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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도록 미워했던 아버지
 

언젠가 가까운 후배와 밤새도록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그날 후배는 자기 아버지에 관한 이야기를 털어놓았습니다. 끼니가 없던 시절 자신의 아버지는 자식들에게 개 사료까지 먹인 적이 있다고 했습니다. 어쩌다 텔레비전을 함께 보다가도 공부를 하지 않는다면서 자신을 들어 마당으로 내팽개친 적도 있다고 했습니다.

 

후배는 그런 아버지가 몹시 싫었다고 했습니다. 청년이 되어서도 그 때 솟구친 분노가 좀체 풀리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아버지가 뇌졸중으로 입원하여 자신을 불러들여 지난  날에 대해 미안하다며 다 털어놓았을 때는 아버지를 향한 분노가 봄 눈 녹듯 다 녹아내렸다고 했습니다. 아버지는 가난이 몹시 싫었고, 장남인 그 아들만큼은 대물림하지 않기 위해서, 그렇게 대했다며, 자신을 용서해 주길 바랐다고 했습니다.

 

그런 이야기를 듣는 순간 중학교 2학년 때 이 세상을 떠난 내 아버지에 대한 모습이 스쳐 지나갔습니다. 내 아버지는 봄철과 여름철, 그리고 가을철이면 누구보다도 소처럼 열심히 일했습니다. 목수이기도 했던 아버지는 동네의 집짓는 일에도 끼어들어 열심히 돕곤 했습니다. 더욱이 집 옆의 헛간에다는 소를 키우며 자식들 학비에 보태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위로 큰 형부터 아래로 나까지 7남매를 키우기에는 그 살림이 넉넉지만은 않았습니다. 더욱이 겨울철 농한기에는 동네 어른들과 함께 가까운 옆 동네나 멀리 읍내에까지 나가 화투를 즐기는 바람에, 집안 형편이 급격히 기울기도 했습니다. 당연히 줄줄이 위의 형들은 중학교만 졸업하고 모두 서울로 상경하여 돈을 벌었습니다.

 

언젠가 큰 형도 아버지의 기일에 맞춰 어린 시절 품었던 아버지에 대한 섭섭함을 털어 놓기도 했습니다. ‘왜 아버지는 자꾸만 동생들을 낳는 것인지.’ ‘어떻게 먹고 살아가려고 그러는 것인지.’ ‘대책도 없이 동생들을 낳으면 대수인지.’ ‘나도 어렸을 적에는 아버지가 그렇게 미웠다.’ 그렇게 맨 위의 형은 맨 아래 동생인 내게 아버지를 향한 원망과 불평을 털어 놓기도 했습니다.

 

나 역시 아버지가 세상을 뜨기 직전까지도 무척 밉고 싫었습니다. 그 시절 아버지는 밤이 되면 술을 먹고 와서 잠자고 있는 나를 깨워서 얼차려를 주곤 했습니다. 화투 노름에서 돈을 따 온 날이면 천 원짜리 지폐를 여러 장 나눠 주곤 했지만, 돈을 잃고 돌아 온 날이면 어김없이 어머니와 제게 화를 풀곤 했습니다. 그런 아버지 모습이 죽기보다도 싫었습니다.

 

하룻밤 사이에 아버지가 세상 떠날 줄이야...

 

그런데 그 아버지가 술을 이기지 못해 하룻밤 사이에 세상을 떠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학교에서 아버지가 죽었다는 소식을 접한 나는 정문을 나와 부랴부랴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하지만 버스 안에서 내내 멍할 뿐이었습니다. 아버지의 시신을 대할 무렵에는 좀체 아버지를 바라볼 면목도 없었습니다. 그토록 증오하고 미워했기 때문입니다.

 

그로부터 23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두 아들과 딸 하나를 두고 사는 나는 어렴풋하게나마 아버지가 얼마나 고생하며 살았는지를 조금이나마 깨닫고 있습니다. 그 시절의 미움과 원망이 이제는 애틋한 그리움으로 변하고 있습니다.

 

그 시절 아버지는 7남매 자식들을 먹여 살리려고 발버둥 쳤지만, 이룰 수 없는 현실 속에서 술과 노름으로 도피해 보고 싶었던 것입니다. 방법이 잘못 되긴 했지만 그 시절 우리 동네 어르신들은 다들 그렇게 세상을 살다 떠나셨기에 내 아버지로서도 거부할 수 없는 운명을 사셨던 것임을, 이제야 나는 깨닫고 있습니다.

 

윤지강의 <송아지 아버지>를 읽다가 문뜩 내 아버지가 떠올라 몇 절 주절주절 거렸습니다. 이 책에는 IMF로 인해 실직당한 가장이 당신의 아버지를 보며 힘을 얻는 모습도 그려져 있고, 고층 빌딩에서 거울을 닦는 일로 생계를 유지해 가면서도 자식에게만큼은 남들처럼 떳떳하게 수학여행 다녀올 수 있도록 용기를 불어 넣는 아버지의 모습, 그리고 글공부나 셈하는 공부를 전혀 배우지 못해 해와 달과 별로 계산 장부를 맞춰가며 장사했던 어떤 아버지의 모습도 엿볼 수 있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야 비로소 깨달았습니다. 아버지도 때로는 삶에 지치고 힘들어 속으로 조용히 울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작가의 말)

 

엊그제도 장례식장에 다녀왔지만, 요즘 들어 내가 알고 지내는 선후배들의 아버지가 많이 세상을 떠나고 있습니다. 아버지의 죽음으로 인해 그들의 뒷모습이 쓸쓸한 것 같지만, 그토록 늦게까지 살다가 돌아가신 아버지를 둔 그들이 몹시 부러울 때가 많습니다. 때론 원망스럽고 미울 망정 이 땅에서 더 많이 살다가 돌아가셨으면 하는, 그런 내 아버지의 그리운 모습이 요즘처럼 더 부쩍 많아지는 때도 없지 싶습니다.


송아지 아버지 - 내 인생에 힘이 되어준 한 사람

윤지강 지음, 옥당(북커스베르겐)(2009)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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