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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1>

 

8개월여의 병상생활 끝에 말기 폐암과 임파선 암, 그리고 암세포의 '골반 전이 및 골절'을 모두 이기고 지난 5일 퇴원하여 현재 '가족의 품안'에서 생활하고 계시는 노친에게서 가장 신기하게 느껴지는 것은 '기억력의 재생'이다.

 

얼마 전까지 노친은 기억의 상당 부분이 지워져 있었다. 지난 2월 초 태안의 서해안요양병원에서 처음 집에 다니러 오셨을 때만 해도 아파트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었다. 2006년 초부터 5년째 살고 있는 집이건만, 노친은 당신이 현재의 아파트에서 사셨던 지난 4년 세월을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

 

"여기가 어딘데, 여길루 와?"라는 물음부터 "원제 여기루 이사왔디야?", "새 집 지어 온 거여, 헌집 사 가지구 온 거여?", "살기 편허긴 허겄는디, 얼매나 주고 장만헌 집이랴?" 등등의 질문을 접하며, 지난 4년여 세월이 노친의 기억에서 통째로 지워진 사실에 한숨을 쉬어야 했다. 4년 세월 너머 '샘골연립'에서 살았던 기억은 비교적 온전한 사실에 신기함도 삼키며….

 

그런데 노친의 상태가 점점 좋아지면서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다. 지난 4월 초부터 노친이 보조기구를 잡고 조금씩 걷기 시작하면서, 또 안 들리던 귀가 잘 들려 건너편 병상의 할머니들과도 정상적인 대화가 가능해지면서 기억력의 재생도 실감시켜 주게 된 것이었다.

 

노친은 아파트 당신 방 서랍장의 몇 번째 서랍에 뭐가 있으니 가져오라는 말도 했고, 성상들이 모셔진 작은 장식장 서랍 안에 면봉이 있으니 가져오라는 말도 했다. 그리고 점점 더 기억력이 재생되더니, 노친 특유의 기억력을 온전히 발휘할 수 있게 되었다.

 

나는 노친의 기억력 덕을 보는 경우가 많았다. 내가 까맣게 잊고 있는 일을 노친이 챙겨준 적도 많았고, 어디에 두었는지 모를 내 소소한 물건들을 귀신같이 찾아주는 것은 늘 노친의 몫이었다. 

 

그런 노친의 기억력을 실감하고, 노친 기억력 덕을 보는 예전의 생활로 돌아간 것을  확인하면서 나는 동시에 내게서 일어난 한 가지 신기한 '기억력의 재생'을 경험하게 되었다. 노친 기억력의 재생과 거의 동시에 일어난 일이라서 신기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2>

 

2004년은 천주교 대전교구 태안성당 '본당설정 40주년'이 되는 해였다. 천주교회에서 '40'이라는 수는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태안성당은 40돌을 맞이하여 1년 동안 여러 가지 기념행사를 실시했다. 당시 태안성당 '40주년기념행사준비위원회' 위원장을 맡았던 나는 매우 바쁜 한 해를 살았다.

 

여러 가지 기념행사 중 하나가 '옛날 사진 및 유물전시회'였다. 오래 전부터 모든 신자들에게 공지하여 본당과 관련하는 옛날 사진들과 유물들을 모았다. 선별을 한 다음 사진들은 확대복사 코팅을 하고 유물들은 훼손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일일이 소장자와 관련 설명을 적은 쪽지를 붙였다.

 

전시 기간이 지난 다음 소장자들에게 사진과 유물들을 돌려드리는 일도 모으는 일만큼 힘든 일이었다. 돌려드리는 일을 다 마치지 않은 상태에서 내가 이사를 하게 되었다. 성당은 그때 한창 새 성전 건립공사를 하는 상황이어서 성당에는 마땅한 보관 장소가 없었다. 그래서 내가 집에다 보관을 하고 있었는데, 2006년 연초에 이사를 하게 된 것이었다.

 

이사 후 나는 내가 보관하고 있던 유물들의 존재를 까맣게 잊었다. 사진들 쪽으로는 문제가 없었다. 선별한 사진들을 확대복사 코팅한 다음 원본 사진들과 제외된 사진들을 모두 되돌려 주어서(되돌려주는 시간이야 오래 걸렸지만) 홀가분한 상태였다. 그런데 유물들이 없는 것이 문제였다.

 

이사 후 1년쯤 지난 시점에서 두 분에게서 유물을 돌려받지 못했다는 전화를 받았다. 어디에 두었는지 얼른 생각이 나지 않아서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사할 때 분명 가져왔지 싶은데 정말 기억이 나지 않았다. 하지만 "이사할 때 절대 버리지 않고 가져 왔으니, 집안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한번 찾아보겠다"고 자신 있게 말했다.

 

그것이 있을 만한 곳부터 시작해서 집안 구석구석을 다 찾아보면 그게 나올지도 모른다는 기대감 때문에 그런 말을 한 것이었다. 그런데 그게 쉽게 찾아지지 않았다. 우선 앞 베란다의 화분들과 수석들을 올려놓은 납작한 세 개 궤짝의 서랍 속을 뒤져보았는데 완전히 기대 배반이었다. 앞 베란다의 창고와 뒤 베란다의 창고를 다 뒤졌어도 나오지 않았다.

 

나는 진짜로 당황하기 시작했다. 어쩌면 성당에 두었는지도(누군가에 의해 보관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싶어 성당과 부속 건물의 구석구석을 찾아보기도 했다. 그러나 찾는 물건은 오리무중이었다.

 

그러던 차에 2007년 말 태안 앞 바다 유조선 원유유출 사고를 맞게 되었다. '기름과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기름과의 전쟁 외로는 다른 것에는 신경을 쓸 새가 없었다. 나는 태안성당 총회장 직분을 맞게 되었고, 연일 전국 각지에서 오는 천주교 신자 자원봉사자들을 작업 현장으로 안내하고 뒷바라지를 하는 일에만 몰두했다.

 

그리고 과로로 병을 얻어 병원생활도 했다. 2008년 절반은 기름 냄새 나는 바다와 병원에서 지내고, 또 절반은 내 신앙문집들을 판매하는 일로 타지 성당들을 다니면서 보냈다. 일 년 동안은 거의 본당에 있지 않았다. 그래서 그 유물 문제도 일 년 동안은 완벽하게 잊었다.

 

2009년으로 넘어와서 다시 그 유물 문제 때문에 상심을 안게 되었는데, 이번에는 어머니 병환 덕분(?)에 잠시 그 문제를 비켜놓을 있었다. 노친의 병상을 돌보느라 주일 교중미사와 평일미사에 참례하지를 못하니 유물 임자들과의 상면도 자연 피할 수가 있었다.

 

하지만 얼굴을 보지 않는다고 해서 그 문제가 해소되는 건 아니었다. 유물 임자들은 성당에서 나를 잘 볼 수가 없으니 오래 기다릴 수가 없다는 듯 통신수단을 이용하기 시작했다. 나는 "여러 가지 바쁜 사정 때문에 아직 찾아볼 만한 곳을 다 찾아보지 못했다"는 변명도 했고, "내가 그것을 절대로 버리지는 않았으니, 어딘가에 분명히 있을 거라"는 말과 함께 꼭 찾아드리겠다는 약속을 거듭 하곤 했다.

 

<3>

 

내게는 믿는 구석이 하나 있었다. 아파트 지하 창고였다. 아파트 지하에는 일정한 넓이의 창고들이 많았다. 거의 빈 창고들이었다. 일찍이 지하 창고들을 보아둔 덕에 나는 딸아이가 고교를 졸업하던 해 천안의 원룸에서 사용하던 물품들을 모두 옮겨와서 아파트 지하창고 안에 넣어둘 수 있었다. 집 안의 베란다 공간을 차지하고 있던 필요 없거나 쓰지 않는 물건들도 옮겨 놓았다.

 

나는 아파트 지하창고를 기억해내고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그 문제의 유물들을 아파트 지하창고에다 보관해 놓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나는 묘하게도 아파트 지하창고를 떠올린 후 즉시로 찾아보는 일을 하지 않았다. 왠지 그 일을 미루고 아끼면서 여유를 즐기고 싶었다. 유물 임자들에게 전화로 "그 유물이 있을 만한 곳을 알았습니다. 불원간 그곳을 찾아볼 테니까 조금만 더 기다려 주십시오"라고 호기를 부리기도 했다.

 

어느 날 아파트 미화원 아저씨께 부탁하여 지하로 들어가는 문을 열고 드디어 그 창고 안으로 몸을 넣는 순간 나는 크고 무거운 긴장감을 안았다. 전등을 켜고, 물품들을 덮고 있는 비닐을 젖히고, 세탁기 옆의 큰 함지박 안에 있는 종이상자를 들어 올리고는 아가리를 봉한 테이프를 뜯었다. 내가 마음속으로 지목하고 있던 종이상자였다.

 

하지만 웬걸, 그 상자 안에 들어 있는 것은 문제의 유물들이 아니었다. 내가 병상생활 후 한동안 집에서 사용하다가 고장이 나서 훗날 수리를 생각하고 보관해 놓은 '족욕기'였다. 나는 큰 실망과 낭패감을 안지 않을 수 없었다.

 

빈손으로 집으로 올라온 나는 아내에게 "이제 끝났어. 절망이야. 더 이상 찾아볼 것이 없어. 이제 어쩌지?" 절망적인 소리로 중얼거렸다. 잔뜩 기대했던 아내도 한숨을 쉬었다. "그 유물 임자들에게 사정을 말하고 용서를 빌어요"라는 말을 했다. "차라리 그렇게 매듭을 짓는 게 마음 편하겠아요"라는 말도 덧붙였다.

 

나는 일단 고개를 끄덕였지만 그것 역시 쉬운 일이 아니었다. 속히 실행을 못하고 미적거리며 하루하루를 보냈다. 그러나가 노친의 퇴원이 결정되어, 노친을 퇴원시켜 드린 이후에 그 일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서울성모병원 호스피스 병동에서 한 달, 태안의 서해안요양병원에서 일곱 달을 지내고 여덟 달만에 퇴원하신 노친은 가족의 품안에서 나날이 상태가 더 좋아지시는 모습을 보였다. 무엇보다도 신기하고 특이한 것을 지워졌던 기억력의 재생이었다. 내가 잊은 것들도 기억하여 챙겨주고 찾아주시는 예전의 역할이 온전히 회복되는 것도 분명했다.

 

어느 날 오후 아내를 퇴근시켜 주면서 나는 어머니의 기억력 재생을 입에 올렸다. 우리 부부는 노친의 그런 현상을 신기해했다. '하느님의 특별하신 선물'이라는 말이 아내의 입에서 나왔다. 다음 순간 나는 뚝 입을 다물고 길가에 차를 세웠다. 무엇인가가 머릿속에서 확 불이 켜지듯 떠오른 때문이었다.                             

 

"왜 그래요?"

"가만. 한 군데 남았어, 찾아볼 곳이."

"무슨 말이에요?"

"우리가 진흥아파트로 이사헐 때 짐 일부를 샘골 동생 집에다 옮겨놓지 않았었나?"

"글쎄요…."

"그 문제의 유물들이 어쩌면 동생 집에 있을지두 물러. 거길 한번 가봐야겠어."

"나한테는 확실한 기억이 없어요."

"여하튼…. 상자 하나를 동생 집에다 옮긴 것 같은 생각이 들어."

 

그리고 나는 흥분을 맛보기 시작했다. 가슴이 설레고, 흥분 상태가 계속되었다. 색다른 긴장감이었다. 그러나 나는 이번에도 동생 집에 가서 찾아보는 일을 즉각 실행하지 않았다. 여유를 즐기는 기분이기도 했고, 만약 동생 집에도 그게 없으면 어쩌나 하는 불안과 두려움에 지레 지질려서 발이 쉽게 떼어지지 않는 상태이기도 했다.

 

마침내 나는 동생 집을 가게 되었다. 5년 전 제수씨가 세상을 뜬 후로는 잘 가지지 않는 집이었다. 가끔 어머니나 마누라와 함께 가게 될 경우에도 집으로는 들어가지 않고 밖에서 서성거리다가 오곤 한 적이 많았다. 그러나 이번에는 과감하게 집으로 들어가서 세 개의 방들을 들여다보았다.

 

제수씨가 없는 빈집, 거의 매일 낮에는 온종일 비어 있는 집, 동생의 홀아비 체취가 배어 있는 집, 썰렁하고 스산한 기운을 온몸 가득 체감하며 마지막으로 동생이 창고처럼 사용하는 작은 방 안으로 들어가 보았다.  한쪽 구석에 종이상자 하나가 놓여 있었다. 나는 가슴 벅찬 긴장감을 삼키며, 종이상자를 묶고 있는 투명 테이프를 뜯었다.

 

그 상자 안에 들어 있는 것은 바로 그 문제의 유물들이었다. 내가 그토록 찾고자 애를 썼고, 찾지를 못해 큰 상심을 안고 전전긍긍하기도 해야 했던 그 물건들이었다. 드디어 그것을 대하는 순간 나는 큰 감격을 맛보면서도 한편으로는 실소를 머금어야 했다.

 

 <4>

 

종이상자 안에는 그 두 분의 유물 외로도 여러 사람의 여러 가지 유물들이 그득 들어 있었다. 그 두 분의 유물은 태안성당 초창기 시절 대전교구 제2대 교구장 황민성 베드로 주교님에게서 받은 공로패와 조선 대원군 시대 박해로 인해 형성된 교우촌인 안면도 누동(다락골)의 한 우물 속에서 건져 올린 것이라는 작은 십자가상이었다.

 

나는 그 종이상자를 동생 집에 잘 옮겨놓았으면서도 오랜 시간 그것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는 사실이 어처구니없으면서도 신기하기도 했다. 내게도 이런 수가 있구나. 어쩌면 그렇게 완벽하게 잊을 수가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며 이상한 두려움도 한 가슴 안아야 했다.

 

나이 먹어가면서 잊고 챙기지 못하는 일이 점점 더 많아진다. 이제는 건망증이라는 말과 실체 앞에서 주눅이 들고, 자신감을 갖지 못한다. 너무 잦은 건망증 때문에 한숨을 쉬고 비애에 젖기도 한다.

 

하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나 자신을 위안할 수 있는 일이 한 가지 있다. 비록 잊어버리고 챙기지 못하는 일이야 많고 빈번하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면 아직 한 번도 남과의 약속을 어기거나 손해를 끼친 일은 없다는 사실이다. 내가 한 말이나 '약속'을 잊은 적은 없다. 내가 한 말이나 행동에 대해 부정을 하거나 변명을 한 적도 없다.

 

내가 공언을 해놓고도, 또 무슨 행위를 해놓고도 훗날에 가서 "그런 적 없다. 기억이 없다. 기억나지 않는다" 따위의 말을 한 적이 한 번도 없는 것이다. 무슨 공언을 하고 또 뒤집고 하는 것이 문제가 될 수 있는 공인의 위치에 있지는 않았지만….

 

"기억에 없다"는 말을 써먹은 적들은 있다. 가족들을 웃기기 위해서…. "기억에 없다"는 말로 능청을 떨어 가족들을 배꼽을 잡고 웃게 만든 일은 몇 번 있는 것이다.

 

비록 점점 더 심해지는 건망증 속에서 살지언정 내가 한 말이나 약속은 절대 잊지 않는 것, 내가 한 말이나 어떤 행동에 대해 훗날 그것을 부정하거나 뒤집는 짓은 한 번도 없었고 앞으로도 절대로 없으리라는 확신과 자신감! 그것으로 살아왔고 살아가고 있다고 자부한다.


#기억력 재생#태안성당#40주년 행사#유물전시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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