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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월 말, 서울 종로 중구 걷기모임은 서울성곽의 동편을 걷기 위해 지하철 3호선 동대입구역에 모였다. 날씨가 추워서인지 많은 사람들이 모이지는 않았지만, 봄을 만끽하기에는 충분히 기분 좋은 바람과 햇살이 싱그러운 날이었다.

불교대학인 동국대 인근은 남산, 국립극장, 신라호텔, 장충단과 학교 안에 있는 정각원, 큰 길을 건너 보이는 파라다이스재단의 건물 등 볼거리가 많은 곳이다. 특히, '장충단'은 본래 을미사변 때 피살된 시위연대장 홍계훈과 궁내부대신 이경식 등을 기리기 위해 고종 황제 때 쌓은 제단으로 역사적으로 의미가 큰 곳이다.

신라호텔 옛 박문사 터
▲ 신라호텔 옛 박문사 터
ⓒ 김수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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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장충단은 세계 역사상 그 유래를 찾아 볼 수 없는 천인공노한 만행이었던 국모 명성황후를 시해한 일본에 대한 반일감정을 상징하는 장소였기에, 일제는 1919년 강제로 공원으로 바꾸었고, 아쉽게 우리 정부도 현재까지 공원으로 방치하고 있는 상황이다.

또한 경희궁의 정전이었던 '정각원'은 일본 조계사의 본당으로 팔려와 현재는 문화재적인 가치를 잃고 동국대 안에서 학내 사찰인 정각원의 본당으로 그대로 쓰이고 있다.

일행들은 일정상 장충단과 정각원은 둘러보지 않고, 이토 히로부미를 추모하는 일본사찰 '박문사(博文寺)'가 있던 신라호텔 안으로 들어갔다. 조선총독부는 장충단을 공원화한데 이어 1932년에는 공원 동쪽에 이등박문을 추모하기 위한 사찰을 짓고 사찰 뒤 언덕을 춘무산(春畝山)이라고 칭한다.

박문사라는 이름은 이토의 이름인 이등박문(伊藤博文)에서 따왔고, 춘무는 이토의 호이다. 박문사는 이토의 23주기 기일인 1932년 10월 26일에 완공되었다.

박문사 창건은 "조선 초대총감 이토 히로부미의 훈업을 영구히 후세에 전하고 일본불교 진흥 및 일본인과 조선인의 굳은 정신적 결합"을 도모하기 위한 것이었다.

당시 일제는 너무도 무례하게 박문사 건축에 광화문의 석재, 경복궁 선원전과 부속 건물, 남별궁의 석고각 등을 무단으로 가져와 사용했으며, 경희궁 흥화문을 떼어와 정문으로 삼았다. 특히 흥화문은 해방이 된 이후에도 이곳에 그대로 남아 영빈관의 정문, 신라호텔의 정문으로 오랫동안 쓰이다가 1980년대 후반 경희궁 복원 사업 과정에서야 겨우 경희궁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박문사는 정부수립 이후 철거되었고, 1973년까지 국빈을 모시는 영빈관으로 쓰이다가 현재는 삼성그룹이 운영하는 국내 최고급 호텔인 신라호텔이 자리를 잡고 있다.

민족중흥 박정희의 글씨 같다
▲ 민족중흥 박정희의 글씨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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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행은 호텔 뒤편의 서울성곽의 흔적을 확인해 보자는 의미에서 호텔로 들어갔지만, 뒤편을 전부 보지는 못하고 언덕 위 바위에서 '민족중흥'이라고 써진 글씨를 발견한다. 분명 박정희 대통령이 쓴 글씨 같았다. 이런 곳에 왜 저런 글씨가 있을까 하는 의문을 가지면서 모두가 웃었다. 국빈을 모시던 영빈관으로 쓰이던 곳이라 바위에 글씨를 새긴 것으로 보였다.

장충체육관 필리핀인들이 지었다
▲ 장충체육관 필리핀인들이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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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텔에서 나와 인근에 있는 '장충체육관(奬忠體育館)'을 둘러본다. 1963년 한국에서 처음으로 세워진 실내경기장으로, 원래 육군체육관으로 사용하던 것을 경기장으로 개보수한 것이다.

1960년대 돔 구장을 설계하고 짓는 기술이 없었던, 한국의 사정상 당시 동아시아 최고의 선진국 중에 하나였던 필리핀이 설계와 시공을 하여 화제가 되기도 했던 곳이다. 현재는 간혹 프로배구가 열리고 있다.

신당동성당 성당
▲ 신당동성당 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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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 천주교 신당동 성당을 지나며 길을 가다보니, 성곽 위에 지어진 집이며, 담장으로 성곽돌이 쓰이는 곳을 많이 발견할 수 있다. 특히 이곳에서 흥인지문을 지나는 구간까지는 성곽의 유실이 심한 곳이라 그런지 곳곳에서 안타까운 모습이 많이 보였다.

단독주택 아래가 성곽돌 서울성곽
▲ 단독주택 아래가 성곽돌 서울성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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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곽 위에 단독주택이나, 교회, 학교, 병원, 빌라 등이 많이 보였고, 간혹은 심하게 손상되거나 위아래가 바뀌어 복원된 곳 등, 이상하고 해괴한 모습의 성곽 돌을 많이 발견할 수 있었다. 

석축 위의 집  집
▲ 석축 위의 집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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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 광희문으로 가는 길옆에 건교부 산하 비영리 공익법인인 '한국 사랑의 집짓기 운동 연합회'(Habitat for Humanity)사무실이 보였다.

해비타트는 케냐의 나이로비에 본부를 두고 있는 무주택자를 위한 집짓기 운동 사업 본부로 1976년 미국의 변호사인 밀러드와 그의 부인 퓰러가 창설자이며,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의 퇴임 후 적극적인 활동으로 잘 알려져 있다. 한국에서는 1992년 과기처장관을 지낸 정근모 박사를 이사장으로 하여 국제 해비타트 한국 운동본부가 발족되었다.

사랑의 집짓기 운동본부  사랑의 집
▲ 사랑의 집짓기 운동본부 사랑의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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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짓기 활동에는 연령에 상관없이 자원봉사자, 후원자, 입주자가 함께 참여하며 입주자는 입주 후 건축비를 15년 이상 장기간 무이자로 상환하며 그 비용은 다른 집을 짓는 데 사용된다. 나도 기회가 되면 이곳에서 봉사를 하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하던 곳이라 우연한 사무실 발견은 기쁨이었다.

이어 길을 돌아서니 '광희문(光熙門)'이다. 광희문은 시구문(屍軀門), 수구문(水口門)이라고도 하였으며 서소문(西小門)과 함께 시신(屍身)을 내보내던 문이다. 1396년(태조 5) 도성을 축조할 때 창건되었으며, 1422년(세종4) 개축된 것으로 추측된다.

광희문 시문
▲ 광희문 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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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11년(숙종 37) 민진후의 건의로 금위영(禁衛營)으로 하여금 개축하게 하고, 1719년 문루를 세워서 광희문이라는 현판을 걸었다. 그 후 1975년 도성복원공사의 일환으로 석문을 수리하고 문루를 재건하였다.

광희문의 용 문양 발톱이 4개다
▲ 광희문의 용 문양 발톱이 4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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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루 아래를 지나는데 천정에 그려진 용의 문양이 멋스러워 보였다. 동행했던 고교 역사교사인 이봉규 선생은 "용의 발톱을 자세히 보면 조선의 것은 4개이고, 황제국인 중국의 것인 5개인데, 대한제국이 선포된 다음이 그려진 곳곳의 용 문양은 발톱이 5개로 늘었다"고 재미난 설명을 해주었다. 나라의 지위에 따라 용의 발톱 수도 달랐다는 사실, 참 놀랍고 재미있었다.

서울성곽 돌 위에 공사자, 감독자 등의 이름이 있다
▲ 서울성곽 돌 위에 공사자, 감독자 등의 이름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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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광희문과 흥인지문 인근의 석축에 성을 쌓은 인부의 이름과 관리자 등의 이름이 자세하게 쓰여진 돌도 이 선생의 설명을 통하여 재미있게 들을 수 있어 좋았다. '조선시대에도 공사에 대한 감리가 철저했구나!' 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어 한양공고 방향으로 횡단보도를 건너 동대문운동장을 없애고 작년 10월 말에 새롭게 일부 완공된 '동대문역사문화공원(東大門歷史文化公園)'으로 갔다. 이곳은 서울의 옛 역사를 보여주는 공원이다. 바로 옆에는 '동대문디자인플라자파크'가 건설되고 있었다.

동대문운동장  다자인파크 공사장
▲ 동대문운동장 다자인파크 공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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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은 전망대에 올라 전체를 조망한 다음, 내부를 돌았다. 아직은 곳곳이 공사장이고, 분주했지만 그래도 부분 개장이 된 역사문화공원은 나름대로 볼만했다.

서울성곽에서 최초로 확인된 방어시설인 치성(雉城) 및 도성 안쪽에서 바깥쪽으로 물을 빼기 위한 홍예 구조의 이간수문(二間水門), 야외 유구전시장, 유적 전시관 등을 둘러보았다.

이간수문 수문
▲ 이간수문 수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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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는 고교야구나 한국 현대 스포츠의 본고장으로 알려진 동대문운동장은 그대로 보존되는 것이 역사 문화적으로 더 큰 의미를 가지는 것이라고 생각을 하고 있다. 하지만 현재의 공사로 서울성곽이나 이간수문 등이 일부 복원되어 어느 정도 만족은 하고 있다. 그러나 역사문화의 파괴, 복원에 대한 개인적인 의문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는 난제인 것 같아 마음이 아프다.

역사, 문화와 함께 하는 서울시 종로/중구 걷기 모임
네이버 카페    http://cafe.naver.com/daipapa


#서울성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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榴林 김수종입니다. 사람 이야기를 주로 쓰고 있으며, 간혹 독후감(서평), 여행기도 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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