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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용만
 박용만
ⓒ 독립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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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만은 이승만, 안창호와 함께 미주 3대 독립운동가의 한 사람이었다. 1912년 정치학 전공으로 네브래스카주립대학을 졸업했고, 샌프란시스코의 '신한민보'와 하와이의 '국민보' 주필을 지냈다.

그의 독립운동 노선은 '무력투쟁론'이었으며, 네브래스카 주와 하와이에서 군사학교를 창설해 군사훈련을 실시했다. 1920년 북경으로 건너가 독립운동을 계속하던 중 변절자라는 누명을 쓰고 1928년 동족의 손에 암살됐다. 올해는 국치(國恥) 100년으로 잉걸불과 같은 그의 삶과 투쟁을 재조명하고자 평전 <박용만과 그의 시대>를 엮는다... 기자 말

방사겸은 16세에 장가를 들었는데 마누라에게 정이 가지 않아 안채 방에서 자지 않고 사랑방에 나가 잠을 잤다. 아버지와 형수들은 처를 두고 사랑방 잠을 자는 것은 도리가 아니라고 타일렀다. 그러나 마음이 원치 않는 것은 황제자리라도 사양하는지라 사겸은 따르지 않았다. 자연 집에 있기 싫은 생각도 일어났다. 외국으로 달아나버릴 마음이 종종 생겼다.

청일전쟁이 일어나자 평양은 전쟁터였다. 전쟁이 끝나고 1년 후 사겸은 평양으로 돌아갔다. 열다섯의 나이였고 큰형이 하는 객주사업에서 금전출납을 맡아 보았다.  

 개화기의 평양 저자거리
 개화기의 평양 저자거리
ⓒ 저자미상. 저작권 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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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월 초하루 설날에 세배를 다니다가 어느 전방에서 벌어지는 투전판에 껴들었다. 판이 커지자 연홍이라는 기생이 사는 집으로 자리를 옮겼다. 두 주일 동안 투전을 하다 보니 한 3천 냥을 잃고 말았다.

그 사이 어여쁜 연홍이와 친절한 사이가 돼 시간만 있으면 찾아갔다. 하루는 만나러가니 연홍이가 서울로 갔다는 것이다.

마음이 더 들떠서 집에 있고 싶지도 않고 앞집에 사는 조지수를 꾀어 미주로 달아나자고 했다. 그는 노비를 마련할 수 없다 한다. 사겸은 노비일랑 걱정하지 말라고 안심시켰다. 둘이서 약조가 돼 사겸은 거래처로부터 수금한 돈으로 인천 가는 배표를 두 장 샀다.

대동강의 조포라는 포구에까지 나갔는데 큰 형님이 보낸 사람들이 들이닥쳤다. 그 후 2년 동안은 꼼짝없이 객주에 묶여 있어야 했다. 조지수는 그 후 별로 접촉이 없었다. 한 5년 쯤 후 뜻밖에 콜로라도 주의 덴버 시에서 다시 만나게 될 줄이야.

하루는 매부 되는 차종호를 만나서 미국으로 갈 상의를 했다. 그동안 모아둔 5천 냥을 노자로 두 사람은 대동강가 만경대에서 화륜선을 탔다. 인천에 내려 하릴없이 한 반 년을 지내는데 하루는 매부가 어디 나갔다 오더니 지금 인천항에 개발회사가 설치됐다는 것이다.

개발회사는 하와이 군도에 동양인 이민을 주선하는 회사란다. 미국사람이 주관하는 밑에 일인들이 많이 사무를 본다고 한다. 두 사람은 득달같이 이민신청을 하고 눈 검사를 받았다.

매형은 문제가 없었으나 사겸은 눈이 나빴다. 여러 날 치료를 받고서야 간신히 일본 고베로 가는 배를 탈 수 있었다. 고베에서는 눈 검사가 더 철저했다. 매부는 70~80명의 동포들과 함께 먼저 떠났다. 미국은 눈병이 있는 사람은 입국을 시키지 않았다. 한 달 동안 일본 의사에게 눈병을 치료받은 다음 50~60 명과 함께 하와이를 향해 떠났다.

그 배에는 나이가 26세인 이노익이라는 사람이 타고 있었다. 통역이었는데 겨우 알파벳이나 깨우친 듯싶었다. 이노익은 그 후 본토로 가기 위해 밴쿠버 항을 거칠 때 세관 구치소에서 만났다. 나중 네브래스카 주 링컨 시에서 또 만났으니 꽤 질긴 인연이 아닌가.

맨 처음 하와이 섬 길노이라는 농장으로 일자리가 돼 찾아갔다. 일은 험하고 고됐다. 한국의 수숫대처럼 키 큰 사탕수수들을 꺾어서 눕히는 일이었다. 비를 맞으면서 일을 하면 신발에 온통 진흙이 달라붙었다. 그 무게가 수십 근이 되니 발을 옮겨 놓기가 힘들었다. 사겸은 반나절만 일하고 숙소로 돌아오고 말았다. 당장 하와이 섬을 떠나 오하우 섬에 있는 호놀룰루로 가는 배를 탔다. 호놀룰루에서 사겸은 신민회관을 찾아갔다.

마침 신민회는 회의를 하고 있는 중이어서 의사진행을 구경하게 됐다. 회장이 말하기를 장차 독립하게 되면 누구누구는 대통령이 되고 누구누구는 총리, 외무, 군부, 통상, 공부 대신이 된다고 했다. 그러자 회원 중 한 사람이 벌떡 일어나 이것은 역적모의를 하는 것이라고 핏대를 올리며 회장을 공박했다.

사겸은 일찍이 사회에서 단련 받은 바도 없고 교회에 다녀보지 못하다가 회의에서 변론하는 것을 보니 여간 흥미롭지 않았다. 신민회에서 수소문해보니 매부께선 마우이 섬에 있다고 한다. 매부를 찾아가 그의 사탕수수 농장에서 하루 일해 봤는데 힘이 들어 도저히 할 수 없었다. 그런데도 모두들 루나(십장)가 휘두르는 우레바(채찍)에 마치 노예들처럼 찍 소리도 못하고 있었다.

통역의 월급은 25원, 노동자의 월급은 15원. 월급이 너무 적어 먹고, 입고, 용돈을 쓰면 부족해서 어떤 사람은 간장국에 밀떡제비만 해먹어 얼굴이 퉁퉁 부었다. 그런 사람들의 별명은 밀가루 부대였다. 또한 사탕수수 농장주들은 농장 내에 잡화점을 차려 놓고 일상용품을 사가게 함으로써 이중으로 잇속을 채우고 있었다.

그런 비참한 현실을 보게 되니 미국 본토로 건너가 공부를 해야겠다는 결심이 저절로 굳어졌다. 하와이에서 5-6개월 지내는 동안 노동은 두어 주일 하고 이럭저럭 친구에게서 얻어먹고 지내다가 본토로 건너온 게 1904년 여름이었다.

본토로 일찍 떠나게 된 건 돈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에와 농장에 있는 여러 친구들이 본토로 공부하러 간다고 하자 어떤 이는 양복을 사주고 어떤 이는 구두와 갓을 사주고 어떤 이는 돈을 50-60원씩 줘서 배표도 살 수 있었다.

덧붙이는 글 | 필자 이상묵은 1963년 서울공대 기계과를 졸업했고 1969년 이래 캐나다 토론토에서 거주하고 있다. 1988년 '문학과 비평' 가을호에 시인으로 데뷔한 후 모국의 유수한 문학지에 시들이 게재됐다. 시집으로 '링컨 生家에서'와 '백두산 들쭉밭에서' 및 기타 저서가 있고 토론토 한국일보의 고정칼럼니스트로 활동하고 있다.



-참고문헌-

'독립지사 우성 박용만 선생' 다음 카페(후손이 꾸민 명작 카페)

방선주 저 '재미한인의 독립운동'

안형주 저 '박용만과 한인소년병학교'

김현구 저 'The Writings of Henry Cu Kim'

신한국보, 국민보, 공립신보, 신한민보, 단산시보 등 1백 년 전 고신문들.

독립기념관, 국가보훈처 등 국가기관에서 제공하는 각 종 자료들.

독립운동가 열전(한국일보사) 등등.



#박용만?평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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