세상을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여름 장맛비처럼 질기고 질긴 이바구들이 끝도 없이 이어진다.

ⓒ 전희식
비가 오면 괭이나 모종 상자를 들고 들로 나서는 사람들. 비가 그치면 그때사 호미나 낫을 들고 부랴부랴 들에 나가는 사람들. 농사짓는 사람들은 날씨에 맞춰 생활을 조정한다. 더우면 더운 대로 비가 오면 비가 오는 대로. 어제는 투덜댔지만 오늘은 반긴다. 누구는 짜증을 내고 누구는 웃는다.

"햇볕이 나야 호박꽃이 수정을 할 틴데 맨날 찔끔대서 열리는 족족 다 꼶아 떨어지니 호박농사도 못해 먹겠네 못해 먹겠어." 김씨 할아버지가 호박을 트럭에 따 실으면서 하소연한다.
"아니? 할아버지 언제는 비가 와 줘서 비둘기가 내 먹을 틈도 없이 콩이 조옥 잘 났다고 하시더니 금세 비 푸념이세요?"
"어? 그래? 그땐 그렇고 오늘은 또 오늘이고 허허..."

콩밭에 서면 비가 반갑고 호박밭에 서면 비가 원망스런 할아버지에게 '여름비는 소 등을 가른다'(소 머리에는 비가 내리고 엉덩이에는 햇볕이 쨍쨍 내리쬐는 식으로 여름비는 들쑥날쑥 하다는 속담)고 했으니 콩밭과 호박밭을 가려서 비가 내리면 좋을까?

비는 계속 오는 데 햇볕이 났다. 할아버지 트럭에 호박을 실어드리며 물어봤다.

"내일 비 오는 게 좋아요? 안 오는 게 좋아요?" "그만 와야지. 오이 밭에 뜨물 생기고 고추에 역병 들잖어. 아니 아니. 쬐끔은 와야지. 장마철에 비가 와 놔야 8월 무더위 때 뭐든지 쑥쑥 커지 않것어?"

마을회관에 있던 할머니 몇 분이 밖으로 나오시는 게 보였다. 각자 자기 밭으로 향하면서 작별 인사용으로 한 마디씩 던진다.

"날씨가 왜 이리 변덕이여? 이랫다 저랬다 미친년 널뛰듯 하기는 쩝."
"여름 날씨가 이렇지 머 어때. 사람 맴이 변덕이지."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월간 마음수련 9월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장마#비#가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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