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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저는 정해진 시간에 출근하지 않아도 되는 현재의 생활에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제가 매일 출근을 하거나 시간표에 따라 공부를 해야 하는 처지의 사람들보다 더 한가하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청소를 하는데 하루의 상당한 시간을 할애해야 하고 세탁이며 설거지에도 적지 않은 시간을 내주어야 합니다. 또한 이 모든 시간을 합한 이상의 시간을 모티프원을 찾아오는 사람들을 안내하고 대화하는 데 쓰고 있습니다.

 

결국 낮에 독서를 하거나 글을 쓸 시간을 할애할 틈이 좀처럼 허락되지 않음에도 저는 게으른 시간들이 하루 종일 계속된다고 여기고 있습니다. 아마 청소나 다른 집안의 허드렛일을 하는 동안 제 머릿속에서는 다른 것들을 생각할 수 있는 여백이 생겨서 일 것입니다.

 

만났던 사람과의 대화를 되새김해보거나 지난밤에 읽은 구절을 익혀 생각해보는 것들이 허락되는 시간입니다. 또한 제 마음을 반성하면서 살필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청소시간들이 제 생각의 숙성시간인 셈입니다.

 

모든 사람들에게 게으를 시간 즉 이 숙성의 시간이 허락되어야 합니다. 게으를 시간이 주어졌을 때 길가의 낙엽도 유심히 보이고, 뺨을 스치는 바람결도 느끼며, 마주치는 사람에게 미소 지을 여유도 생깁니다. 무엇보다도 정리되지 않았던 생각이 정돈되고 당면한 판단에 후회가 적은 결정을 내릴 수 있습니다. 그런 까닭에 게으른 시간들은 곧 창조의 시간이며 완성의 시간입니다.

 

간혹, 모티프원을 찾아오신 분 중에 이곳에서 무엇을 하면 좋을지를 묻곤 합니다. 저는 주로 '마음껏 빈둥거리세요'라고 답합니다. 대처에서 오신 분들에게 가장 부족한 것은 '빈둥거릴 시간'임을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하루 이틀, 팔자걸음으로 헤이리의 굽은 길을 산책하거나, 허공에 날고 있는 기러기 떼를 보거나, 음악을 듣거나, 책을 펴고 하루에 한 페이지 정도만을 읽어도 괜찮을 빈둥거림 뒤에 대부분은 오히려 충만해졌음을 말하고 새로운 의욕이 찾아왔다고 고백합니다.

 

어제(12일)는 음력으로 10월 보름이었습니다.

 

헤이리 참나무골 언덕위로 보름달이 떠올랐습니다.

 

 

10월 보름은 승려들의 결제(結制)일이기도 합니다. 바로 동안거(冬安居)가 시작되는 날이지요. 정월 보름까지 스님들이 산문 출입을 삼가하고 수행에 정진하게 됩니다. 스님에게 이런 여백의 시간이 주어지지 않는다면 세상 사람들에게 어떻게 깨달음을 전할 수 있을까요. 스님의 안거는 휴식이나 도피가 아니라 창조의 시간이며 진리와 이치를 궁리하는 시간인 것입니다.

 

보름달은 텅 빈 하늘로 인해 더욱 두드러지고 아름답습니다. 꽉 찬 하늘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진저리가 납니다.

 

 

초저녁에 밤나무집 언덕 위 동쪽으로 솟았던 보름달은 제가 잠든 사이에도 쉼 없이 허공을 가로질러 오늘 새벽 서쪽동산을 넘고 있었습니다.

 

 

달이 비켜준 동쪽 텅 빈 허공에서는 다시 먼동이 밝아 오고 있습니다.

 

 

수능이 끝난 학생들에게도 직장인에게도, 부디 게으를 시간이 허락되기를…….

 

덧붙이는 글 | 저의 개인 홈페이지 www.motif1.co.kr에도 포스팅 됩니다.


#게으름#보름달#헤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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