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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어린이재단에서 발행하는 월간지 <사과나무>를 만들고 있습니다. 잡지 발행 수익금으로 어려운 이웃들을 돕고 있지요. 제가 만드는 잡지에는 매달 어려운 이웃들을 소개하는 꼭지가 있습니다. 글을 읽고 독자들의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기는 한데, 그것뿐만 아니라 어려운 이웃들에게 지속적인 관심을 부탁하는 마음도 들어있습니다.

 

3년째 이 일을 하면서 한 달에 한 번씩 어려운 이웃들을 만납니다. 일 년에 열두 번씩, 지금껏 삶이 힘겨운 우리네 이웃들을 서른 가족 이상 만났습니다.

 

3년 동안 만난 서른 가족, 충격이었습니다

 

처음 만난, 어려운 이웃은 40대 남성이었습니다. 딸 하나와 아들 둘을 두고 부인과 열심히 살아가던 가장이었는데, 어느 날 고열에 시달리다가 그만 간질 판정을 받았다고 합니다.

 

갑자기 찾아온 병에 그는 가족을 모두 떠나보내야 했습니다. 형편이 어려워 수술을 차일피일 미루다보니 간질은 더욱 자주 찾아왔고, 그 강도도 나날이 세졌습니다.

 

결국 아내는 함께하기 힘들다며 세 아이를 데리고 떠났습니다. 남겨진 그는 시각장애인인 노모의 몫이 됐습니다. 노모는 아들이 쓰러진 소리를 들어도 쉽게 찾을 수가 없습니다.

 

온 방 안을 손으로 휘휘 더듬은 후에야 겨우 아들의 상태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장성한 아들이 이제는 효도할 수 있겠다 싶었는데, 되레 짐이 돼버려 속이 문드러진다고, 노모는 어눌한 말투로 천천히 말했습니다.

 

그동안 어려운 이웃들을 직접 만난 적이 없었던 탓에 그 모자 이야기는 제게 큰 충격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삶이 힘겹다, 힘겹다 하지만 이처럼 막막한 경우가 또 있을까 싶었습니다. 취재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은 마음이 참 복잡했습니다.

 

텔레비전이나 인터넷, 잡지나 신문 등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접한 힘든 삶의 풍경과 내 두 눈으로 직접 목격한 광경은 확연히 달랐습니다. 날것을 그대로 접했을 때 느끼는 그 당혹스러움은 좀처럼 진정되지 않았습니다.

 

"도와달라"고 절절히 쓴 기사, 다음날 삭제한 까닭

 

그날 사무실에 도착하자마자 글을 썼습니다. 도와 달라고요. 이 이야기를 그냥 읽고 지나치지 말고 꼭 도와달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다음날 아침 저는 그 글을 모두 지웠습니다. 까닭은 제 글에서 느껴지는 기분 나쁜 기운 때문이었습니다. 그것은 '구걸'이었습니다.

 

타인에게 도움을 받고, 타인을 도와주는 것은 아주 당연한 일입니다. 적게 가진 사람이 많이 가진 사람에게 도움을 받았다고 비굴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냥 적게 가진 것뿐이니까요. 가난한 것은 부끄러운 것도 아니고, 무능력한 것도 아니고, 죄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저는 적게 가진 그들을 낮춰 이야기했습니다. 그래야만 불쌍히 여겨 독자들로부터 조금이라도 더 많은 후원을 받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서 말입니다. 타인의 삶을 함부로 낮추거나 안쓰럽게 바라보는 태도는 그리 환영받을 행동이 아님을 알면서도, 자신도 모르게 마음 깊숙이 있었던 그 얄팍한 비굴함이 고개를 쳐들었나봅니다.

 

그래서 도움을 요청하는 처지이니 넙죽 엎드려야 된다는 단순한 생각에 달갑지 않은 글을 만들었습니다. 타인을 돕는 것은 가장 인간적인 행동이고 자연 순리처럼 당연한 것이란 생각을, 그날 이후 글을 쓸 때마다 늘 간직하려고 합니다. 각박한 세상에서 참으로 이상적이고 뜬구름 같은 생각인지 모르겠지만, 도움을 받는 이들이 조금 더 당당하게 살았으면 하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고마움은 잊지 말아야 하겠지만 말입니다.

 

후원 받은 8남매 가족 "감사합니다, 잊지 않겠습니다"

 

유난히 잊히지 않는 가족도 있습니다. 인천의 8남매입니다. 혼자서 여덟 남매를 키우느라 자신의 몸 어디가 망가지고 있는지조차 신경 쓰지 못하는 엄마는 제가 온다고 옥수수를 냄비 가득 삶아놓으셨습니다.

 

문을 열자마자 현관 바로 앞에 놓여 있는, 창문 하나 없는 주방의 싱크대 위에 김이 모락모락 나는 옥수수가 먼저 보였습니다. 그 열기 때문인지, 한여름이어서 그런지 방안은 후끈거렸고, 선풍기 앞에는 8남매가 옹기종기 모여 있었습니다.

 

밤낮으로 일하는 엄마를 대신해서 어린 동생들을 돌보느라 고등학교 진학을 포기한 첫째 딸, 어려운 가정형편을 알고 일찍 취업하기 위해 미용학교에 들어간 둘째 딸, 파티시에를 꿈꾸는 셋째 아들, 변호사가 되고 싶은 넷째 딸, 운동선수가 되겠다는 다섯째 아들, 또래에 비해 왜소한 여섯째 아들, 끼가 많은 일곱째 딸, 애정결핍으로 마음고생을 심하게 한 막내아들.

 

엄마는 이번 달까지 영구임대아파트 입주금을 마련해야 하는 상황이었지만, 당뇨병으로 가슴에 꽉 찬 고름을 빼내고 제대로 돌보지 않아 몸 상태가 좋지 않았습니다. 또 석 달째 밀린 월세 또한 걱정이지만, 아이들 앞에서는 웃음을 잃지 않았습니다.

 

8남매 이야기가 잡지에 실린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전화가 왔습니다. 8남매 엄마였습니다. 고맙다는 전화였습니다. 이후 많은 도움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가장 큰 문제였던 영구임대아파트 입주금이 해결됐고, 엄마의 유두염증 관련 수술도 받을 수 있게 됐다고, 또 기대하지 않았던 후원금으로 아이들 머리띠도 사줄 수 있게 됐다며 정말 행복하다고 하셨습니다.

 

잡지를 보고 어느 방송국에서 촬영을 해갔고, 그 덕에 집안을 예쁘게 단장했다고 했습니다. 엄마는 얼굴은 모르지만 후원자들에게 모두 감사하다고, 이 다음에 8남매가 자라면 사회에 이 모든 것을 환원하는 사람이 되도록 키우겠다고 했습니다.

 

부동산보다, 펀드보다 더 수익률 높은 투자는...

 

이처럼 한 번의 후원으로 행복을 찾은 가정도 있지만, 반면에 꾸준한 후원이 필요한 경우도 있었습니다. 경상도의 어느 시골에서 성악가를 꿈꾸는 아이가 그러했습니다. 아이의 엄마는 읍내에서 작은 미용실을 운영하고, 아빠는 장애인이었습니다. 시골에서 살던 사람들이 하나둘 도시로 떠나가면서 엄마의 미용실에도 나날이 손님이 줄어갔습니다.

 

때문에 엄마는 노래를 잘하는 아들의 뒷바라지를 해줄 수 없는 형편에 속상해서 저희 잡지에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자신보다 더 어려운 이웃이 있을 텐데, 죄송하다는 말씀을 계속 했습니다. 아들의 노래 실력은 보통이 아니었습니다. 경상도에서는 단연 최고였고, 전국에서도 둘째가라면 섭섭할 재능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요즘 같은 세상에, 그것도 음악이라는 것을, 혼자 열심히 노래만 부른다고 되는 일은 아니었습니다.

 

답답한 마음에 아들은 엄마에게 몇 번 부탁도 한 모양입니다. 배우고 싶다고 말입니다. 엄마의 말씀을 들을수록 답답했습니다. 가난하다는 이유로 아직 꽃봉오리도 피우지 않은 아이들에게 꿈을 제한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았습니다. 가난해서 꿈을 꿀 수 없다면, 그것만큼 억울한 일이 또 있을까 싶었습니다. 요즘은 펀드니, 보험이니, 부동산이니 여기저기에 투자를 참 많이 하는데, 누가 이 아이에게도 투자를 해줬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행히, 아이의 이야기가 잡지에 소개된 후에 든든한 후원자가 생겼습니다. 아이가 꿈을 이룰 수 있도록 고등학교 3년 내내 후원해주겠노라, 하는 멋진 후원자가 나타난 것입니다. 그 소식을 담당 사회복지사 선생님으로부터 들었을 때, 참으로 기뻤습니다. 그러면서 마음속으로 바랐습니다.

 

제발 이 후원자의 마음이 변하지 않기를, 그리고 무엇보다 아이를 계속 도와줄 수 있도록 후원자에게 늘 좋은 일만 가득하길. 만약 후원자가 3년의 약속을 지키지 못하게 된다면, 아이는 꿈을 접어야 할지도 모릅니다. 그런 비극만은 절대 일어나지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

 

내가 '지른' 기부에 예의를 담아주세요

 

'1대1 결연후원'처럼 직접적인 후원은 그것이 끊기면, 그동안 도움을 받았던 이웃들의 삶이 막막해집니다. 어찌 보면 어려운 이웃들에게는 매달 일정한 금액의 후원은 월급과 같은 것입니다. 그 돈으로 아이들은 공부도 하고, 밥도 먹고, 꿈을 키우며 살아갑니다. 그런데 그것이 하루아침에 뚝 끊기게 되면, 다음 후원자가 나타날 때까지 아이들의 삶도 중단되는 것입니다.

 

제가 만드는 잡지의 발행처인 어린이재단은 그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다양한 프로그램을 만들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혼자 먹는 밥상'이란 프로그램을 만들어 많은 사람들의 후원을 받아 일정 금액이 모이면, 그것으로 많은 아이들을 골고루 꾸준히 도와주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개인 사정상 후원을 지속하기 어려운 사람도, 그리고 도움을 받고 있던 사람도 서로 본의 아닌 상처를 주는 일이 줄어들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프로그램이 개발되는 것도 좋지만, 타인을 도와주는 따뜻한 손길에도 예의는 필요한 듯합니다. 도와준다고 해서 그 사람을 얕보거나 우쭐하는 것만큼 못난 사람도 없습니다. 또 후원을 무슨 유행을 '따르는' 것이나, 연말연시 분위기에 휩쓸려 무책임하게 '지르는' 것으로 생각해서도 안 되겠지요.

 

남을 도와주는 것은 가장 인간다운 행동이지만, 행하기 힘든 일입니다. 그래서 더욱 모든 후원을 칭찬하는 것이 마땅하나, 더 욕심을 부리자면 그 속에 '예의'를 담았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우리가 상처를 보듬어주겠노라 도움을 드린 그들이 우리의 도움으로 상처받는 일은 없어야 하지 않을까요?


#기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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