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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월리(明月里)는 제주시 한림읍에 속한 중산간 마을이다. 명월리는 고려시대 16군현의 하나인 명월현으로 조선시대는 제주도에 설치됐던 9진(九鎭) 가운데 규모가 가장 컸던 명월진성의 소재지였다. 그러나 이후 금악리, 옹포리, 동명리, 상명리가 각각 명월에서 분리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팽나무를 보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면 '상명리'로 갔을 터이다. 지금은 그도 나처럼 제주를 떠나 육지로 갔지만, 간혹 종달과 상명을 오가며 친분을 나누었던 추억이 남아있는 마을이기 때문이다.

 

 

명월리의 쇠퇴는 일제강점기에 본격화 됐다. 해안을 따라 신작로가 생기면서 서북부중심지로서의 역할과 위상을 점차 한림으로 넘기게 되었던 것이다. 더군다나 수백 년 역사의 상징이었던 명월진이 일제강점기에 없어졌고, 진성(鎭城)의 돌담은 한림항 축조의 석재로 투입되면서 성의 일부만 남게 된 것이다. 일본은 읍성과 진을 없앰으로써 그곳에 남아 있는 군사들과 무기고 같은 무력저항의 근거를 말살시켜 버린 것이다.

 

 

이러한 명월리의 시련은 4·3항쟁도 피해나가지 못했다. 군경토벌대는 1948년 당시 약 230호였던 명월리 중 하동을 제외한 상동과 중동의 가옥 전부를 불태워 버렸던 것이다. 고려시대 몽골항쟁을 위시해 수많은 외침과 근현대사로 이어오는 과정에서 제주도 곳곳이 역사의 아픔을 새긴 것이니, 제주의 땅 그 어디도 아프지 않은 땅이 없다.

 

종달리에 살 때에는 제주의 땅 중에서 가장 아픈 곳이 종달리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제주의 땅 어느 곳도 불어 닥친 바람을 비껴갈 수 없었던 것처럼, 질곡의 역사를 온 몸으로 부둥켜안으며 깊은 상처를 새기고, 치유하며 살아온 것이다. 아프지 않은 땅, 아프지 않은 마을은 하나도 없다. 아픔 없는 사람 없는 것처럼 말이다.

 

 

언젠가 상명리에 마실을 갔다가 명월리에 팽나무가 많은 이유에 대해서 촌로에게 들었다.

 

명월리는 선비가 많이 나온 마을로 선비가 급제를 하거나 고위관직에 오르면 그것을 기념하여 팽나무를 심었다고 한다. 그렇게 팽나무 군락이 조성되면서 마을에서는 팽나무를 지키기 위한 조례도 만들었단다. 팽나무를 손상시킨 자는 목면반필(木棉半疋)을 징수하며, 이행하지 않으면 식수를 길어오지 못하게 하고, 불씨를 제공하지 않음으로 공동체에서 고립시켜 버렸다고 한다.

 

팽나무를 지킨 이유는 그 외에도 많이 있을 것이다.

 

나무 하나, 돌 하나, 꽃 한 송이도 때론 목숨을 걸고 지켜야만 할 때가 있는 법이니 내 주변의 사소한 것 하나라도 허투루 맞이하고 보낼 일이 아닌 것 같다.

 

 

나이를 가늠할 수 없는 오래된 팽나무에 콩짜개란이 다닥다닥 붙어있다. 참으로 오랜만에 만나는 콩짜개란이다. 곶자왈이나 습기가 있는 숲에 들어가면 그리 어렵지 않게 나무나 돌에 붙어있는 콩짜개란을 만날 수가 있었다. 초록의 이파리가 콩을 반쪽으로 쪼개 놓은 듯해 붙여진 이름이다.

 

이렇게 어울려 살아가는 것이 자연이다. 사람들도 이렇게 어울려 살아가는 비결을 자연에게서 배웠다면 이리도 많은 역사적인 비극은 없었을 터이다.

 

 

고개를 들어 팽나무의 잔가지들을 바라본다. 청아한 제주의 하늘과 나뭇가지의 조화, 하늘이 바다가 되고 팽나무가지는 물살이 되어 흐르고 있는 듯하다.

 

저 팽나무 가지 사이로 별이 흐르고, 달이 흐르는 밤을 상상해 본다. 저 팽나무 가지 사이로 밝은 달이 떠오르면 명월리는 그 이름에 걸맞은 '달빛마을'이 될 것이다.

 

종달리에 살적에 마당에는 커다란 팽나무가 있었다. 나무타기를 좋아하는 막내의 놀이터기도 했고, 여름이면 그늘을 제공해 주었다. 팽나무가 있어 새들이 날아들고 아침이면 온갖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에 잠을 깨곤 했다. 종달초등학교에도 제법 큰 팽나무가 있어 마을잔치나 운동회 때면 팽나무 아래는 삶들로 북적했다. 팽나무는 육지로 치면 느티나무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명월리의 팽나무를 바라보며 나는 잠시 저 한라산 너머의 종달리 팽나무 곁에 가있었다.

 

이제 빨강 애마를 돌려줘야 할 시간이 다가온다. 애마를 달리게 하는 동력이 되는 휘발유가 아직도 25%나 남았다. 15%만 남겨다 주면 되는데 아무래도 맞추기는 힘들 것 같다. 이렇게 얄팍한 상술은 소탐대실의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을 알았으면 좋으련만, 그럴 가능성은 많아 보이지 않았다.

 

첫날, 비양도 일몰의 풍경을 담고 싶었던 한림으로 들어섰다. 천년의 섬 비양도를 바라보다 한림항으로 갔다. 한림항 컨테이너 박스 한 켠에서 인부들이 점심을 먹고 있었다. 인부들의 왁자지껄한 소리에 섞여 들려오는 말은 제주어가 아니었다.

 

(이어집니다.)


#제주도#명월리#팽나무#한림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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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소재로 사진담고 글쓰는 일을 좋아한다. 최근작 <들꽃, 나도 너처럼 피어나고 싶다>가 있으며, 사는 이야기에 관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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