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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나의 연인 고래를 만나기 위해
수많은 바다를 나는 항해했네
나는 귀여운 고래잡이배
<프랑스 고래잡이 노래> 중 
 
 
소녀 가장, 그녀의 고래 바다
 
남포 앞 바다에 죽은 고래 떼가 밀려오기 시작했다. 수 만리 먼바다에서 밀려온 고래의 죽음에 대해 연일 언론과 방송에서 시끄럽듯, 남포 다방을 들락거리는 뱃사람들도 죽은 고래에 대한 관심에는 별 다를 바 없었다. 남포 해안은 죽은 고래를 구경하기 위해 몰려온 구경꾼으로 축제 분위기 같았다. 영숙은 갑작스럽게 고래에 대해 이러쿵 저러쿵 말이 많은, 다방 손님들의 수다에 별로 귀 기울여 듣지 않는 듯 보였지만, 그녀의 시선은 유리창 너머 죽은 고래들이 바다의 저승사자처럼 줄지어 누워 있는 해안에서 자주 가 있었다. 
 
영숙의 고향은 장생포… 우리나라에서 제일 큰 고래잡이 항구 토박이 그녀의 아버지는 포경선을 타고 다니는 고래잡이였다. 어릴적 그녀는 집채만한 고래를 잡아오는 아버지가  위대해 보였던 것이다. 집안의 대대로 고래잡이 어부로 살아온 영숙의 아버지는 고래잡이가 금지되었던 시절에도 불법 고래 잡이를 떠나곤 했다. 그런 아버지를 둔 어머니는 늘 간을 졸이며 사시다가 돌아가셨다.  
 
그녀의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그녀는 학교부터 그만 두어야 했다. 그녀는 막막했다. 갑자기 돌아가신 어머니의 죽음에 연이어 불법 고래잡이 나간 아버지가 감옥에 들어갔다. 그녀는 어머니의 죽음에 대해 슬퍼할 겨를 없이, 소녀 가장이 되었다.
 
그녀는 학교를 그만두고 한 달 월급으로 겨우 쌀 한 말을 살 수 있는 양장점 심부름꾼으로 취직을 했다. 아침에는 우유배달과 신문배달을 했다. 어떻게 무슨 일을 하든 아버지가 돌아오실 때까지 악발이 같이 돈을 벌어야 했다. 줄줄이 사탕 같은 어린 동생들은 죽은 어머니의 부재를 외갓댁에 다니러 간 것쯤으로 여겼다. 
 
그 철 없던 동생들도 각자의 성장을 위해 그녀 곁을 떠나 살아가고 있었다. 아직도 밑빠진 물독에 물을 붓듯이 그녀의 월급에서 다달이 동생들의 자취생활비를 보내야 하는 그녀의 눈가에 화장으로 감추어도 숨길 수 없는 잔주름이 생겼다. 그래도 남포다방에서 가장 어린 축에 속하는 그녀의 실제 나이를 아는 사람은 강윤희 마담뿐.  
 
그녀는 새삼 주방에서 달그락거리며 찻잔을 정리하는 강윤희 마담을 만난 것이 감회로웠다. 만약 그녀가 선뜻 그 많은 돈을 빌려주지 않았다면, 그의 어린 동생들은 지금 어떻게 되었을까 생각하니, 그날처럼 앞이 캄캄했다.
 

 

영숙은 이런 저런 지난날을 생각을 하면서, 벽걸이 대형 텔레비젼 화면에서, 넥타이를 단정하게 맨 아나운서와 해양과학자 한 사람이 나와, 남포 앞바다에 밀려와 죽은 고래의 죽음에 대해 귀를 기울이면서, 그녀의 시선은 먼 피안 같은 바다의 저편을 바라 보고 있었다.

 

고래가 집단으로 죽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여론은,  남포 해안으로 밀려온 고래의 집단 죽음에 대해 지구의 공해 때문이라고 보는 견해가 많습니다. 이에 대해서 김박사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

 

"한 마디로 국민들의 호기심에 만족할 말씀을 드리기는 힘듭니다. 인간과학으로 알아내기 힘든 것이 자연계의 신비한 현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더구나 수 천 킬로미터의 먼바다에서 밀려온 고래의 자살에, 오늘날의 심각해진 바다의 오염만으로 간단하게 단정한다면, 바다의 오염이 없던 시절에도 고래의 자살이 있었다는 점이지요. 그러니까 1723년 1984년 사이에도 600마리의 고래가 이 해안으로 기어 올라와 죽었다는, 장형수 해양대학 교수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증거기록이 발견되었습니다. 사실 고래가 인간에 필적할 만큼 복잡한 두뇌를 가지고 있는 동물임을 부정하는 과학자는 없습니다. 고래는 소리를 이용해서 자신의 의사를 전달할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일상적인 행동으로 봐서도 고도의 신경조직을 갖추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인간이 생각하는 상상 이상으로 고래는 오감을 가지고 있는 고등동물이라는 점과 인간처럼 뜨거운 피가 흐르고 있다는 점 등입니다..."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 눈앞의 현실이 텔레비전을 통해 전국으로 방송되고 있었다. 그러나  죽은 고래들이 밀려와 있거나 말거나, 남포 바다 가운데는 여느날과 다르지 않게 고깃배들과 상선들과 운반선들이 붐비고 있었다. 영숙은 활짝 열린 창 밖으로 고개를 쭉 내밀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다방 주변으로는 나지막한 낡은 빌딩들과 신식 빌딩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다. 해안을 껴안고 도는 도로는 하나의 일직선을 이루고 있지만, 그 길은 마치 구리처럼 굽혀져 있어 차량의 물결이 바다를 떠다니는 배들처럼 흘러가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한 블록 건너 극장가와 유흥업소들이 즐비하게 모여 있었다. 그녀는 새삼 바다가 보이는 이 공간이 고마웠다. 하루 24시간 이 공간에서 먹고 자는 그녀의 생활 속에 이렇게 환하게 트인 바다가 없다면, 그녀는 남포다방에서 생활을 견디기 힘들었을 터다.
 
"미스 정 ! 정말 고래들이 자살했다고 생각하니 ? 난 고래들이 상처를 입고 밀려와 죽은 거 같이 보이는데..."
 
영숙의 곁에 그림자처럼 조용히 다가와서 말을 건네는 사람은 다름 아닌 남포다방 강마담이었다. 그녀는 허벅지가 다 보일 정도로 옆이 트인 차이나 복장을 입고 있었다. 이목구비가 얼핏 보면 중국 여인의 분위기를 닮아 있었으나, 옥의 티처럼 막 성형 수술한 쌍꺼풀은 붓기가 빠지지 않아 보는 이들에게 거북살스러움을 주고 있었으나, 전체적으로 풍만한 몸매에 그런 흠은 충분히 가려지고 있었다.
 
인간에 필적할 만한 복잡한 두뇌와 심리를 가진 고래
 
"언니, 고래들이 정말 자살할 수 있을까요?"
"아무래도 이건 종말의 징조 같지 않니?"
"언니, 어제 라디오에서 들은 얘기인데요. 고래들이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상황을 깨닫고 미리 절망에 싸여 자살을 했을 수 있다고 하던데요. "
"뭐 ? 그럼 사람과 같은 심리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말이니?"
"언니, 더 궁금한 것은 자칭 고래 연구가, 맹선장님께 나중에 물어보세요. 언니, 나 배고파요. 언니, 식사 안하고 나오셨죠? 제가 라면 끓여 드릴게요."
"나야 좋지만, 넌 삼시세끼를 라면으로 질리지도 않니? 도선장 수표는 모셔 둘 거니?"
"언니! 그 수표 쓰면 절대 안돼요. 돌려줘야 해요."
"돌려주긴 왜 돌려 줘? 차 값으로 내 놓은 건데..."
"차 값 제하고 돌려주세요. 난 절대 도 선장 돈은 안받아요."
"야. 너 사는 거 보면 내가 숨 막혀 죽겠다. 라면은 사 놓은 거 있니?"
"언니, 금방 내려나가서 사오면 돼요."
"그냥 시켜 먹자. 귀찮게 뭐하러 라면 사러가니?"
" 언니, 김치 라면에 계란 넣어 풀어서 끓인 거 먹고 싶다면서요? 금방 사올게요."
 
영숙은 뒤에서 강마담이 부르는 소리에 귀를 막으며, 2층 계단을 단숨에 뛰어내려왔다. 계단을 내려서자, 죽은 고래를 리어카에 싣고 끌고 오는 건장한 사내 뒤에는 아낙 한 명이 땀을 뻘뻘 흘리며 리어카를 밀며 다가오고 있었다.  
 
영숙은 문득 리어카에 실려 있는 상처 입은 고래를 쳐다보면서, 저 고래들이 외로움을 이길 수 없는 사람처럼 제 몸을 자해한 것이라는 생각이 불쑥 들었다. 만약 고래들이 인간처럼 자살을 꿈꾸는 동물이라고 가정한다면, 이건 끔찍한 일이 아닐 수 없다고...
 
마치 숙취에서 깨어났을 때 바라보면 몽환처럼 엷은 아침 노을이 물든 바다에서 수십 마리의 고래들이 몸을 공중으로 솟구치는 듯한 환영을 영숙은 보았다. 그런 그녀가 잠시 바람에 긴 머리칼을 날리며 서 있는 모습을 멀리서 지켜보는 시선 하나가 있었다. - 계속
 

 

덧붙이는 글 | <고래의 삶과 죽음-시공사>에서 일부 참고함.


#바다#고래의 자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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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곧 인간이다고 한다. 지식은 곧 마음이라고 한다. 인간의 모두는 이러한 마음에 따라 그 지성이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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