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어린 시절, 아버지의 책상 위에 있던 파란색 도면은 나에게 별세계였다. 아버지는 그 파란색 도면 위에 수많은 네모를 그렸고, 그 도면은 집이 되었다. 아버지는 내가 18살이 될 때까지 건축업을 하셨다.

건축업이라는 것이 여름에는 바쁜 일이라 항상 여름만 되면 아버지는 도면과 씨름을 하셨다. 종이 냄새가 가득한 파란색 도면을 들고 귀가하신 아버지는 도면 앞에서 밤을 새기 일쑤였다. 그리고 난 그 옆에서 호기심 어린 눈으로 아버지가 그리는 그림을 지켜보곤 했었다. 지금은 예전처럼 큰 건물의 도면을 그리지 않으셔서 더 이상 파란 도면을 구경할 일이 없다. 하지만 가끔 집안 정리를 하다보면 예전에 아버지가 그리셨던 그림들이 나오곤 한다.

 <건축, 음악처럼 듣고 미술처럼 보다> 서현 지음, 효형출판 펴냄
 <건축, 음악처럼 듣고 미술처럼 보다> 서현 지음, 효형출판 펴냄
내가 고등학생일 때 이사한 지금의 집도 아버지의 손으로 만들어진 집이다. 도면 설계부터 마감까지 아버지가 거의 다 하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집이 다 지어진 뒤 아버지가 하도 가족들에게 생색을 내서 짜증을 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아버지는 공간을 넘나드는 힘든 작업을 하셨던 것이다. <건축, 음악처럼 듣고 미술처럼 보다> 저자 서현의 말대로 3차원에 있는 집의 모양을 2차원인 도면에 옮기는 작업을 하셨기 때문이다.

2차원 도면에는 모든 것을 점과 선으로밖에 표현할 수 없다. 점이 모여 선이 되고, 선이 모여 면이 된다는 것은 아무리 미적 감각이 없는 사람이라도 미술 교과서에서 배워서 알고 있을 것이다. 건축도 점에서부터 시작한다고 하니 쉽게 접근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저자가 말하는 점은 사소한 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바로, 벽에 액자를 걸 때 못을 박는 곳을 정하는 것도 건축의 일부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못을 박을 곳을 고민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대학생이 된 뒤, 처음으로 학교 행사에 참여하면서 미대 친구를 만났다. 태어나서 딱 두 달만 미술학원에 다녀본 나에게 미대 친구는 신선한 느낌으로 다가왔다. 옷장에 있는 옷을 대충 골라서 입고 나오는 나에게 그 친구는 색 배치가 맞지 않다면서 나의 옷 입는 센스를 지적하곤 했다. 아마 그 친구야말로 못을 박을 때 몇 시간 동안 벽의 전체적인 비례를 고민하는 친구일 것이다.

<수학의 정석>부터 옥타브까지

대학교에서도 건축학과는 자연 계열로 분리되어 있기 때문에 그동안 건축은 딱딱한 것이라고 생각해 왔다. 그런데 저자 서현은 건축을 미술, 음악과 관련지어 이야기하고 있다. 심지어 피보나치의 수열까지 등장한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비례'이다. 비례의 꽃은 '황금분할'일 것이다. 사람의 얼굴에서도 황금분할을 찾는 것을 보면 우리는 비례에 상당히 익숙해져 있는 것 같다. 새벽까지 <수학의 정석>과 함께 씨름했던 수열에도, 음악 학원 선생님께 혼나가면서 배웠던 화음과 옥타브에도 비례가 들어있다고 한다.

예술이 조화된 건물 예술과 건축의 경계는 넘나드는 건물
▲ 예술이 조화된 건물 예술과 건축의 경계는 넘나드는 건물
ⓒ 오진주

관련사진보기

그리고 이러한 비례는 창문에서도 잘 드러난다. 창문은 건축물에서 '화룡점정'같다. 아무리 아름다운 건축물이라도 창문이 나있지 않다면 아마 건물로 느껴지지 않을 것이다. 그저 거대한 조각품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원룸에 살고 있는 나야말로 창문의 중요성을 절실하게 느끼고 있다.

지금 살고 있는 원룸에 이사 왔을 때, 나는 과감하게 커튼을 달지 않기로 했다. 지금 살고 있는 원룸은 전에 살던 원룸의 반대 방향인 남쪽으로 창문이 나있어서 햇빛이 너무 잘 들어왔던 것이다. 잠을 좋아하는 나는 커튼을 달면 분명히 항상 치고 살 것이기 때문에 간만에 내리쬐는 햇빛을 즐기고 싶었다(지금은 잠이 쏟아지는 아침마다 커튼을 달지 않은 것을 후회하고 있다). 저자의 말에 의하면 창문은 빛을 디자인한다고 한다.

그런데 가끔 이런 미(美)를 찾아볼 수 없는 건물이 있다. 나는 몇 년 전까지 아파트의 맨 위층인 15층에 살았었다. 안전사고에 대비하여 15층 주민에게만 옥상 열쇠를 줬었는데, 나는 그 열쇠를 이용해서 자주 옥상에 올라가곤 했었다.

처음에 옥상에서 동네를 내려다봤을 때는 아파트 몇 채가 전부였는데, 개발지역으로 선정되고 나서 내가 살던 동네에는 아파트가 점점 들어서기 시작했다. 몇 년 뒤 내려다본 우리 동네는 마치 성냥갑이 가득히 들어찬 것만 같이 삭막해져 있었다. 우리 선조들이 지은 몇 백 년 전 건물은 결코 지금 우리가 짓는 아파트처럼 삭막하지 않다. 단순한 선을 가지고 있지만 그 느낌은 전혀 다르다. 단순한 선으로 중후한 느낌을 풍긴다. 이런 건물이야 말로 저자가 말하는 '차분하게 이야기를 늘어놓는 건물'일 것이다.

모든 것이 재료가 되다

나무를 재료로 한 일본 전통 가옥 지진이 많다는 특성상 나무를 이용해 지은 일본의 전통 가옥
▲ 나무를 재료로 한 일본 전통 가옥 지진이 많다는 특성상 나무를 이용해 지은 일본의 전통 가옥
ⓒ 오진주

관련사진보기

이 모든 것을 느끼게 하는데 가장 중심 역할을 한 것이 바로 건물을 짓는 재료일 것이다.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들이 다 건물을 짓는 재료이다. 돌, 콘크리트, 강철, 나무, 유리……. 이중에서 아마 가장 믿음직한 재료는 '돌'일 것이다. 돌을 쌓는 행위는 인간의 본능인 것 같다. 무엇인가 간절히 빌 때도 돌을 쌓으면서 빌기 때문이다.

이러한 염원이 담겨있는 것일까? 벽돌집의 벽돌도 아주 정교하게 쌓여져 있다. 지진이 적다는 특성상 돌을 많이 이용할 수 있는 우리나라에서는 '이맛돌'도 자주 발견된다. 모든 돌의 정점이 되는 이맛돌은 마치 지구를 들고 있는 슈퍼맨의 어깨처럼 무거워 보인다. 건물의 중심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재료를 찾고 건물을 완성했다. 그렇다면 여기서 건축가의 일은 끝나는 것일까? 건축가의 일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건축가는 건물의 내면까지도 살펴야 된다고 한다. 건물의 내장기관이자 핏줄이라고 할 수 있는 설비들이 드러나지 않게 마감 작업을 함으로써 건물 안을 채우는 것이다.

내가 전에 살던 원룸은 건축가가 잘못 설계를 해서 방 한가운데에 건물의 기둥이 드러나 있었다. (덕분에 방값은 쌌다.) 또한 우리학교 누리관의 5층에 있는 동아리방에도 기둥이 드러나 있다. 그것이 건축가의 의도라면 내가 이해를 하지 못한 것이겠지만, 잘못 설계된 것이라면 그 기둥은 동아리방을 이용하는 사람들의 신경을 거슬리게 하는 물건에 불과하다. 이렇듯 예술작품과 달리 건물에는 사람이 살기 때문에 건축가의 일은 건물을 만든다고 해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즐거운 건물 감상

이렇게 예술만 들어있을 것 같은 건축에는 뿐만 아니라 '사회학'까지도 들어있다. 학교와 공연장, 심지어 화장실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바로 권위적인 건물들이다. 내가 다녔던 학교는 남학생과 여학생이 만나지 못하도록 건물 가운데에 교무실을 배치했으니 '최고의 권위'를 보여준 셈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어쩔 수 없는 현상이기는 하지만) 자본의 여력에 따라 S석과 R석을 부여받는 공연장도 평등함을 추구하는 예술과는 거리가 멀다.

이러한 위계질서는 화장실에서도 찾을 수 있다. 아마 우리나라에서 여대의 건물을 제외한 모든 건물에는 남자 화장실의 개수가 여자 화장실의 개수보다 많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학생 수가 많은 여고가 수학여행을 가던 도중 휴게실에서 쉴 때는 휴게실을 관리하는 아저씨가 남자 화장실까지 여학생들이 쓸 수 있도록 남자 화장실에 들어가는 남자들을 막을 때도 있다. 이렇게 웃긴 에피소드 정도로 치부하고 지나칠 수 있었던 사건에서도 권력이 존재하는 건축물을 발견할 수 있다.

건축가가 미술가와 다른 이유는 건축가는 그 건물이 어디에 세워질지, 안에 누가 살지를 생각하고 건물을 짓기 때문이다. 음악을 듣기 전에 작곡가의 의도를 생각해보는 것처럼, 미술 작품을 보기 전에 작가의 세계관을 생각해보는 것처럼, 건물 안에 들어가기 전에 건축가가 어떤 생각을 갖고 이 건물을 구상하고 표현했을까를 생각해보는 것도 즐거운 '건물 감상'이 될 것 같다.


건축, 음악처럼 듣고 미술처럼 보다 - 인문적 건축이야기

서현 지음, 효형출판(2014)


#건축#예술#서평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