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표지 <내 영혼의 그림여행>
▲ 표지 <내 영혼의 그림여행>
ⓒ 한겨레출판

관련사진보기


안치환이 부른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 노래를 작사한 시인 정지원이 그림 이야기를 썼다.

사춘기 시절부터 그림을 좋아했던 시인은 사는 일이 막막하고 엄살 부리고 싶을 때면 그림을 찾았다. 그림을 보면서 자신에게 닥친 시련과 고통을 회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맞서 치열하게 살았던 화가들의 삶에서 용기를 얻었다. 이런 인연으로 <내 영혼의 그림여행>을 세상에 내놓았다.

한 편의 그림을 그리기 위해 무수한 날들을 절망하며 끝없는 습작 기간을 보냈을 화가들의 이야기, 그림 속에 담긴 그들의 사랑, 분노, 슬픔, 희망 이야기들이다. 그림은 단지 평면이라고 여겨왔던 사람들에게 그림 속에 얼마나 깊은 사랑이 숨어 있는지, 얼마나 가슴 저미는 아픔이 담겨 있는지, 시인의 목소리로 들려주고 있다.

달빛 아래 피어나는 사랑

남장 여인 문근영의 연기 덕에 혜원 신윤복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드라마 내용처럼 정말 여자가 아니었을까 궁금해 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하니 사극의 영향력이 얼마나 큰지 알만하다.

신윤복은 김홍도에 비해 알려진 이야기가 거의 없다. 그의 아버지도 화원이었고, 영조 때부터 정조 때까지 초상화와 속화에 능한 화원이었다. 그 외에 <청구화원>에 의하면 동가식서가숙 하며 지냈다는 정도 전해지고 있다.

이제 시인 정지원이 이끄는 대로 혜원의 그림 속으로 들어가 보자.

월하정인 신윤복 그림
▲ 월하정인 신윤복 그림
ⓒ 한겨레출판

관련사진보기


"드디어 사모하던 두 사람이 만났다. 님은 등불을 들고 성큼성큼 다가오는데 나는 얼어붙었는지 걸음을 뗄 수가 없다. 길에는 지나는 사람 하나 없는데, 님은 나를 못 알아보셨나, 휙 그냥 지나치신다.

‘저 여기 있어요.’ 말도 못하고 서럽고 무안해서 눈물 나려는데, 큰 걸음으로 오시더니 “밤길에 꽃이 하도 곱길래 그림자도 고운가 보려 한 것을, 이런 눈물까지 흘리시다니요”하며 웃으신다. 부끄러워 눈도 못 맞추는 그 여인을 사랑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는 한 사내. 뻐근하게 아름다운 달밤의 밀회. 이 그림이 바로 '월하정인'이다. '월하정인'은 그림도 그림이지만 그림 속 시가 압권이다.

달은 침침하고 밤은 깊은데
두 사람 마음은 둘만 아는 것을."(책 속에서)

'월하정인'의 주인공들이 시인의 손길에 따라 그림 밖으로 사뿐 걸어 나와 대화하는 것처럼 생생하게 느껴진다. 시인답게 그림 속에 담긴 시까지 맛깔스럽게 소개하고 있다.

'월하정인'은 금성출판사 고등학교 한국근현대사 교과서에도 나온다. 수업 시간에 아이들과 그림 속 남녀에 대해 많은 얘기를 나누었지만, 그림 속에 적힌 시에 대한 관심은 한 번도 가져본 적이 없다.

시인의 글을 읽으며 한편 부끄럽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행복했다. 수업 시간에 아이들과 함께 나눌 이야기 거리가 하나 더 생겼으니까.

둘리의 세상, 그 신성한 힘

김수정의 <아기공룡 둘리>는 언제나 재미있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 함께 배 깔고 엎드려 둘리 만화 보며 낄낄댄 적도 많다. 어쩌다 TV에서 <아기공룡 둘리>를 방영할 때면 어린 두 아들과 함께 비스듬히 소파에 앉아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빠져들었다. “애나 어른이나 똑같다”는 아내의 지청구도 많이 들었다.

미술 작품을 소개하는 책에서 만화(에니메이션)를 소개하는 경우가 흔치 않다. <아기공룡 둘리>를 소개한 정지원 시인의 책이 그래서 더 참신하게 다가선다.

그뿐이 아니다. 세상에서 가장 귀여운 아기 공룡 둘리와 그 가족들이 펼치는 기상천외의 재미난 이야기 속에 결코 작지 않은 의미가 담겨 있다는 걸 시인의 예리한 분석을 통해 깨닫고 고개가 절로 끄덕여진다.

아기공룡 둘리 둘리네 식구들
▲ 아기공룡 둘리 둘리네 식구들
ⓒ 한겨레출판

관련사진보기


"둘리의 친구들은 하나같이 버려지거나 쓸쓸한 처지이다. 둘리는 영희와 철수가 자신을 기쁘게 반겨주었듯이 도우너와 또치, 옆집 사는 가수 지망생 마이콜까지 자신의 식구로 받아들인다. 혈족 중심의 가족이 아닌 열린 가족 관계의 형성이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둘리의 생각은 길동씨와 마찰을 빚는다. 그러나 길동씨 역시 이 불청객들을 통해 어른에게는 결코 쉽지 않은 착한 본성으로 회귀한다. 이 집에서는 아기 희동이부터 어른 길동씨까지 모두 평등하다. (중략)

마이콜은 외국인 노동자다. 그는 스타를 꿈꾸지만 불법 체류자라는 신분과 검은 피부를 가진 외국인이라서 무시를 당한다. 마이콜의 노래 제목은 80년대 대표 노래를 패러디한 것들이다. '아줌마와 구공탄', '그댄 두부를 무척 좋아하나요?' 등의 노래는 싱겁고 엉뚱하지만, 나이를 초월해 둘리를 스승으로 모시는 마이콜의 순수함은 우리를 즐겁게 한다."(책 속에서)

둘리가 사는 세상이 단지 꿈이 아닌 이유를 밝은 시인의 눈으로 독자들에게 알려준다.

더불어 천대받던 만화가 당당히 미술계의 한 영역으로 자리잡게 된 행복한 마음을 전해주며 흘러간 시절의 다른 만화에 대한 추억도 되살려준다. 독수리 5형제, 북해의 별, 아뉴스데이, 똘이장군, 희동이, 간판스타 ….

시인과 닮은 기억을 가진 이들

혼신의 힘을 다해 쓴 시와 안간힘을 써서 탄생시킨 그림은 다르지 않다. 시인이 전해주는 그림 이야기는 그래서 어색하지 않다. 한 장의 그림을 그리기 위해 수많은 날들을 습작에 매달렸던 화가들, 자신의 소신을 고집스럽게 지키려 애쓰다 시대와 불화하며 힘겹게 살아갔던 이들의 분노와 좌절, 낮은 곳을 향해 머물던 맑은 시선, 그 많은 화가들의 이야기는 다름 아닌 시인 자신과 그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다.

시인의 그런 마음이 서문에 따뜻하게 담겨 있다.

"젊은 날 거리에서 투쟁가를 부르던 당신, 어느 결에 부모가 되어 좀더 좋은 세상을 아이에게 열어주려고 오늘도 열심히 일하는 당신에게 내가 드리는 작은 꽃다발이다. (중략) 당신은 예전에도 아름다웠고,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당당하게 살아갈 것이다. 왜냐하면 당신을 기억하는 우리가 있기 때문이다."(책 속에서)

덧붙이는 글 | 정지원 지음/한겨레출판/2008.10/13,000원



내 영혼의 그림 여행

정지원 지음, 한겨레출판(2008)


#화가#정지원#내 영혼의 그림여행#그림#월하정인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내가 서 있는 모든 곳이 역사의 현장이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