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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기섭 시인은 말수가 적은 사람이다. 혹, 시조에 관해 의견을 발표는 자리라면 몰라도 여럿이 대화하는 자리에서 좀처럼 그의 말을 듣기는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또 그는 어떤 모임을 주도한다거나, 제자를 가르치지도 않을뿐더러 시조단의 행사에도 발걸음을 자주 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의 언행에는 무게감이 있다. 그는 말이 없는 사람인만큼 시조에 있어서도 많은 절제와 함축은 물론이요, 긴장미와 탄력을 가진 어휘를 통하여 많은 독자를 확보하고 있는 시인이다.

 

그런 시인이 참 이해하기 어려울 만큼 '주저리주저리 열린 말들'을 가지고 연작사설시조집 <엮음 愁心歌>(만인사)을 출간했다.

 

그의 1980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등단작인 <閑秋餘情>은 이태극, 정완영 선생으로부터 "줄 잘 골라 놓은 거문고 같아 청아한 학 울음이 울려나올 것 같다"라는 극찬을 받았다. 이후로도 그는 심사위원의 칭찬이 아깝지 않을 정도로 정제되고 고아한 언어로 <키작은 나귀 타고> <黙言集> <비단 헝겊> <하늘에 밑줄이나 긋고> 등의 시집을 상재하며 자기만의 시조세계를 견지해온 정상의 시인이다.

 

또 대구 시조의 원천적인 힘이 되었다고 생각되는 '五流'동인(문무학, 민병도, 박기섭, 이정환, 노중석)으로서 1985년 <바람도 아득한 밤도>를 시작으로 <산밑에 와서>에 이르는 10권의 동인지에 각별한 열정과 집념을 쏟은 것은 많은 시조인들의 부러움을 사고도 남는다.

 

그래서 이번 시집을 낸 동기가 더욱 궁금하고 이해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그러나 찬찬히 돌아가 짚어보니 그가 이 엮음 수심가에 관심을 둔 것은 이미 그의 세 번째 시조집 <비단 헝겊, 2001년, 태학사>에서 시작되고 있었다. 그냥 한 번쯤 관심을 둔 것이 아니라 몇 해를 두고 그야말로 '엮어낸' 것임을 알게 되었으니 고개가 주억거려지기도 하였다.

 

책을 출간할 때 저자를 '지은이'라 하고, 남의 글을 모으거나 여럿을 어울려 편집한 이를 '엮은이'라 한다. 이번 시집의 제목에 '엮음'을 붙인 연유가 제목에 나타나 있는 것이다.

 

운전이 어디 애들 장난이니껴? 정확하게 모르믄 사고가 나거든 사고 나믄 지 인생만 망치나 남의 인생도 망치능 겨 운전 말고는 세상에 힘들 게 뭐 있니껴 논농사 밭농사 지어서리 두루 노느고 그리 살믄 되지 하다 못해 술 한 잔 물 한 모금이라도 얻어 마신이가 우리밭에 오줌이라도 누고 가지, 안 그러니껴? - '운전이 어디 애들 장난이니껴?' 중에서

 

이 시집에 들어 있는 어느 편 하나를 읽더라도 세상 누구든지 스승이 아닌 이 없다는 논어의 글귀가 생각난다. 배운 것 없고 그저 속세에 힘들게 사는 이들의 앎 속에도 어찌 이렇게 지혜로운 생각이 들어 있는지 무릎을 치게 한다.

 

요즘 누구든지 운전을 어디 특별한 재주라고 여기는 이가 있으랴만 곰곰 읽고 생각해 보니 참말로 그렇겠구나 여겨지는 것이다. 시인은 귀와 눈을 열고 얼마나 오래도록 그 잠언들에 정신을 쏟았을까 생각하면 그 노고 또한 예삿일이 아니었으리라.

 

이렇게 아무 것도 아닌 듯한 삶에서 잠언을 찾아낸 노고 외에도 이 시집은 두 가지 더 각별한 배려가 숨어 있다. 그 하나는 '사설의 정확한 대구(對句)'를 구사했다는 점과 영남지역 방언에 대한 적확하고도 정감어린 표현에도 많은 정성을 기울였다는 사실이다. 요즘의 사설이 종장 3.5자를 지킬 뿐 나머지 부분에서는 자유시를 방불케 하는 난삽(難澁)함에 비하면 얼마나 정결한 대구인가 말이다.

 

세상에 온갖 소리 중에 그중 듣기 좋은 소리가 뭔지 알어 바로 사람 웃는 소리여 사람 웃는 소리, 그 소리가 다 사람한테서 나오지 어디서 나오노 거 무신 날짐승이 알고 물어다 줄 끼가 길짐승이 알고 업어다 줄 끼가 - '그중 듣기 좋은 소리' 중에서

 

이 부분을 소리내어 읽어보라. 얼마나 정연하고 기가 막힌 대구를 지키고 있는지 감탄하게 된다. 물론 구술자가 노래하듯 똑 부러지게 한 사람도 있겠지만 대부분 구술의 대강을 가지고 시인이 다듬고 배열하며 갖은 고생을 했을 것이다. 더구나 방언은 또 얼마나 정겹게 우리 귀를 즐겁게 하고 있는가.

 

장사는 바닷물모냥 너무 짜도 안되고 싱겁어 터져도 망치기 십상인 기라 츰엔 물일 같은 건 안 할라 켔제 여름 겨울 없이 허구헌 날 이 북새통에서 해물들캉 씨름하는 꼴이 우째 그리 힘들고 추접어 뵈던동 - '물일' 중에서

 

여자들이 뭐 그리 큰 거 바래는 것도 아이고 그저 말 한 마디라도 자상하이 해 주마 일을 억배기로 해도 뒨 줄도 모르고 그럴 낀데 불퉁시리 한 마디 툭 던지마 고마 짜증이 나고 하던 일도 내떤지뿌고 싶고 마 그런 기라 - '그중 듣기 좋은 소리' 중에서

 

대구에서 택시를 탄 적이 있었는데 기사는 안동이 고향이라 했다. 필자가 "경상도 사투리라 해도 많이 틀리더라"라고 했더니, 자기는 경북 사투리라 해도 말을 들으면 대강 청도, 안동, 대구, 문경 등 거의 군 단위까지 맞출 수 있다고 하는 것이 아닌가.

 

시집에 있는 말이 그렇게 자세하게 구사되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상당히 정감있고 아련한 좋은 느낌으로 다가온다. 더구나 시인이 대구 근교 출신들의 서화와 영남 일원의 민속품들을 개인소장품으로 잘 간직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되니, 그의 시에 나타난 사투리까지 사랑으로 넘친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시인은 책머리에 '시인의 말'을 통하여 그가 왜 구질구질하고 칙칙한 무지랭이들의 편편에 마음을 주었는가를 이렇게 말해주고 있다.

 

(전략) / 한 세상 건너는 일 수심가 아니 것 있던가? / 엮음 수심가는 말의 시편들이다. 말은 곧 그 사람이요, 그 사람의 생각인 것. 편편이 사람살이의 진솔한 말들을 담아낼 수 있다면 무얼 더 바라랴. 중략 / 그냥 날것의 입말을 받아내고, 맨살의 향기가 우러나면 그뿐, 낯선 은유도, 무거운 수사도 다 내려놓는다. 守拙한 것이 욕이 될지언정 정녕 그러고만 싶으니, 참

 

독자는 이 시집을 통하여 시인이 시조의 정점인 절제와 함축을 버리고 수심가를 엮은 속 마음을 엿보며 애잔해지고 말 것이다. 시인은 사석에서 '이제 엮음 수심가는 이만 했으면 되었다고 본다. 더 이상 엮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래도 '날것의 입말'과 '맨살의 향기'를 위해 자신의 입지를 좁게 할지도 모르는 도전을 감행한 시인의 마음이 따듯하게 전해지는 것은 다 같은 연유에서 일 것이리라. 고된 삶 속에 들어가 수년을 엮어낸 잠언들의 잔치에 환한 꽃다발을 건네고 싶다.


엮음 수심가

박기섭 지음, 만인사(2008)


#박기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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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한국작가회의, 한국시조시인협회 사무총장. 한국문학평화포럼 사무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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