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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어머니는 농사일이 바빠도 마을을 돌아다니다 예쁜 꽃을 보게 되면 한두 포기 얻어다 집 화단이나 담 밑에 심어 놓는다. 심은 꽃이 시들시들하면 물도 주고 넘어질 것 같으면 막대기를 대주기도 한다. 죽으면 그만이지만 죽이지 않는다. 정성을 다한다. 나의 어머니가 아니라도 이처럼 정성을 다해 집을 꾸미고 싶어하는 것이 우리의 정서다.

이러한 정서가 그대로 배어있는 것이 담, 굴뚝과 문이다. 이래서 이들에게는 표정이 있다. 담과 굴뚝 그리고 문은 집주인의 얼굴이다. 주인이 누구인가에 따라 색, 모양과 크기 그리고 치장을 달리한다. 집주인의 권위와 인품, 사상과 개성이 담겨 있다.

시골마을에 토담과 돌담 그리고 꽃담은 어울릴 망정 절제미가 있는 사고석 담은 어울리지 않는다. 선비집에 암팡지고 옹골지고 키 작은 돌 굴뚝이 어울릴 망정 경복궁 교태전에 있는 화려한 붉은색 벽돌굴뚝은 어울리지 않는다.

우리는 담장을 쌓더라도 그냥 쌓지 않았다. 토담을 쌓더라도 밋밋하게 쌓지 않고 막돌을 세우거나 비스듬히 눕혀서 한 켜를 쌓고 또 반대 방향으로 눕혀 한 켜를 쌓아 멋을 낸다. 여기에 과학이 숨겨져 있다면 우리는 과학으로 멈추지 않고 멋으로 승화시킬 수 있는 천부적 재능이 있다. 담 하나로 허전하면 담 밑에 나의 어머니가 하는 것처럼 봉숭아나 접시꽃, 해바라기 등을 심어 허전함을 달랜다.

닭실마을 토석담 담 밑에 꽃을 심어 놓아 토석담이 '토석꽃담'이 되었다. 이젠 루드베키아나 플록스 꽃이 봉숭아나 맨드라미꽃보다 더 자연스러운 지 모른다. 민속촌에 심어 놓은 봉숭아나 맨드라미는 '인공향기'가 난다
▲ 닭실마을 토석담 담 밑에 꽃을 심어 놓아 토석담이 '토석꽃담'이 되었다. 이젠 루드베키아나 플록스 꽃이 봉숭아나 맨드라미꽃보다 더 자연스러운 지 모른다. 민속촌에 심어 놓은 봉숭아나 맨드라미는 '인공향기'가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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닭실마을 입구에 있는 토담은 나의 마음을 따뜻하게 한다. 어머니가 얻어다 심어 놓은 플록스가 담 밑에 피어 있었다. 그냥 패랭이 같은 데 평소 못 보던 꽃이라 한 포기 얻어다 이름도 모른 채 심었다는  플록스다. 담 밑에 핀 꽃이 봉숭아나 맨드라미였으면 어떠했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었지만 이젠 루드베키아나 플록스 꽃이 더 자연스러운 꽃이 되었는지 모른다. 담 밑에 봉숭아나 맨드라미는 오히려 민속촌에 가면 흔히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담장은 토담으로만 그치지 않는다. 깨진 기와조각을 토담에 박아 질박한 꽃무늬 담을 쌓기도 한다. 암키와, 수키와를 적절히 배치해 사람이 웃는 모양이나 꽃 모양을 담에 새기기도 한다. 이처럼 담에 아름다운 무늬나 그림을 넣어 장식한 담을 꽃담이라 한다. 굳이 꽃이 아니어도 좋다. 담을 아름답게 꾸밀 의도를 갖고 담에 무늬나 그림을 새기면 꽃담이라 불러도 좋다. 신랑 신부의 첫날밤을 우리말로 아름답게 표현하여 꽃잠이라 부르는 것과 마찬가지다. 

어디에서나 우리는 꽃담을 볼 수 있다. 세련되고 화려하나 야하고 사치스럽지 않은 궁궐의 꽃담이 있고, 담장의 높이와 함께 담장 무늬로 집주인의 인품이 드러나는 사대부집의 꽃담이 있다. 깨진 기와조각을 토담에 박아 넣어 만든 질박한 시골 꽃담이 있으며 흙과 기와 그리고 막돌만가지고 만들었어도 볼 때마다 감탄사가 절로 나오는 절집의 꽃담이 있다.

의성김씨 종가 샛담 언뜻 보면 대충 쌓은 것 같으나 정성을 들여 보면 정성을 다한 담이다
▲ 의성김씨 종가 샛담 언뜻 보면 대충 쌓은 것 같으나 정성을 들여 보면 정성을 다한 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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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 토담보다 더 수수하고 질박한 담이 있다. 의성김씨 종가 샛담이다. 사치하지 않고 꾸밈없이 수수하게 쌓았으나 대충 쌓은 담은 아니다. 정성이 들어 있다. 기단은 막돌로 허튼돌쌓기로 쌓고 암키와를 눕혀서 한 줄 한 줄 쌓아 올린 후 윗단은 기와로 빗살무늬를 새겼다. 흙과 기와를 버무려 대충 만든 것 같으나 자세히 보면 빗금무늬를 수놓아 멋을 낸 것이다.

여성이 거주 공간에는 꽃담을 쌓아 공간의 성격을 분명히 하였다. 창덕궁 낙선재, 경복궁 자경전과 교태전 꽃담이 그러한데 청송 송소고택의 안채에도 여성이 거주하는 공간답게 꽃담을 쌓았다. 기와로 오선지를 그렸고 중간중간 리듬치기를 하듯 Ⅴ자를 연이어 쌓았다. 딴딴딴...혀를 굴려 장단을 맞춰 본다. 필시 음악을 좋아하는 분이 쌓았을 것이다.

송소고택 안채 꽃담 오선지를 그리듯 기와로 몇 줄을 내고 사이사이 리듬치기 무늬를 넣은 것처럼 보여 이 곳에선 리듬감이 생긴다
▲ 송소고택 안채 꽃담 오선지를 그리듯 기와로 몇 줄을 내고 사이사이 리듬치기 무늬를 넣은 것처럼 보여 이 곳에선 리듬감이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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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소고택에는 또 하나 기막힌 꽃담이 있다. 화장실과 집안과의 영역구분을 하는 담이다. 담 밑 부분은 흙과 돌을 한켜 한켜 번갈아 3-4단을 쌓았고 그 위에 기와로 무시무종(無始無終) 승리의 Ⅴ자 무늬를 놓아 예쁜 꽃담을 만들었다. 담 밑엔 상사화가 꽃을 피워 꽃담을 쌓지 않았어도 어차피 이 토담은 꽃담이었다.

송소고택 꽃담 꽃담 밑에 상사화가 곱게 피어 있어 꽃담을 쌓지 않았어도 이담은 어차피 꽃담이었다
▲ 송소고택 꽃담 꽃담 밑에 상사화가 곱게 피어 있어 꽃담을 쌓지 않았어도 이담은 어차피 꽃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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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은 나와 너, 안과 밖을 구분하는 기본적 기능 외에 나와 자연, 성격이 다른 공간을 구분하기도 한다. 각 공간은 담으로 단절되지 않고 담을 넘나들며 끊임없이 교감한다. 소쇄원의 경우 학습공간인 제월당과 휴식공간인 광풍각을 담으로 나누고 있으나 담으로 인해 양 영역이 단절되지는 않는다. 

송소고택에는 영역을 구분하기 위해 쌓은 헛담이 있다. 이 고택은 워낙 커서 사랑채도 큰 사랑채와 작은 사랑채 두 개가 있다. 안채로 드나드는 여인네들이 눈에 띄지 않게, 안채로 연결되는 큰 사랑채와 작은 사랑채사이에 헛담을 두었다. 헛제사밥이 가짜제삿밥이듯 헛담은 가짜 담이다. 담은 있으되 담으로 양 영역이 단절되는 것은 아니다. 담 밑엔 봉숭아 꽃과 달개비 꽃, 붓꽃, 비비추, 원추리, 플록스 등 여러 꽃이 예쁘게 피어 '꽃토담'이 되었다.

송소고택 헛담  헛제삿밥이 가짜 제삿밥이듯 헛담은 가짜 담이다
▲ 송소고택 헛담 헛제삿밥이 가짜 제삿밥이듯 헛담은 가짜 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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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역을 구분하는 담 중 최고의 걸작은 병산서원 고직사 앞에 있는 뒷간이다. 이렇게 극적인 효과를 내는 담이 또 있을까? 나선형으로 돌려 쌓아, 밀폐된 공간을 만들지 않으면서 안과 밖이 확실하게 구분되게끔 하였다.

병산서원 고직사 뒷간 이렇게 극적인 효과를 내는 담이 또 있을까? 완전히 쌓지 않았으면서 완벽하게 안과 밖이 구분된다
▲ 병산서원 고직사 뒷간 이렇게 극적인 효과를 내는 담이 또 있을까? 완전히 쌓지 않았으면서 완벽하게 안과 밖이 구분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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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안에 들기 전에 마음을 한 번 가다듬는 공간을 만들어 준 절묘한 담이 있다. 서석지 문전(門前)담이다. 대문을 낼 자리에 담을 ㄱ자로 쌓아 들어가는 방향을 담으로 한 번 틀어 문을 전혀 다른 방향으로 내었다. 입구에 들어서면 안이 먼저 보이지 않고 한 발짝 더 들어서야 안이 보이게 하였다. 안과 밖을 구분하는 동시에 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마음을 가다듬기 위함이다.

서석지 문전(門前)담  대문자리에 담을 쌓아 집에 들기 전에 마음을 가다듬는 공간을 내었다. 이 공간은 안에서 직접 보이지 않고 바깥사람도 안을 들여다 볼 수 없는 곳이어서 절묘하다
▲ 서석지 문전(門前)담 대문자리에 담을 쌓아 집에 들기 전에 마음을 가다듬는 공간을 내었다. 이 공간은 안에서 직접 보이지 않고 바깥사람도 안을 들여다 볼 수 없는 곳이어서 절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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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정서가 배어 있는 또 하나의 구조물은 굴뚝이다. 굴뚝은 연기가 빠져나가는 구실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장식물 역할을 하였다. 경복궁 아미산 굴뚝이나 낙선재 화계 굴뚝이 대표적인데 이는 궁궐의 굴뚝에만 국한되지 않고 민가나 절집에도 그대로 나타난다. 특히 절집의 굴뚝은 개성이 강하여 만든 이의 개성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깨진 기와와 흙으로 떡 주무르듯이 빚은 투박하기 이를 데 없는 것부터 잘 다듬어져 절제미가 있는 것까지 다양하다.

봉정사 영산암은 우화루와 법당, 삼성각, 요사채가 □자 공간을 만들어 여느 한옥집을 보는 것 같다. 아늑하지 폐쇄적이지 않다. 땅의 높낮이에 따라 공간을 우화루 영역, 앞마당, 법당 영역으로 3분하여 비록 작은 공간이지만 밋밋하지 않게 만들었다.

봉정사 영산암 굴뚝  흙과 암키와, 수키와로 질박하게 만들었다. 굴뚝이라 하여 어느 한 구석에 피해있지 않고 마당 한 켠 보이는 곳에 당당히 서 있다
▲ 봉정사 영산암 굴뚝 흙과 암키와, 수키와로 질박하게 만들었다. 굴뚝이라 하여 어느 한 구석에 피해있지 않고 마당 한 켠 보이는 곳에 당당히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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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 석등이나 건물의 색채, 마당규모에 아주 잘 어울리는 굴뚝이 있다. 깨진 기와와 암키와, 수키와를 구분하지 않고 흙과 버무려 질박하게 만든 굴뚝이다. 구석진 곳에 피해있지 않고 마당 한 켠 보이는 곳에 당당히 한자리 차지하고 있다.   

담이 영역과 공간을 구분하는 역할을 한다면 공간과 영역간에 소통을 하는 것은 문이다. 그래서 문은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않고 담과 혹은 다른 건축물과 어울려 제 기능을 다한다. 종가집은 대개 솟을대문으로 짓는데 마을의 형편이나 규모, 옆집의 생김새에 따라 그 크기를 달리한다. 솟을대문이라 하여 무작정 크게, 위압적으로만 짓지 않았다. 그래서 대문은 집안의 형편과 집주인의 인품을 잘 드러낸다. 샛문은 좀 다르다. 대문이 주인의 인품이라면 샛문은 집주인의 멋을 드러낸다. 샛문 양쪽 담 무늬를 달리하여 변화를 주던지, 샛문 옆에 꽃을 심어 샛문을 예쁘게 보이도록 한다. 

청암정 샛문 암팡지게 생긴 옆에 있는 충재와 닮았고 노란 원추리꽃과 잘 어울린다
▲ 청암정 샛문 암팡지게 생긴 옆에 있는 충재와 닮았고 노란 원추리꽃과 잘 어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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닭실마을 청암정은 담으로 둘러쳐 있어 권벌의 종택과 구분된다. 세 개의 샛문을 내어 바깥세상과 통하도록 하였다. 담은 토석담으로 쌓고 토석담사이를 째고 샛문을 내었다. 앙증맞게 생긴 것이 옆에 있는 서재인 충재와 닮았고 담 밑 노란 원추리꽃과는 참 잘 어울린다. 

병산서원에도 예쁜 샛문이 있다. 사당인 존덕사 옆에 제수(祭需)를 마련할 때 사용하는 전사청(典祀廳)을 드나드는 샛문이다. 낮은 토담도 예쁘지만 배롱나무가 샛문에 드리워져 더 예쁘다.

병산서원 샛문 배롱나무 꽃이 드리워져 더 예뻐 보인다
▲ 병산서원 샛문 배롱나무 꽃이 드리워져 더 예뻐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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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과 굴뚝과 문에는 독특한 표정이 있다. 궁궐과 민가 혹은 절집의 것이 다르고 잘 사는 집과 못 사는 집의 것이 다르다. 닭실마을, 주실마을, 연당마을, 청송 덕천마을, 내앞마을 등 지금까지 두루 거쳐 온 마을간에도 다르다.

그러나 밑바닥에 깔린 정서는 하나다. 정서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이 속에 담긴 정서는 우리의 것이다. 궁궐과 민가의 정서 혹은 마을간의 정서는 서로 단절되지 않고 끊임없이 교류한다. 민가의 꽃담이 궁궐의 꽃담과는 달라도 담을 꾸미고 싶어하는 정서는 매한가지다. 궁궐이든 민가든 굴뚝을 홀대하지 않고 하나의 장식물로 이용하는 정서도 한가지다. 서로 다른 한국의 미를 볼 따름이다.


#꽃담#문#굴뚝#토담#토석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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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不自美 因人而彰(미불자미 인인이창), 아름다움은 절로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사람으로 인하여 드러난다. 무정한 산수, 사람을 만나 정을 품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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