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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학기 개강 후 첫 강의 시간.

 

"대학생들이 '교양강의'를 만만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저는 교양강의도 전공강의처럼 진행할 계획입니다. 수업을 듣는 학생들은 주제를 정해 발표를 해야 하고, 다른 학생들은 예습을 해와야 합니다. 수강신청 정정기간이니까 열심히 하지 않을 학생들은 나가주세요."

 

교수님의 말씀이 끝나기 무섭게 기다렸다는 듯이 10명 정도의 학생들이 가방을 들고 강의실 문을 나섰다. 그 수업이 내가 졸업을 하기 위해 꼭 들어야 하는 '핵심교양' 수업이 아니 었다면 나 역시 망설임 없이 강의실 문을 박차고 나갔을 것이다. 그리고 수강신청 정정기간을 이용해 이 수업을 쉽다고 소문난, 일명 '널널하다('널찍하다'의 함경남도 방언, 보통 '시간적으로 여유가 있다'를 표현할 때 쓰임)'고 하는 다른 수업으로 대체했을 것이다.

 

 

수강신청 정정기간이 '꼭' 필요한 이유

 

'수강신청 정정기간'의 본래 취지는 수업의 진행방식이나 내용이 자신과 맞지 않거나 갑자기 시간이 여의치 않게 된 경우 과목을 변경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그러나 과목 변경의 주된 이유는 수업이 생각보다 너무 '빡빡해서'일 때가 많다.
 
내가 다니는 A대학교의 경우, 학기말에 수강신청을 하고 방학이 끝날 무렵 정정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하지만 본격적인 수강신청 정정은 개강 후 첫 일주일 동안 이뤄진다. 어떤 수업을 들을까 고민하던 학생들이 수업을 직접 들어본 후에 최종 결정을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대다수 학생들이 좋아라하는 소위 '널널한' 과목이란 무엇인가?

 

▲ 첫째 출석 반영 비율이 낮으며 ▲ 둘째, 중간고사나 기말고사 중 한 번만 시험을 보며 ▲  셋째, 교수님이 강의를 일찍 끝내며 ▲ 넷째, 과제가 없으며 ▲ 다섯째,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교적 학점을 잘 주는 과목을 말한다. 한 선배의 말에 의하면, 예전에는 이러한 강의를 개설하는 교수님을 'A+ 폭격기'라고 불렀다고 한다.

 

2004년, 학교(고려대학교의 경우)가 '상대평가 제도'를 도입한 이후 'A+ 폭격기'라는 말은 사라진 것 같다. 누군가 A+학점을 받는다면 다른 누군가는 반드시 F학점을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전히 '성실성'과는 별개로 답안지를 교수님의 '입맛'에 맞게 얼마나 잘 조리하느냐에 따라 학점이 매겨지는 수업들이 있다. 이러한 강의를 찾으려는 학생들의 노력은 그야말로 눈물겹다.

 

영어강의, '널널한' 수업을 찾아서

 

전공과 크게 상관없는 교양수업을 듣는 경우 '널널한 수업'을 찾으려는 학생들의 노력은 더욱 절실해진다. 나처럼 단지 졸업요건을 채우기 위해 '영어강의'를 의무적으로 들어야 하는 경우는 더 말할 것도 없다. 인맥을 최대한 활용해 학생들에게 가장 '무관심한' 교수님을 찾는 것이다.

 

'영어강의' 5과목을 듣지 않아 졸업이 위태로운 친구가 네 명 있다. 나를 포함해 다섯 명이다. 영어강의를 들을 때, 우리는 언제나 '세트 메뉴'처럼 붙어 다닌다. 혼자서는 한 과목이라도 온전하게 이수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영어강의를 듣는 우리의 목적은 좋은 '학점'을 받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이수'하기 위한 것이다.

 

우리 다섯 명에게는 그동안 쌓인 경험으로 인해 나름의 웃지 못 할 '노하우'까지 생겼다. 학기 초, 여러 개의 영어강의가 개설되면 그 중 서너개를 골라서 각각 나누어 들어가 본다. 그리고 수업이 끝나면 서로 의견교환을 하는 것이다.

 

A: "아휴. 이 수업 개인 발표야. 안돼."
B: "내가 들어간 수업은 중간고사, 기말고사 다 보고 리포트까지 있어."
C: "야, 이 수업은 교수님이 혼자 책 읽다가 끝나."

 

결국 우리는 C가 말한 강의로 수강신청을 변경했다.

 

이중전공에 영어강의까지... 듣고 싶은 수업은 하나도 못 들어

 

그렇다면 '널널한'수업을 찾는데 성공한 우리가 수업을 듣는 풍경은 어떠한가? 'F만 받지 말자'는 생각으로 듣는 수업이니 제대로 참여할 리가 없다. 한 명씩 돌아가며 결석을 하거나, 출석체크만 하고 몰래 빠져나오는 경우가 다반사다.

 

'리포트'도 단지 '제출한다'는 데 의미를 둘 뿐이다. 이 책, 저 책 짜집기를 하거나 읽지도 않은 책을 참고도서 목록에 포함시켜 제출한다.

 

이렇게 억지로 수업을 들어야 하는 것은 개인에게 엄청난 손해가 아닐 수 없다. 영어강의 때문에 정말 듣고 싶었던 수업을 포기해야 한다. 게다가 수업시간에 멀뚱멀뚱 앉아 있기만 하니 시간낭비요, 등록금을 다 내고도 의미없는 수업을 들어야 하니 경제적 낭비요. 한쪽으로 시간이 새고, 다른 한쪽으로는 돈이 줄줄 새고 있는 것이다.

 

내가 다니는 학교의 공통 졸업 요건은 이중전공 또는 심화/연계전공 이수, 영어강의 5개 이상 수강, 한자이해력 인증, 공인외국어 성적, 핵심교양 3개 이수이다. 졸업을 앞두고 꼭 들어야 할 과목만 남았기에 수강신청 정정할 때 선택할 수 있는 과목의 폭은 넓지 않다. "열심히 할 생각이 아니면 지금 나가라"는 교수님 말에 강의실을 나가던 학생들이 부러운 까닭이다.

 

대학을 기업에 비유하자면 총장은 CEO, 수업은 학생들에게 돈을 받고 파는 상품이다. 내가 수업이라는 상품을 사기 위해 이번 학기에 지불한 비용은 자그만치 336만원이다. 그나마 나는 인문계라 이공계에 비해 싼 값으로 수업을 듣는 사람 중 한 명이다. 결코 적지 않은 돈을 지불하고도 정작 내가 원하는 수업을 '살' 수 없는 현실. 생각할수록 억울하다.


#영어강의#수강신청#등록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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