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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식사랑만큼은 곰살맞은 코끼리
 자식사랑만큼은 곰살맞은 코끼리
ⓒ 이종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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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미 치타와 아기 치타
 어미 치타와 아기 치타
ⓒ 이종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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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로부터 조금 떨어진 곳에서는 어미 톰슨가젤이 큰 눈을 껌벅이며 죽어가는 새끼를 지켜보고 있다. 그러다가 조금 후에는 이내 고개를 돌려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풀을 뜯어 먹는다. 어쩌면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 초원에서 가장 연약하고 순한 동물인 톰슨가젤에게 이처럼 빠른 '망각'이 있다는 것은. 이러한 '망각의 치료제'는 신이 톰슨가젤에게 준 가장 큰 선물일지도 모른다. - <아프리카 야생중독> 중에서

몸무게 30㎏도 채 되지 않은 톰슨가젤은 키 작은 풀들을 주로 뜯어먹고 살아가는 연약한 동물이다. 치타의 먹잇감 대부분은 톰슨가젤. 톰슨가젤에게 자신을 주요 먹이로 삼는 치타는 숙명적인 천적인 것이다. 영원히 헤어나지 못할 것 같은 그런.

어미 치타가 오늘은 태어난 지 일주일밖에 안 된 새끼 톰슨가젤을 사냥했다. 하지만 오늘은 먹잇감을 바로 물어 죽이지 않고 뒷다리만 살짝 물어 다치게 한 후 자신의 새끼에게 내어준다. 사냥 교육을 시키는 것이다.

어미 누가 잠이 덜 깬 새끼를 데리고 무리를 따라가는 중에 무리에서 떨어진 새끼 한 마리가 사자와 마주쳤다. 어미 누가 새끼 누를 얼른 등 뒤로 보내고 안간힘을 쓰며 사자와 맞선다. 하지만 이내 사자의 날카로운 이빨에 쓰러진 어미 누는 그 자리에서 숨을 거두었다. 그리고 잠시 뒤, 사자와 어미의 혈투에 놀라 멀리 도망갔던 새끼 누가 어미의 냄새를 찾아 돌아왔다. 죽은 어미에게로 다가가다가 어이없게도 어미를 물었던 암사자에게 목숨을 잃었다.

살아남기 위해 사냥을 배우는 어린 치타들과 어미로부터 살아남는 법을 배우지 못한 누. 세렝게티 초원에서는 어미가 있고 없음이 죽음으로 이어진다. - 책 속에서

이런 부분도 특별하게 와 닿는다. 태어난 지 한 달이 채 안 된 새끼 누는 어미의 냄새를 따라, 어미의 움직임대로 함께 움직인다. 어미의 냄새가 달리면 달리고, 어미의 냄새가 멈추면 그 냄새를 따라서 멈춘다. 이런지라 어미의 죽음은 곧 새끼의 죽음인 것이다.

<아프리카 야생중독>겉그림
 <아프리카 야생중독>겉그림
ⓒ 글로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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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 야생중독>(글로연 펴냄)은 원시 자연과 야생이 고스란히 살아 숨 쉬는 아프리카 세렝게티 초원에서 살아가는 동물들과 대초원이 있는 그 곳 아프리카 사람들의 속살을 풍성한 사진과 글로 엮은 책이다.

이 책에는 이처럼 자식의 죽음도 쉽게 망각하고 마는 톰슨가젤이나 어미의 냄새에 의지하여 살아가는 어린 누의 죽음 등, '어미와 새끼의 숭고하고 숙명적인 끈'을 새삼스럽게 생각하게 하는 이야기들이 유독 많다.

외에도 오랜 시간 자리를 비운 어미 사자의 흔적을 애타게 더듬는 아기 사자들, 거구의 몸으로 자식사랑만큼은 곰살맞은 코끼리, 사자와 맞서 적중률 제로의 발길질을 수없이 해대는 기린, 서로의 무늬를 의지해 살아가는 얼룩말 등의 이야기를 만날 수 있다.

이 책을 만나는 재미는 단연 <동물의 왕국>(KBS1 토, 일 17시 10분)과 같은 다큐멘터리에서나 볼 수 있었던 야생 동물들을, 화면으로 보면서 금방 스치고 말기 때문에 아쉽기도 했던 야생동물들의 다양한 모습을 자세하게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사진은 대략 200여 컷이다.

아기사자의 간지럼에 웃음을 간신히 참는 듯 보이는 어미 사자, 풀을 따라 이동하는 누 떼, 사랑에 목숨 거는 열혈남아 코뿔소, 목숨이 오고가는 좌우 선택을 숨 가쁘게 벌이는 치타와 토끼, 온순하고 난폭한 두 얼굴의 하마, 소시지나무와 노란 꽃과 스스로 크는 나무들, 초원을 태우는 불길과 세렝게티 초원을 깨우는 씁쓸한 욕망의 열기구, 대초원의 석양 등 하나같이 눈길을 오래도록 붙잡는 사진들이다.

다큐 이종렬의 특별한 사랑, 아프리카

어미를 기다리는 아기 사자들
 어미를 기다리는 아기 사자들
ⓒ 이종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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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미 사자와 아기 사자
 어미 사자와 아기 사자
ⓒ 이종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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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러진 나무 등걸의 어미 사자와 아기 사자
 쓰러진 나무 등걸의 어미 사자와 아기 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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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부터 향후 10년 동안 나는 탄자니아의 모든 국립공원  오프로드(Off-road)에 출입을 허가 받았고 다큐멘터리와 사진촬영료도 면제 받았다. 세렝게티를 세계에 알린 고(故) 휴고 반 라윅(Hugo Van Lawick) 이후 탄자니아 역사상 두 번째라고 한다.

하루 촬영료가 100불이 넘고 동물보호 목적으로 아주 극소수에게만 오프로드(Off-road) 허가를 주는 것을 감안하면 정말 어마어마한 혜택이다. 돈의 액수보다 하루 종일 사자를 따라다녀도 하품하는 장면 한 컷 찍기 어려운 그야말로 '현장'에서의 한계를 넘어 더 느긋하게 그들의 움직임을 기다릴 수 있다는 것이, 그래서 더 사자다운, 그래서 더 치타다운 모습들을 담을 수 있다는 점이 나를 설레고 행복하게 한다. - 머리말에서

머리말의 한 부분이다. 좀 더 설명하면, 저자와 같은 특혜를 첫번째로 받은 '휴고 반 라윅(Hugo Van Lawick)은 침팬지 연구로 유명한 '제인 구달'의 남편이다. 그가 죽었으니 현재 저자만이 전 세계를 통틀어 유일한 특혜를 누리고 있는 것이다.

저자 '이종렬'은
MBC 베스트 극장 조연출로 방송연출을 시작, 1996년 MBC 다큐스페셜 80일간의 아프리카 여행 2편을 기획 연출하면서 아프리카와 처음 인연을 맺었다. 김정미의 오지여행 10편, KBS도전지구탐험대 아프리카·남미 4편, SBS 출발모닝와이드 아프리카 25000km 종단 50편, SBS 초특급 일요일만세 잠보아프리카 편 등을 기획 연출했다.

이후 아프리카에 머물면서 아프리카 대초원의 야생을 렌즈에 담기 시작, MBC 스페셜 <야생의 초원 세렝게티>와 <탕가니카의 침팬지들>의 라인프로듀서를 맡았으며, 최근 방영된 MBC 스페셜 <라이언 퀸>을 공동 연출하기도 했다.

사진가로서의 역량과 탄자니아의 야생을 널리 홍보한 점을 인정받아 최근 탄자니아 역사상 2번째로 세렝게티를 비롯한 탄자니아 국립공원을 10년간 무상출입 촬영할 수 있는 권한을 획득하였다. 세렝게티를 세계에 알린 세계적 야생 사진가 고(故) 휴고 반 라윅(Hugo Van Lawick)에 이어 유일한 허가이다. 현재 탄자니아에 살고 있다. - 책에서 정리

저자가 아프리카와 세렝게티 초원을 처음 만난 것은 1996년, TV 프로그램 제작 때문이라고 한다. 횟수로만 장장 15년, <아프리카 야생중독>에는 저자의 아프리카 15년의 여정을 함축한 듯한 사진과 글이 묵묵한 감동으로 펼쳐지고 있다.

청소년기부터 야생동물 다큐 프로그램들은 거의 봤다. 그러니 저자 프로필 속 프로그램들도 낯익다. 이런지라 프로필이 남다르게 읽힌다.

이 책은 2부로 구성됐다. 1부는 세렝게티 초원의 야생동물들이 주인공이고, 2부는 저자가 만난 탄자니아 사람들과 역사다.

2부의 동아프리카 최대 노예시장이었던 작은 어촌 바가요모 역사는 쓰리게, 이방인을 위한 탄자니아 상인들의 뒤죽박죽 계산법은 유쾌하게 읽혔다.

몇 페이지에 걸친 마사이족들의 이야기도, 그들의 건강하고 강렬한 모습도 인상깊다.  늙고 병든 마사이 의사의 한마디는 많은 사람들에게 전하고 싶은 이야기다.

"나는 예전에 마사이들의 병을 고치는 의사였습니다. 어느 날 백인 의사가 찾아와서 자신이 우리를 건강하게 해주겠다며 자기 일을 도와달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과 1년 정도 같이 일했는데, 그가 돌아가고 한 달이 지났을 즈음부터 내 손과 발이 썩어 들어가기 시작했지요. 우리는 오래 전부터 들에서 살며 들에서 약초를 얻어 우리의 병을 고쳐왔습니다. 그리고 병을 고치지 못하면 자연스럽게 죽음을 받아들였지요. 그래서 우리가 고치지 못한 병의 고통이라는 것은 없었어요. 그러나 백인이 주고 간 이 병은 달라요. 목숨은 살려주지만 죽지도 못하는 것이지요. 우리는 바깥세상에 관심이 없어요. 가고도 싶지 않고 또 갈 수도 없으니까요. 우리는 바깥 세상에 아무런 해도 끼치지 않는데 왜 백인들은 우리에게 고통을 주는 거지요?…우리는 우리가 알 수 있는 고통 속에서만 살고 싶습니다."

덧붙이는 글 | 아프리카 야생중독|사진과 글:이종렬|글로연|2010-06-10|값:15,000원



아프리카 야생중독

이종렬 지음, 글로연(2010)


태그:#아프리카, #세렝게티, #탄자니아, #이종렬, #포토 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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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제게 닿아있는 '끈' 덕분에 건강하고 행복할 수 있었습니다. '책동네' 기사를 주로 쓰고 있습니다. 여러 분야의 책을 읽지만, '동·식물 및 자연, 역사' 관련 책들은 특히 더 좋아합니다. 책과 함께 할 수 있는 오늘,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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