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어디 갔는지 더듬거리며 찾는다. 옆에 있었지만 지금은 없어진 그것을 생각하며 찾는다. 이제 볼 수 없고, 느낄 수 없는 그것을 기억한다. 한바탕 신나는 놀이였고, 주체 못할 열정이었고, 억누를 수 없는 기운의 폭발이었고, 즐거운 저항이었다. 벌써 1년. 밤하늘의 섬광처럼 순간 속으로 영영 사라졌다 해도 그것은 우리 가슴에 잊지 못할 추억으로 새겨져 있다.

 

그러나 추억하기 위해 촛불 집회를 돌아보려 해서는 안 된다. 그러기에는 너무 짧은 1년이고, 너무 힘든 삶이었다. 우리가 촛불의 상념에 빠져 드는 것은, 촛불이 밝혀준 길은 아득한데, 아직 길을 가지 못한 채 더듬거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서라도 우리가 갈 수 있을까?

 

광장은 비었다. 의사당은 요란하되 공허하고, 선거는 주기적으로 열리되 흥미를 잃었다. 저자거리는 북적거리지만, '소리 없는 아우성'이고, 세상은 따분하다. 1년간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벌써 1년, 추억이 될 수 없는 촛불

 

그것은 기성 정치 제도, 조직된 시민사회의 틀 밖에서 떠돌던 어떤 힘이었음이 분명하다. 기성 체제가 포착할 수 없는 낯선 언어와 신호들의 난장이었다. 역병처럼 거리를 휩쓸며 사람들을 사로잡은, 알 수 없는 광폭한 기운이었다. 그러나 갑작스런 소멸. 기성 정치도 시민사회도 그 새로운 열정을 담아낼 그릇은 아니었다. 소멸은 불가피했다.

 

촛불은 민주화 운동 20년의 동력이 소진된 시점에 찾아 왔다는 점에서 전환기적 사건이다. 민주화 운동의 충격이 생성시킨 에너지가 고갈되고, 그 결과 10년간의 민주화 운동 세력의 집권이 종식되었을 때 등장한 것이 촛불이다. 촛불집회는 신자유주의에 기반한 정책들에 대한 광범위한 비판을 제기했고 다양한 진보적 의제들을 던졌다.

 

그것들은 이명박 정부는 물론 지난 10년 민주화 운동을 배경으로 집권한 세력도 감당할 수 없는 것이었다는 점에서도 한 시대의 종장으로 삼기에 손색이 없다. 민주화 운동세력의 집권 10년은 신자유주의 노선의 본격적 도입과 확산의 시기였다는 점을 고려할 때 신자유주의 모순에 대한 이 격렬하고도 신나는 폭로는 민주화 운동세력과의 작별이자, 민주화 운동세력의 유산을 청산하는 의식이기도 했다.

 

민주화 운동세력은 더 이상 시민들의 열망을 품은 시대정신의 담지자도, 시민들의 의지의 실현을 자기 사명으로 삼고 있는 정치세력도 아니다. 자유주의적 야당, 진보정당, 시민단체 누구도 촛불의 도래를 알지도 못했고, 촛불을 이끌지도 못했고, 촛불 이후를 준비하지도 못했다. 모두 촛불 이전의 존재일 뿐이다. 촛불은 이렇게 이명박 정부는 물론 이명박정부와 대립하는 야당과 시민단체의 기득권을 인정하지 않는, 전혀 새로운 흐름을 의미한다는 점에서도 전환기적 현상임을 알 수 있다.

 

촛불에게는 자기의 의사를 대표할 정치세력이 없다. 손에 쥔 모래가 뿔뿔히 흩어져 사라지듯 촛불은 갈 곳, 머물 곳이 없다. 정처가 없다. 촛불이 다시 돌아온들 그 뜨거움을 담아낼 그릇이 없는 것이다. 이 것이 바로 촛불이 한국 정치에 던지는 과제이다. 자유주의적 야당인 민주당은 아직 생존을 고민하는 한계 정당으로 남아 있을 뿐, 자기가 왜 몰락했는지 성찰하며 새로운 야당으로 거듭날 어떤 기력도 그 안에서 찾을 수 없다.

 

진보정당의 낡은 요소는 분열을 통해 폭로되었지만, 새로운 진보의 길은 찾지 못하고 있다. 노동조합, 시민사회 단체도 노동자 시민들의 변화하는 욕구를 대의할 수 없다. 이런 조건에서 촛불은 새로운 변화의 동력이 될 수 없다.

 

그 변화의 욕구를 담을 그릇이 없다

 

정치를 재구성해야 한다. 내부의 충격이 없으면, 외부의 충격이라도 있어야 한다. 내부의 충격은 정당 구조의 한계, 한국정치의 현실을 고려하면 기대하기 어렵다. 4월 29일의 재보선을 보자. 시민을 정치로부터 퇴장시키는데 얼마나 효과적인 선거가 될 것인가. 여당이든 야당이든 자기의 상대가 불분명한 것은 물론, 자기의 정체도 모호하다. 게다가 민주당은 자기의 과거와 싸우느라 허덕이고 있다.

 

노무현·정동영을 심판하는 선거로 만든 것도 모자라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비준을 반대한다고 물리적 충돌도 불사한 정당이 FTA에 앞장 선 인사를 후보로 내보내 지지를 요청하고 있다. 이렇게 야당이 시계를 거꾸로 돌리고 있는데 정치가, 선거가 자기 삶을 바꿀 수 있다는 믿음을 시민에게 심어 줄 수는 없다. 선거를 정치계급들의 놀이터로 만들려는 음모라도 진행되고 있는 것 같다. 시민들의 참여를 차단하는 정당 구조, 선거 구도를 잘도 만들어 내는 것을 보면 그렇다.

 

이런 조건에서는 외부의 충격이 필요하다. 촛불은 충분히 외부 충격이 될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촛불이 정치 안으로 들어와 정치를 겨냥해야 한다. 촛불 스스로 자기를 조직하고 정치적으로 행동해야 한다. 촛불의 신성시와 정치의 악마화로는 낡은 정치에 충격을 줄 수 없다. 촛불 집회가 카타르시스를 위한 것이 아니라, 삶의 개선을 위한 것이라면 그 삶을 바꿀 수 있는 올바른 도구를 갖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나 촛불은 올바른 도구를 갖는 것을 방해해왔는지 모른다. 촛불은 의도했든 아니든 반정치를 확산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정치를 거부함으로써 정치를 식물상태로 만들 수는 있지만, 식물 정치가 우리의 삶을 억압하는 것을 통해 우리에게 복수할 수 있다는 것도 알아야 한다. 촛불이 꺼지고 난 뒤 있었던 일이 바로 그런 것들이다.

 

조직되지 않은 힘은 한계이자 비애

 

이명박 정부는 촛불 의제를 하나 하나 깨부수어 나갔다. 촛불은 자기의 정치적 대표가 없었다. 두 달 남짓 촛불은 스스로 자신을 대표할 수 있었지만, 촛불이 사라진 자리에 정치적으로 유효한 것은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이것이 촛불 이후 공권력을 동원한 이명박정부의 역공세에 속수무책이었던 이유이다. 강렬한 촛불의 이미지는 그 안에 허약한 모습을 감추고 있었던 셈이다. 조직되지 않은 힘의 한계이자 비애이다.

 

촛불 1년 만에 다시 화려한 광장을 꿈꾸지만, 불행하게도 5월의 스펙터클은 수 십만개의 촛불이 아니라, 사월의 마지막 밤 노무현 전 대통령의 검찰 소환이 될 것이다. 지난 10년의 실패에 대한 기억을 재생하는 그 볼거리는 아직도 한 시대를 제대로 청산하지 못하고 있음을 드러낼 것이고, 우리는 시작도 하지 않았다는 엄연한 현실을 직면하게 해 줄 것이다.

 

다시 촛불 집회를 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촛불을 다시 불러내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촛불을 든 몇 날 며칠만 행복하고 그 밖의 수 많은 날들을 슬프게 보낼 수는 없기 때문이다. 연대와 공감의 광장에서 춤추는 것도 좋지만, 곧 텅 빈 광장으로 남아 있는 것을 보아야 한다면, 우리의 마음이 얼마나 오랫동안 허허로울 것인가.

 

삶은 엄정한 현실이다. 좀 더 냉정하고 치밀하고 집요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의 일상 그 자체를 정치적으로 동원해야 한다. 다행히 이 두터운 지층 어디선가 꿈틀거림이 있었음을 우리는 느꼈다. 우리의 곁을 뭔가가 스쳐 지나갔음을 안다. 그걸 잡아야 한다.


#촛불#이대근
댓글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11,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모든 시민은 기자다!" 오마이뉴스 편집부의 뉴스 아이디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