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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예가 소엽신정균 그녀는 언제나 지필묵을 소지하고 다닙니다. 그리고 그녀의 재능을 희사할 곳이 생기면 어느곳에서나 기꺼이 그것이 담긴 가방을 엽니다.
▲ 서예가 소엽신정균 그녀는 언제나 지필묵을 소지하고 다닙니다. 그리고 그녀의 재능을 희사할 곳이 생기면 어느곳에서나 기꺼이 그것이 담긴 가방을 엽니다.
ⓒ 이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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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직접 손으로 쓴 '손글씨'가 관심을 끌고 있습니다. 연애편지조차도 컴퓨터로 써서 이메일로 주고받는 광속의 세태에 맞선 현상일 것입니다. 육필(肉筆)에는 찍어낸 자판글씨에는 없는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습니다. 아름다움외에도 성격과 가슴속의 온도까지도 유추할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서체에 대한 연구가 기계화를 위한 것이었다면 이제는 탈기계화에 대한 욕구가 생긴 것입니다.

그 육필을 예술적으로 승화시킨 것이 서예입니다. 컬리그래피(calligraphy)가 문자를 심미적으로 접근한 표현이라는 점에서는 서예로 번역되지만 정확히는 지금의 '손글씨'정도로 대응될 수 있을 것입니다.

서예는 컬리그래피로 번역될 수 없는 요인이 있습니다. 지필묵(紙筆墨) 그리고 사람이 빚어내는 그 오묘한 조화 때문입니다. 화선지라는 공간에 펼쳐지는 비례와 균형은 또 다른 우주라 할 만합니다. 그곳에는 굵고 가늠, 짙고 옅음, 끊어짐과 번짐, 길고 짧음, 빠르고 느림, 강하고 약함, 무겁고 가벼움, 엄격함과 부드러움, 채움과 비움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서예는 컬리크래피가 아니라 그저 서예일 뿐입니다.

소엽 신정균이 이 또 다른 우주에 빠진 것은 30여 년 전입니다. 일찍 결혼하여 주부로서의 의무에 충실한 후, 자신의 정체성을 더듬는 여행의 일환이었습니다.

그 여행에 나침판이 되어줄 스승이 필요했습니다. 이 시대에 제일가는 대가들을 찾아 나섰습니다. 이른 출발이 아니었으므로 에둘러가지 않기 위해서였습니다. 그 노정에 만난 분들이 일중 김충현(一中 金忠顯), 초정 권창윤(艸丁 權昌倫), 한별 신두영(申斗榮) 등 서예계의 거목들입니다. 그녀는 이 대가들의 충실한 제자로서 20년을 보냈습니다. 한문과 한글, 해서와 예서 등 서예의 근본과 서법을 두루 익혔습니다. 그 20년은 다른 서예가들과 걸어온 길과 다름없었습니다. 국전에도 응모하고 국전초대작가가 되기 위해 점수도 모으는, 서예계의 이너써클(Inner Circle)에서 안주하고 행세하는 권력을 지향했던 거지요.

그녀가 아웃사이더의 길을 가게 된 계기는 스승의 한 마디 때문이었습니다. 국전에서 고배를 마신 때였습니다. 

"소엽의 글씨를 누가 심사할 수 있겠어? 이미 그 경지를 넘었는데……."

스승의 그 한 마디는 그녀에게 위로가 아니라 깨달음이었습니다. 당나라 유학길에 비를 피하기 위해서 고분(古墳)을 토감(土龕)으로 알고 지냈던 것을 계기로 깨달음을 얻은 원효가 발길을 돌린 것처럼 그녀는 점수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그동안의 구니(拘泥)에서 벗어나자 한없이 편한 자유가 찾아왔습니다. 우선은 그녀의 욕망이었던 산천을 답사하는 여행을 떠났습니다. 4륜구동 자동차의 거리계가 40만km에 닿도록 우리의 산과 들을 누볐습니다. 골짜기마다 스승(到處有師 도처유사)이 있었고, 들판마다 친구들(到處有朋 도처유붕)이 있었으며, 물길마다 즐거움(到處有樂 도처유락)이 있었습니다.

그녀의 글씨체도 자연스럽게 구속에서 놓일 수 있었습니다. 마음 가는 대로 자유롭게 붓이 움직였습니다. 그것은 정의될 수 없는 서체였습니다. 먹과 화선지뿐만 아니라 아크릴에 캔버스천, 페이트와 송판이 그녀의 소재가 되기도 합니다. 디자이너는 디자인에 가깝다 했고, 화가는 회화에 가깝다고했습니다. '소엽체'가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림과 설치 등 장르도 넘나들었습니다.

그녀는 30년 노력의 결과인 재간(才幹)을 아끼지 않습니다. 마음씨 고운 포장마차(친구네)의 메뉴도 쓰고, 유명서원(자운서원)의 유적지 현판도 썼습니다. 동네초입의 마을이름(헤마루촌)도 쓰고 유명도시 호반공원의 시비(일산호수공원)도 썼습니다. 회사의 로고와 상표들(송학식품)은 물론 시청의 이름과 시정지표(파주시청)를 쓰기도 했습니다. 가정의 화목을 위해 가훈을 쓴 것은 부지기수이며 한 종합병원의 정신과 병동에서 치료받고 있는 환자들의 정신적 이완을 위해 서예지도봉사를 한 햇수가 17년입니다.

그녀에게 글씨를 쓰는 일은 스스로의 명예를 확보하는 일이 아니라 나눔을 실천하는 일인 것입니다. 붓글씨를 통해 도달하고자했던 궁극의 세계는 서법을 충실히 계승한 서단의 상찬(賞讚)보다 자유였으므로 아웃사이더의 길은 사실 그녀에게 옆길이 아니라 정로(正路)였던 것이지요.

그녀는 경력을 화려하게 덧칠하는 것이 아니라 남과의 소통을 통해 기쁨을 더 늘리고 싶어 합니다. 그러므로 예술은 그녀를 기쁘게 하는 진정한 시종입니다.

그녀는 이 서예를 통해 비움의 넉넉함을 깨달았습니다. 일상생활에 있어서도 서예를 통해 깨달은 그 행복의 비밀을 실천하고 있습니다. 그녀는 용도가 같은 것을 두개 집에 두는 법이 없습니다. 그 기능을 대처할 수 있는 하나가 생기면 다른 하나는 남에게 주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채우는 작업이 아니라 덜어내는 작업으로 현재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비워낼수록 채워지는 것도 있습니다. 그것은 '정'입니다. 가슴속 진심을 퍼내 외로움을 타는 전국의 모든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니 그녀 주위에는 사람으로 넘칩니다. 그녀의 붓글씨가 사람의 마음과 마음을 이어주는 가교가 된 것입니다.

논어에 '의어인 유우예(依於仁 遊于藝)라고 했습니다. '어짊에 기대어 예술에서 노닐다'는 이 말은 바로 그녀를 두고 하는 말인 듯합니다. 이런 나눔과 소통은 이제 육순을 넘긴, 4살, 2살의 두 손자를 둔 할머니가 여전히 팔팔한 청년으로 사는 이유입니다.

서예가. 그녀에게 당신이 상상한 서예가의 엄격함과 변통 없는 위엄을 기대했다면 그것은 오산입니다. 그녀의 글씨와 조형(造形)에는 30대 전성기를 누리고 있는 여배우의 시크(chic)함이 있습니다. 서예가로 그녀의 영역을 한정하기에는 무대가 좁습니다. 그녀는 그냥 아티스트입니다. 시크한 아티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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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안수

덧붙이는 글 | Vergil America와 모티프원의 홈페이지에도 함께 실립니다.



#소엽신정균#서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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