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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브로브니크 첫 인상

 고색창연한 건물과 바다, 섬이 잘 어울리는 두브로브니크
 고색창연한 건물과 바다, 섬이 잘 어울리는 두브로브니크
ⓒ 이상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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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발칸 여행의 하이라이트가 어딜까? 다소 주관적이기는 하지만 나는 두브로브니크라고 말하겠다. 그것은 이 도시의 역사와 자연, 문화와 예술 그리고 인물이 가장 두드러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도시가 추구했던 자유(Libertas)와 조화(Harmonia) 정신이 정말 숭고하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사적인 것을 잊고, 공적인 일에 헌신'할 것을 다짐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두브로브니크는 아드리아해의 진주다.

발칸의 진주를 찾아가는 길은 역시 프란요 투즈만 다리를 건너며 시작된다. 다리를 건너면 오른쪽으로 그루즈항(Port Gruž)이 길게 펼쳐진다. 이 그루즈항의 동북쪽 지역이 그루즈고, 서남쪽 지역이 라파드(Lapad)다. 우리는 그루즈 외곽으로 난 길(Jadranska Cesta)을 따라 필레(Pile) 지역으로 간다. 필레 지역에 두브로브니크 구시가지가 있기 때문이다. 두브로브니크 관광의 핵심은 2㎞나 되는 성곽으로 둘러싸인 구시가지다.

 성곽, 바다, 건물이 어우러진 두브로브니크
 성곽, 바다, 건물이 어우러진 두브로브니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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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브로브니크 성곽은 바닷가에 있다. 그러므로 시 외곽도로에서 바다 쪽으로 내려가야 한다. 좁은 길을 따라 두 개의 외성문을 지나니, 구도심을 이루는 내성의 바깥 필레 광장에 닿게 된다. 이곳에는 버스와 택시 등이 정차하는 곳으로 비교적 공간이 넓다. 동쪽으로는 성곽이 보이고, 남쪽으로는 항구와 바다가 보인다.

여기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이 아멜링(Amerling)의 분수다. 아멜링은 이 분수의 기증자 이름이고, 이 작품은 1900년 조각가 이반 렌디치에 의해 만들어졌다. 이 작품에서 스토이나(Stojna)가 목신인 사티로스로부터 양을 빼앗으려 하고 있다. 조각 아래로 물고기 입에서는 물이 뿜어져 나온다. 그 물은 조각 아래 수조로 흘러든다.

 필레 광장의 아멜링 분수
 필레 광장의 아멜링 분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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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브로브니크 구시가지에는 물이 부족하다. 그래서 1436년부터 오노프리오가 20㎞ 떨어진 곳으로부터 물을 끌어와 분수를 통해 공급했다고 한다. 그것이 필레문을 들어서면 오른쪽에 보이는 오노프리오 분수다. 이처럼 두브로브니크는 얼리 어답터(Early Adopter)였다.

근대적인 법과 제도를 받아들여 1272년부터 공화국을 운영했고, 1301년에 벌써 공적인 의료서비스를 시작했다. 1317년에는 약국이 처음 생겼고, 1377년에 전염병을 치료하는 병원이 생기기도 했다. 1418년에 이미 노예무역을 폐지했고, 1432년에는 고아원이 문을 열었다.      

스트라둔 거리의 이쪽과 저쪽에 있는 건축물

필레 광장에서부터 우리는 현지 가이드 마리아의 안내를 받는다. 다리를 건너자 필레문이 나타난다. 문 위에는 두브로브니크의 수호신인 성인 블라호(Vlaho)가 성을 지켜주고 있다. 블라호 성인은 10세기에 두브로브니크의 수호성인이 되었다. 전설에 따르면 972년 네레트바 계곡을 점령한 베네치아 군대가 두브로브니크를 정복하기 위해 그루즈와 로크룸에 닻을 내렸다. 성 스테판 성당의 스토이코 신부가 도시를 구원해 달라고 기도를 했고, 그때 블라호 성인이 무리를 이끌고 나타나 베네치아 군대의 전략을 알려주어 그들을 격퇴할 수 있었다고 한다.

 필레 게이트의 블라호 성인상
 필레 게이트의 블라호 성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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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부터 두브로브니크 사람들은 블라호를 자신들의 수호신으로 받들게 되었다. 그 후 그들은 2월 3일을 블라호 성인의 날로 정해 축제를 열고 있다. 그러므로 축제의 역사는 천 년이 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축제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이 1190년에 만들어진 양피지 문서에 남아 있다. 그리고 두브로브니크 사람들은 기도를 할 때 성부와 성자와 성령, 성모 마리아 다음으로 성인 블라호를 연호한다.

성안으로 들어가니 문 위에 7월 10일부터 8월 25일까지 여름축제를 알리는 깃발이 걸려 있다. 그런데 그곳에 자유(Libertas)라는 글자가 크고 선명하게 적혀 있다. 그것은 축제의 시작 때 이반 군둘리치(1589-1638)에 의해 쓰여지고 야콥 고토바치에 의해 작곡된 자유 찬가가 불려지기 때문이다. 이 시에서 군둘리치는 '이 세상의 모든 금을 다 준다 해도 자유와 바꾸지 않을' 것이라고 노래한다. 자유는 라구사 공화국(1358-1808)의 문장에도 새겨져 있다.

 오노프리오 분수
 오노프리오 분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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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문 오른쪽으로는 오노프리오 분수가 나온다. 사람들은 이곳에서 손도 씻고 물도 마신다. 문 앞으로는 스트라둔 거리가 종탑까지 똑바로 이어진다. 대리석이 깔린 스트라둔 거리는 성곽 안의 구도심을 남북으로 나눈다. 성문 왼쪽으로는 성 사비어 교회와 프란시스코 수도원이 보인다. 성 사비어 교회는 르네상스 때인 1520년부터 1528년 사이에 지어졌다. 르네상스 양식을 토대로 일부 고딕 양식을 가미했다. 이 교회는 1667년의 지진에도 훼손되지 않아 오리지널 르네상스 양식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프란시스코 수도원은 그 역사가 1235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전설에 따르면 아시시 출신의 프란시스코(1181-1226)가 두브로부니크에 머물며 이 지역 출신의 젊은이를 죽음으로부터 구해줬다고 한다. 그 때문에 시 외곽에 처음 수도원이 세워졌고, 1317년 현재의 자리에 재건되기 시작했다. 교회, 정원, 도서관, 박물관을 갖춘 복합 수도원 시설이 완성되는 데는 거의 1세기가 걸렸다. 건물의 양식은 로마네스크와 고딕을 결합한 형태로 지어졌다.

 프란시스코 수도원
 프란시스코 수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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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수도원 역시 1667년의 지진으로 피해를 입었다. 특히 교회가 완전히 파괴되었고, 후에 바로크 양식으로 다시 지어졌다. 이에 비해 수도원 안에 있는 정원과 약국, 도서관, 박물관 등은 과거의 모습을 상당 부분 간직하고 있다. 1317년부터 존재했던 약국은 현재도 운영되고 있으며, 도서관에는 7만 점의 필사본과 인쇄본이 보관되어 있다. 필사본 중에는 11세기 양피지 문서가 가장 오래되었다. 그리고 가치로 본다면 만 삼천 점에 달하는 음악문고가 가장 중요하다. 박물관은 제2차 세계대전 후 다시 문을 열었다.

나는 프란시스코 수도원 교회만 둘러보았다. 교회의 정문 위에는 마리아와 죽은 예수를 안고 있는 피에타 상이 조각되어 있다. 이 조각은 15세기 말 페트로비치 형제에 의해 만들어진 것으로, 지진을 견디고 살아남았다. 교회 안으로 들어가 보니 내부는 완전히 바로크 양식이다. 대리석 기둥에 화려한 장식, 바로크 양식의 종교화가 눈에 들어온다. 이곳에는 또한 크로아티아 문학의 시원으로 여겨지는 이반 군둘리치가 묻혀 있다. 

 스트라둔 거리
 스트라둔 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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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2m에 이르는 스트라둔 거리에는 대리석이 깔려 있다. 이 길은 원래 두브로브니크 구도심을 육지와 섬으로 나누는 수로였다고 한다. 11-12세기 경 이 수로를 자갈로 메우고 길을 냈으며, 1667년 지진 후 현재의 모습으로 재건되었다, 그리고 이곳에 대리석이 깔린 것은 1901년이라고 한다. 스트라둔 거리는 이곳 주민과 관광객들이 하도 많이 밟고 다녀 반질반질하다. 그래서 시인 루코 팔리에타크는 '이 세상에서 발자국 소리가 들리지 않고 보여지는 단 하나의 거리'라고 묘사했다.

올란도 광장에서 대성당에 이르는 행정의 중심지

스트라둔 거리의 동쪽 끝에는 올란도 광장과 종탑이 있다. 이 중 종탑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1444년 동쪽 성문 옆에 세워진 종탑에 그리니스라는 이름의 종이 걸리게 되었다. 이 종탑은 1667년 지진으로 일부가 훼손되었고, 붕괴 위험 때문에 1929년 현재의 모습으로 재건되었다. 그때 그리니스 종도 복제품으로 대체되었다. 원래의 그리니스 종은 현재 스폰자 궁의 중앙 홀에 보존·전시되고 있다.

 올란도 석주와 성 블라호 교회
 올란도 석주와 성 블라호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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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란도 광장에는 올란도(Orlando) 석주가 있다. 석주에 새겨진 인물은 8세기에 살았던 젊은 기사 롤랑(Roland)이다. 전설적인 기사 롤랑은 샤르마뉴 대제 휘하의 군인으로 에스파냐를 정벌하고 돌아오는 길에 피레네 산맥에서 죽었다. 그의 무용담은 영웅서사시 <롤랑의 노래>에 잘 나타나 있다. 그의 이야기가 15세기 이곳 두브로브니크에 전해졌고, 그의 독립과 자유정신이 평가되어 1418년에 롤랑상이 세워지게 되었다. 롤랑의 이탈리아식 표기가 올란도다.

그는 왼손에 방패를 들고 오른손에는 칼을 들고 있다. 그리고 석주 위에는 자유를 상징하는 축제 깃발이 걸려 있다. 올란도 석주는 두브로브니크 여름 축제의 시발점으로, 1950년 7월 10일부터 매년 이곳에서 축제가 시작되고 있다. 올란도 석주 뒤에는 두브로브니크의 수호성인 블라호를 주보성인으로 모신 성 블라호 교회가 있다. 이 교회는 14세기에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처음 지어졌다. 1667년의 대지진 때도 피해를 입지 않았으나, 1706년 화재로 전소되었다. 1707년부터 재건축이 이루어졌고, 1715년 바로크 양식으로 재건되었다. 교회 지붕 위에는 역시 성인 블라호의 조각상이 세워져 있다.

 종탑, 오른쪽으로 시청의 일부가 보인다.
 종탑, 오른쪽으로 시청의 일부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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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블라호 교회의 동쪽에는 구 시청이 있다. 구 시청은 종탑에서부터 총독 궁에 이르는 복합건물의 한 가운데 있다. 14세기에 처음 지어졌고, 1816년에 불탄 후 1882년 현재의 모습으로 지어졌다. 건물 앞에는 작은 오노프리오 분수가 있고, 현재는 시의회 건물로 사용된다. 건물의 일부는 시민들을 위해 카페와 극장으로 사용되고 있다.

총독 궁은 공작 궁이라고도 부르는데 두브로브니크를 다스리는 수장에게는 보통 공작의 작위가 수여되었기 때문이다. 1435년 르네상스 양식이 가미된 고딕 양식으로 지어졌고, 1667년 지진 이후 바로크 양식이 가미되었다. 궁전의 내부는 거주자의 취향에 따라 다르게 꾸며졌는데, 가장 유명한 방이 루이 16세 스타일로 꾸며진 로코코 홀이다. 궁전 안에는 두브로브니크를 위해 훌륭한 일을 한 인물들의 흉상이 세워져 있다.

 대성당
 대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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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란도 광장에서 남쪽으로 이어진 프레드 드보롬 거리의 끝에는 대성당이 있다. 성모승천 성당으로 1713년 바로크 양식으로 지어졌다. 그러나 이 성당의 역사는 12세기 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십자군 전쟁에 참전했다 돌아간 영국왕 리처드의 도움으로 짓기 시작해 14세기 중반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완성되었다고 한다. 현재 성당 박물관에 당시 유물들이 보관 전시되고 있다.

덧붙이는 글 | 7월 20일부터 31일까지 여행한 발칸지역에 대한 답사기다. 두브로브니크를 방문한 것은 7월27일(水)이며, 구시가지와 성곽을 답사했다. 두브로브니크에 대해서는 2회 글을 쓸 예정이다. 이번 기사는 그 첫번째 이야기로 구시가지의 문화유산을 다뤘다.



#두브로브니크#필레 지역#프란시스코 수도원#스트라둔 거리#성 블라호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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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심분야는 문화입니다. 유럽의 문화와 예술, 국내외 여행기, 우리의 전통문화 등 기사를 올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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