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이홈스 고아원에 큰형들인, 기숙사 생활을 하던 고등학생들이 하나 둘, 방학을 맞아 집으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작은 아이들과는 미술시간 음악시간을 통해 함께 할 수 있는 일이 많았지만, 큰 아이들과는 어떻게 친해질 수 있을까 조금 걱정되기도 했다. 고민 끝에 고아원과 조이비전스쿨 중간에 세워진 교회 외벽에 그림을 함께 그리면 괜찮겠다는 아이디어가 나왔다.
하지만 준비해 간 미술도구라고는 아크릴 물감 조금과 가느다란 붓 두 개. 전날 부랴부랴 차를 타고 나이로비로 가서 겨우 구한 유성페인트 몇 가지 색깔.
"붓이 없는데 어떡하지?"
"이 붓 두 개는 마무리 테두리 작업하는 데 쓰고, 나머지는 스펀지를 이용하자."
아이들이 쓰다가 버린 낡은 매트리스 하나를 꺼내 손으로 찢었다. 그랬더니 쓰고도 남을 만큼의 붓이 만들어졌다. 이 정도면 아주 풍성하다. 아프리카에 와서 배운 것 중에 가장 귀한 것이 바로 이것이다. 자족하기. 있는 것에 감사하기. 풍성하게 가지고 있을 때는 몰랐던 감사함이 내 안에 퐁퐁 솟아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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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튀어나가지 않게 질 좋은 붓이 없어도, 낡은 스펀지 하나로도 그림을 그릴 수 있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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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의 낡은 벽은 생각보다 벗겨진 곳이 많았지만, 함께 작업할 아이들은 이미 신난 상태였다. 미술 전공의 '조흭'과 몇 번의 벽화 그리기 경험이 있는 '니콜'은 먼저 벽에 묻은 먼지를 떨어내고 밑그림을 그렸다. 아프리카하면 떠오르는 동물들과 우리의 얼굴색, 그들의 얼굴색을 가진 천사들을 그렸다. 나무에 사랑, 기쁨, 행복 등의 열매를 주렁주렁 달기도 했다.
네 가지 색깔의 페인트를 서로 섞어 조금 더 많은 색깔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아이들과 함께 스펀지에 페인트를 묻혀 벽에다 톡톡톡 찍기 시작했다. 우리는 페인트칠하며 그들이 가르쳐주는 스와힐리어를 곧잘 따라하기도 하고, 서툰 영어로 대화하기도 했다. 큰 아이들과 친해지기 위해 만든 이 아이디어는 이미 성공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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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쉬는시간 종이 치기 무섭게 달려와 엎드려서 우리를 구경하는 아이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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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작은 아이들이 가만히 있을 리 없다. 땡그랑땡그랑 수업 마치는 종만 울리면 아이들은 기다렸다는 듯 뛰어나와 벽화를 그리는 우리를 둘러싸고는 구경했다. 가끔 우리가 한 눈 파는 사이, 참지 못한 꼬마아이들이 페인트 묻는 붓을 들고 벽에다 이름을 적어놓거나 낙서를 하기도 했다. 완벽하고 잘 그리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이 벽화를 통해 우리가 좀 더 친해지길 원하는 것이 더 소중했기 때문에 낙서한 아이를 잡아다 나무라긴 했지만, 그들의 얼굴에도 우리의 얼굴에도 미소는 떠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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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룩말 아프리카의 상징인 얼룩말. 아이들과 함께 그린 최고의 작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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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틀에 걸쳐서 작업한 벽화가 완성을 향해 갔다. 시간이 지날수록 반복되는 스펀지 찍기에 농땡이를 피우기도 하고, 분업을 위해 같은 색깔을 칠하게 한 것에 싫증을 내기도 하고, 색깔이 똑같이 나오지 않아 얼룩덜룩하게 된 부분도 있었지만 꽤 멋진 작품이 나왔다.
"니콜, 이 코끼리 너무 커!"
회색빛을 내지 못해, 파스텔톤 에메랄드 색깔의 몸뚱아리를 가진 코끼리를 인내심 있게 칠하던 보구아는 결국 내게 장난 섞인 불만을 나타냈다. 만난 지 5일도 채 되지 않은 우리들은 이렇게 친해졌다. 그리고 앞으로도 우리가 함께 해야 할 일이 많다는 것이 더 즐거워졌다.
한국에서는 풍족했던 것들이 이곳 케냐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물도 음식도 옷도 신발도…. 내가 한없이 누리던 것들이 이곳에는 없지만, 이상하게도 '없음'으로 인해 행복해지는 것은 참 놀라운 일인 것 같다. 참, 기적같은 일이다.
글. 니콜키드박
사진. 니콜과 현지인 아이들
덧붙이는 글 | 2009년 7월부터 9월까지 아프리카 케냐에서 자원봉사를 빙자한 여행을 다녀왔습니다. 그간의 기록을 정리하는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