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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방 앞 <공씨책방>은 길가 앞마당에 잡지를 죽 늘어놓고 있습니다. 이 앞을 지나가는 사람들은 흘깃흘깃 넘겨다보기도 하는데, 책방 앞에 쌓인 이 책들은 "이곳이 헌책방"임을 알려주는 알림판 노릇도 합니다.
▲ 책방 앞 <공씨책방>은 길가 앞마당에 잡지를 죽 늘어놓고 있습니다. 이 앞을 지나가는 사람들은 흘깃흘깃 넘겨다보기도 하는데, 책방 앞에 쌓인 이 책들은 "이곳이 헌책방"임을 알려주는 알림판 노릇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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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나들이

서울 나들이를 합니다. 얼결에 합니다. 딱히 할 마음이 없었지만 동네 마실을 하듯 찾아가게 됩니다. 햇볕도 따뜻하고 바람도 좋아 가붓한 발걸음으로 나들이 나옵니다.

서울 나들이를 할 때면, 팍팍한 사람들 매무새와 텁텁한 공기에다가 시끄러운 차 소리 때문에 머리가 어질어질하지만, 이 서울도 사람이 사는 곳이요, 게다가 이렇게나 많은 사람들이 저 고달프고 힘겨울 만한 땅에서도 복닥복닥 애쓰며 살아가는 곳임을 헤아려 본다면, 이 서울사람들 가슴마다 잠들고 있는 작은 사랑 하나 건드리면서 함께 나눌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전철을 탑니다. 혼자라면 서울까지 자전거로도 가겠지만, 두 사람이 가는 길이니, 도란도란 이야기도 나누고, 이야기 나누다가 입이 아프면 조용히 책을 읽자며 자전거는 놓고 나옵니다. 자전거를 타고 길을 가도 좋고, 두 다리로 길을 가도 좋습니다. 자전거는 자전거대로 우리 삶터를 돌아보도록 해 줍니다. 두 다리는 두 다리대로 우리 삶터를 굽어살피도록 해 줍니다.

두 다리로 걸을 때면 자전거를 몰 때보다 더 자주 발걸음을 멈추고 땅을 살피고 둘레를 돌아볼 수 있습니다. 길가 들꽃을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쓰다듬으려면 자전거로도 힘듭니다. 두 다리가 가장 알맞습니다. 골목길 사진을 찍고 골목집 모습을 차분히 느끼자면 자전거로는 어려워도 두 다리로는 넉넉합니다.

다친 책 헌책방은, '다친 책'도 대접을 받습니다. 겉이 조금 다치기는 했어도, 속 줄거리는 다치지 않으니까요.
▲ 다친 책 헌책방은, '다친 책'도 대접을 받습니다. 겉이 조금 다치기는 했어도, 속 줄거리는 다치지 않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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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책 하나가 되려면

신도림에서 내려 2호선으로 갈아탑니다. 신도림역은 언제 와도 머리가 아프군요. 출퇴근 때가 아닌 낮에도 사람이 많습니다. 이 많은 사람들은, 이 많은 둘레 사람들을 어떻게 받아들이거나 느낄까요. 자기 옆을 스치고 가는 사람도 내 이웃이라고 느낄까요.

당산역을 지나며 잠깐 해가 창문으로 스며듭니다. 아주 잠깐. 이내 바깥 모습은 사라지고 깜깜한 벽만. 문득, 이 깜깜한 벽만 보고 있어야 하는 지하철이라면, 광고판 때문에 눈둘 바 모르는 지하철이라면, 이 지하철을 늘 타고 다녀야 하는 사람들은 지하철 환경 영향을 많이 받지 않을까 싶은 생각.

신촌역에서 내립니다. 신도림역 못지않게 사람이 많습니다. 사람 숲을 헤치듯이 겨우 빠져나옵니다. 밖으로 나와도 사람이 많기는 마찬가지. 아, 나도 이 많은 사람들이 조금 더 많도록 숫자 둘을 보태고 있지요.

언덕길을 걸어 올라 헌책방에 닿습니다. '공씨책방'. 신촌에서는 이곳 '공씨책방'께까지 빠져나오면 사람 물결에 덜 휩쓸리게 됩니다. 아니, 이곳 '공씨책방' 있는 곳까지 오가는 사람이 안 많다고 해야 맞는 이야기일 테지요.

동교동으로 넘어가는 언덕마루에 자리한 '공씨책방'입니다. 사람들이 딱 ‘없기에 좋을’ 만하달까요. 이런 자리라면 찾아드는 책손이 적을 수 있지만, 책손으로서는 좀 더 조용하고 차분하게 책을 즐길 수 있어서 한결 낫습니다. 사람들 북적거리는 곳에 책방이 있어도 참으로 괜찮은 일이지만, 사람들 많이 북적거린다 하여 책 장사가 잘되는 일은 아닌 만큼, 또 책은 되도록 마음을 쏟아서 읽어야 하는 터라 둘레가 조용해야 좋은 만큼, 이렇게 복닥복닥 터에서 살짝 벗어난 곳이 더 낫다고 볼 수 있어요.

어쨌거나. 가방을 내려놓습니다. 사진기를 꺼냅니다. 골마루를 둘러봅니다.

문간 책 문간에 묶여 있는 작은 만화책. 크기가 작든 크든, 많이 팔렸든 적게 팔렸든, 알만 하든 모를 만하든, 저마다 제 값을 붙안고 있는 책들이 헌책방 책시렁에 놓여 있습니다.
▲ 문간 책 문간에 묶여 있는 작은 만화책. 크기가 작든 크든, 많이 팔렸든 적게 팔렸든, 알만 하든 모를 만하든, 저마다 제 값을 붙안고 있는 책들이 헌책방 책시렁에 놓여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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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 먼저 눈에 들어오는 책은 <계단, 건축의 변주>(에블린 페레 크리스탱/김진화 옮김 , 눌와, 2007)라는 녀석. 나온 지 얼마 안 된 녀석이군요. 책방 아주머니가 이건 ‘새책’이라고 말합니다. 헌책방에 어인 새책이냐고 할 분도 있겠지만, 새책도 함께 다루는 헌책방이 여러 군데 있습니다. 헌책방도 ‘책방’이니까요.

손바닥책 <칸나의 뜰>(구혜영, 삼중당, 1977)을 봅니다. 삼중당문고입니다. 삼중당문고 같은 작은 책을 알뜰히 그러모아서 도서관에 갖춰 볼까 싶기도 하지만, ‘읽을 책’이 아니라면 구태여 모으려고 하지 말자는 생각이 들어서, 띄엄띄엄 한두 권씩만 모으고 있습니다.

<톨스토이와 도스토엡스키>(싸머세트 모옴/김성한 옮김, 신양사, 1958)를 봅니다. 50년대에 나온 손바닥책 가운데 하나입니다. 예전 맞춤법이라 ‘싸머세트 모옴’으로 적었는데, 옮긴 분은 소설 쓰는 분이군요. <근대 한미교섭사>(김원모, 홍성사, 1979)라는 두툼한 책도 끄집어서 펼칩니다.

.. 원래 교섭사란 두 나라 간의 관계사인 만큼 사료수집에 이중적 부담을 갖게 된다. 더군다나 19세기의 한국의 특수여건, 즉 한국의 대외교섭은 반드시 청을 통하여 이루어지고 있었기 때문에 한미교섭사를 연구하려면 한ㆍ미 두 나라의 사료만으로는 연구할 수 없고, 이에 필수적으로 청말의 외교문서를 이용해야 하는 어려움에 부닥친다. 뿐만 아니라 프랑스 함대의 조선원정을 규명해야 하므로 프랑스측 사료도 입수해야 한다. 만약 상기한 4개국 사료 중 어느 한 나라의 사료만이라도 입수하지 못한 채 한미관계사를 연구했다면 그것은 파행성을 면치 못할 것이다 … 그런데 1866년 프랑스 함대는 두 차례나 조선원정을 단행했음에도 불구하고 사진자료가 전연 남아 있지 않고 ..  〈머리말〉

글쓴이 말처럼 역사를 파헤치는 일이란 쉽지 않습니다. 파헤치는 이 스스로 세상을 꿰뚫는 눈이 있어야 하는 한편, 여러 나라 말을 할 줄 알아야 하고, 여러 나라 책과 자료를 뒤적일 줄 알아야 합니다. 책상 앞에 앉아 골치 썩이는 시간과 함께, 책방 밖에서 다리가 아프도록 부지런히 돌아다녀야 합니다.

<interview>라는 나라밖 잡지가 보입니다. 두께는 얇으나 퍽 큼직한 판으로 만드는 잡지입니다. 1989년 12월호와 1989년 2월호 두 가지를 집어 봅니다. 하나는 제시카 레인지라는 사람 특집을, 다른 하나는 앤디 워홀이라는 사람 특집을 다룹니다. 우리나라에도 이 <인터뷰>처럼 어느 한 사람만 특집으로 삼아서 아주 깊이 있게 파고들어 보는 잡지가 있다면 무척 재미있겠어요. 문학잡지 <작가세계>가 이렇게 엮곤 했지요.

<the world's best photographs 1980-1990>(Life, 1990)을 봅니다. 라이프 잡지나 라이프에서 엮어낸 사진책을 볼 때면, 좋은 책 하나를 엮어내려면 하루하루 부지런히 땀을 흘리고 또 흘리는 가운데 기다리고 또 기다려야 하는구나 하고 느낍니다. 좋은 사진을 하나 얻어냈다고 해도, 이 한 장으로 책을 엮을 수 없습니다. 꾸준하게 좋은 사진을 한 장씩 얻어낸 다음, 이 사진을 차곡차곡 모아서 열 해든, 스무 해든, 또는 서른 해나 마흔 해든 한 권씩 묶어낼 수 있어야 비로소 우리 삶과 문화를 밝히는 책 하나 태어납니다.

묶인 책 여러 권으로 짝을 이루는 책은 끈으로 곱게 묶여 있습니다.
▲ 묶인 책 여러 권으로 짝을 이루는 책은 끈으로 곱게 묶여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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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사진책 <山に生かされた日○>(民族文化映像硏究所, 1984)은 “新潟縣朝日村奧三面の生活誌”라는 작은이름이 달립니다. 일본 어느 산골마을 사람들 삶과 문화와 발자취를 찬찬히 살펴서 담아낸 책입니다.

보기 좋습니다. 책은 책대로 아름답게 엮었고, 줄거리나 사진도 줄거리와 사진대로 알차게 꾸몄습니다. 사진책이라고 이름을 붙이려면 이만큼은 해야겠구나, 사람들 삶과 문화를 담은 책이라는 딱지가 붙으려면 이만큼은 해야겠구나 싶습니다.

책방 앞에 마련해 놓은 책시렁에 쌓인 잡지를 둘러보다가, ‘롯데가 국내최초로 수퍼백화점을 선보입니다’는 말이 붙은 <새나라 수퍼백화점> 안내책자를 구경합니다. ‘논노’에서 만든 옷 ‘Chatelaine(샤트렌)’을 알리는 1988년치 달력도 구경합니다. ‘논노’ 1988년 여름옷 알리는 안내책자도 구경합니다.

지난날에는 아무것도 아닌 안내책자로 흘려넘겼을 텐데. 어느덧 스무 해나 묵은 안내책자가 되다 보니까, 지난날 우리 눈길과 눈높이라든지 유행 문화와 사회 모습들을 가만히 돌아볼 수 있어요. 요즈음 쏟아지는 수많은 안내책자나 광고종이도, 앞으로 스무 해쯤 뒤에는 ‘지나온 삶을 재미있게 돌아보는’ 자료가 되겠지요.

<3> 우리한테 쓸모있는 책이라면

이제 책 구경은 그만하기로 합니다. 눈도 쉬고 주린 배도 채워야겠습니다. 고른 책을 가슴에 안고 '공씨' 아주머니한테 건넵니다. '공씨' 아주머니는 안경을 한 번 추스른 다음, 하나하나 살핀 다음 책값을 부릅니다. 저는 가방에서 지갑을 꺼내어 책값을 치릅니다.

“봉지에 넣어 드릴까?”
“아니요, 가방에 넣으면 돼요.”
“가방에 다 들어갈까?”
“그럼요.”
“그렇게 큰 가방을 늘 메고 다니려면 힘들겠네. 뭐, 젊으니까 괜찮겠지만.”

끙차 하고 가방을 멥니다. “오늘도 구경 잘하고 돌아갑니다. 다음에 또 올게요” 하고 인사말을 남깁니다. 책방 옆으로 난 골목길로 들어섭니다. 신촌 둘레에서 틈틈이 찾아가는 고즈넉한 밥술집으로 갑니다.

기다리는 책 안 팔린다고 반품할 수 없는 헌책방 헌책입니다. 어느 날 누군가 자기를 알아보는 날까지 고이 기다리고 있는 헌책방 헌책입니다.
▲ 기다리는 책 안 팔린다고 반품할 수 없는 헌책방 헌책입니다. 어느 날 누군가 자기를 알아보는 날까지 고이 기다리고 있는 헌책방 헌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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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로 복작이는 서울 신촌이지만, 이 골목길에서만큼은 참 다른 세상이구나 하고 느낍니다. 감나무를 보고 박새를 보고, 높고 낮은 울타리를 기웃기웃 넘겨다봅니다. 골목길에서도 빠르기를 늦추지 않는 자동차에 조금 시달리다가 씽씽 내달리는 오토바이에 화들짝 놀라다가, 철길 굴다리 즈음으로 빠져나옵니다.

단골 밥술집에 들어가서 가방을 내려놓습니다. 보리술 한 잔 시켜 놓습니다. 낯과 손을 씻은 뒤 숨을 돌린 다음, 오늘 고른 책을 가방에서 꺼내어 하나하나 살펴봅니다. 오늘 사들인 책은 얼마나 사들일 만한 책이었는지, 얼마나 애틋하게 돌보며 읽을 수 있는 책인지 생각해 봅니다.

한꺼번에 수많은 책을 도서관에 고루 갖추고 싶지는 않습니다. 차근차근 하나씩 사들여서 갖추고 싶습니다. 책이 무엇인가를 비로소 눈을 뜬 1992년부터 제대로 읽고 모아 왔다고 볼 수 있는 제 책들로 꾸민 도서관에는, 지난 열여섯 해 책삶이 묻어난 책들이 모여 있지만, 앞으로 한 해 두 해 새로새로 가꾸고 북돋울 또다른 책삶이 묻어나게 됩니다.

저는 이 책삶을 지며리 이어나갈 수 있으면 되고, 제 일터인 도서관을 찾아오는 분들도 ‘더 많은 책을 살펴보기’보다는, ‘세상에는 이런저런 책들도 있구나’ 하고 느끼면서, 당신들 책삶을 당신들 나름대로 가꾸어 나갈 수 있으면 된다고 느낍니다.

많이 많이 읽는 책보다는 한 권을 만나서 읽어도 마음에 새길 수 있어야겠고, 책 한 권 한 줄을 읽을 틈밖에 없이 바삐 살더라도 이 한 줄 하나로 고마워할 줄 알고 반가워할 줄 아는 매무새를 지켜나가고 싶습니다. 하지만, 어쩌면, 나만 모르게, 나도 모르게 틀에 박힌 채 어지러이 걸어가고 있는지 모를 일입니다. 주문한 보리술이 들어오고 물오징어 반찬이 들어옵니다.

간판 찾기 복닥이는 서울 신촌 거리에서, 조그마한 헌책방 간판 하나 찾아낼 수 있을까요?
▲ 간판 찾기 복닥이는 서울 신촌 거리에서, 조그마한 헌책방 간판 하나 찾아낼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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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 서울 신촌 〈공씨책방〉 / 02) 336-3058



#헌책방#공씨책방#서울#신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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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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