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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정 강정마을
▲ 강정 강정마을
ⓒ 황현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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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일 아침에 아버지에게 전화했더니, 4·3 기념 행사장에 와 계시다고 들뜬 목소리로 말씀하시더군요.

"여기 한명숙씨랑 다 왔구나!"
"아버지, 거기서 강정마을 군사기지 반대한다고 좀 외쳐주세요."

전화 말미에 제가 드리는 말씀을 건성으로 듣고, 금세 전화는 끊기고 말았지요.

오늘은 제주 4·3 사건 64주기입니다. 아버지께서는 4·3 사건의 직접적 피해자이시니, 공권력이 민간인을 사살한 그 폭력이 어떤 것이었는지 아시겠지요. 저는 그저 전해 들은 이야기들밖에 몰라서, 무고한 죽음이 무엇인지, 폭력이 무엇인지, 깊이 느끼지 못했습니다.

아버지는 지금 제주도 강정마을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잘 모르시지요. 같은 제주도여도 중·산간 시골 마을에 살고 있으면 작은 TV 상자에서 전해주는 것 말고는 별로 듣는 소식이 없으실 테니까요. 저는 스마트폰이 실시간으로 전해주는 SNS 덕분에 강정마을에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아버지보다 더 많이 알고 있습니다.

'미국 할망'이라는 별명, 얼마나 싫어했는지 아세요?

아버지! 4월이 시작되던 지난 일요일, 강정마을에 있던 송강호 박사라는 분이 경찰에 연행되는 과정에서 턱뼈에 두 바늘 꿰매는 상처를 입었고, 송곳니도 부러졌으며 연행되는 차 안에서 경찰들에 의해 주먹으로 구타를 당했고, 구역질했다고 합니다. 그보다 더 전에는 구럼비 발파를 막기 위해 PVC 관을 팔에 끼고 있던 평화활동가들에게 경찰이 망치로 팔이 들어있는 PVC 관을 깨부수었습니다. 시뻘건 멍이 든 여자의 손이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저를 '미국 할망'이라는 별명으로 부르곤 하시던 아버지. 제가 영어를 잘한다고 늘 자랑스러워하셨지요. 제가 고향 집을 가면 당신은 영어를 잘하는 딸을 둔 것이 자랑스러워, 곧잘 "영어로 좀 쏼라쏼라 해봐라" 하기도 하셨지요. 제가 돈을 많이 버는 딸도 아니고, 당신이 육지로 유학 보내서 공부시킨 딸에게 얻는 유일한 자랑이 영어 실력인지라. 저는 당신 말대로 아무 영어나 지껄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 제가 그 '미국 할망'이라는 별명을 얼마나 싫어했는지 아세요? 아버지가 말씀했던, 가난한 도민들에게 구제품을 나누어 주던 미국인의 이미지가 겹쳐져서 더욱 싫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왜 영어를 잘하게 되었는지 아세요? 그건 제가 말더듬이였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는 역정을 잘 내시고 저를 때리곤 했지요. 자식 중에서 저만 특별히 더 맞은 것은 아닐 겁니다. 그러나 나에게 날아드는 매를 조금이라도 피해 보려고 변명하던 버릇이, 어린아이였던 저를 말더듬이로 만들었습니다. 우리말로 말하기만 하면 심하게 더듬었죠. 중학생이 되어 영어를 배우게 되자, 이 '새로운 영역'의 언어에서는 제가 더듬지 않고 말을 해볼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게다가 사람들은 대체로 영어를 못하니까 영어로 더듬거리는 걸 놀리지는 않으니까요). 아버지의 폭력이 저를 영어 잘하는 사람으로 만들었지만, 저는 '미국 할망'이라는 별명이 싫습니다.

4·3 사건을 더 알게 되고, 아버지가 어려서 아버지를 잃고 고아처럼 떠돌던 얘기도 많이 듣고 자랐지요. 결국, 아버지도 도도한 역사의 피해자라는 생각이 들자, 어려서부터 쌓였던 원망이 눈 녹듯 사라졌습니다. 오히려 그 도도한 역사의 흐름에서 가해자 역할을 했던 당시 우리나라 정부, 공권력, 그리고 진압작전을 벌인 미 군정에 분노가 쌓였습니다.

4·3 사건이 없었다면 저는 말더듬이가 되지 않았을 테죠

역사에 가정이라는 것은 없지만, 만약 4·3 사건이 없었고 할아버지도 총살당하지 않고 그저 가난하지만 귤농사, 밭농사 지으면서 당신을 키웠더라면…. 어떨까요. 당신이 예쁜 딸이라며 저에게만 '아름다울 미(美)'자를 넣어 '은미'라고 지어준 사랑스러운 딸에게 그렇게 심하게 매질을 하지는 않았겠지요. 그럼 저는 말더듬이가 되지 않았을 테고, 당신이 좋아하는 선생이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아버지! 제게 "잘 지내냐?" 물으셨지요. 저는 무척 잘 지냅니다. 아이는 중학교 가서 열심히 공부하고, 김 서방도 회사 열심히 다니고 있습니다. 그가 올해 차장 진급했다니까 당신이 무척 기뻐하셨지요. 그러나 아버지! 저도 직장을 잘 다니고 집 안도 건사하고 무탈하게 지내지만, 제주도 때문에 자주 울고 있습니다.

강정마을에 있는 사람들이 다치는 것이 마음 아프고, 그 아름다운 곳이 무참히 파괴되는 것도 마음 아프며, 믿을 수 없는 비민주적인 일들이 마구 자행되어서 마음 아픕니다. 4·3의 아픔이 다 씻겨지지 않았는데, 다시 망령이 되살아나는 것 같아 두려움에 젖고 있습니다.

아버지! 평생 농사꾼으로 살아온 가난한 우리 아버지.

"강정마을 좀 같이 지켜줍서. 동네 삼촌, 이모, 먼 친척까지 강정마을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소문내줍서."

유난히 을씨년스런 날씨에 진눈깨비까지 날리는 4월 3일. 할아버지의 명복을 빌며 이 편지를 씁니다. 4·3 영령들이여, 편히 잠드소서. 


#강정마을#4.3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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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쓰고, 산책하는 삶을 삽니다. 2011년부터 북클럽 문학의 숲을 운영하고 있으며, 강과 사람, 자연과 문화를 연결하는 사회적협동조합 한강의 공동대표이자 이사장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한강'에서 환대의 공동체를 만들어나가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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