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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2월 24일 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 인근 비무장지대 감시초소(GP)에서 사망한 고 김훈(당시 25세) 중위의 유족들이 '국방부가 최근 실시한 총기 실험 결과를 부정하고 또 다시 자살 결론을 내리려 한다'며 강력 반발하고 있다.

 

앞서 지난 3월 22일 국방부와 국민권익위원회, 국립과학수사연구원(아래 국과수)이 합동으로 실시한 총기 발사 실험은 김훈 중위가 자살했다는 국방부의 기존 주장과는 배치되는 결과가 나온 바 있다.(관련 기사 : <10명이 당긴 방아쇠...'자살' 결론 뒤집나>)

 

실험 당시 10명의 사수는 오른손으로 김 중위의 권총과 동일한 M9 베레타 권총을 격발했고 사수의 손에 바륨과 안티몬 등 뇌관화약성분이 검출되는지를 확인하는 총기발사 잔사 실험(GRS)를 실시했다.

 

특히 5명의 사수는 과거 '김 중위가 오른손 검지 손가락이 아닌 엄지 손가락으로 방아쇠를 당겼기 때문에 오른손에서 뇌관화약 성분이 검출되지 않았을 것'이라는 의견을 내 자살설에 힘을 실어줬던 한 법의학자의 의견을 적극 수용해서 일반적인 사격자세와는 달리 엄지 손가락 사격을 실시한 후 국과수에 분석을 의뢰했다.

 

그런데 국과수 분석 결과 오른손으로 권총의 방아쇠를 당긴 10명 모두 오른손에서 뇌관화약 성분이 나왔다. 김훈 중위는 오른손잡이였고 오른쪽 옆머리에 총을 대고 쏘아 자살했다면 오른손에서 뇌관화약 잔재가 묻어나야 했지만, 그의 오른손에서는 뇌관화약 성분이 발견되지 않았다. 이러한 시험 결과는 김훈 중위의 사인이 자살이 아니라는 것을 강력하게 뒷받침하고 있다.

 

"국방부가 또 무리한 자살 근거 제시" 유족 반발

 

국방부 조사본부는 지난 5월 중순 김 중위 유족들에게 보낸 민원 회신문에서 이달 초 담당조사관이 최종조사결과에 대한 설명을 하겠다고 통보했다.

 

이 회신문에서 국방부는 ▲ 총기 및 법의학 전문가에게 사실 검증 실시 ▲ 국민권익위원회에서 요청한 뇌관화약잔사 검출여부를 확인키 위한 총기발사 실험 ▲ 미 CID(범죄수사대)에서 보내온 수사 결과 자료 분석 등을 토대로 사실관계를 검증하겠다고 밝혔다.

 

김 중위 유족 측이 반발하고 있는 것은 바로 이 대목이다. 즉 지난 14년간 국방부가 김 중위 자살 증거로 들었던 자료들을 이번에도 제시하려 한다는 것.

 

국방부는 총기실험 한 가지만으로는 자살인지, 타살인지 여부를 판단할 수 없으며 다른 증거들과 함께 종합적으로 판단해야 한다는 입장이지만, 김 중위 유족들은 국방부의 이런 입장이 과학적 근거를 애써 외면하려는 데서 비롯된 것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특히 미 CID 자료는 당초부터 국방부가 자살의 근거로 삼았던 것으로 사망 당시 시신에 남겨진 법의학적 증거, 총기 실험 결과와는 정면으로 배치되는 주장을 담고 있어 김 중위 사인을 규명하는 자료로는 부적절하다는 것이 김 중위 유족 측의 입장이다.

 

지난 1998년 9월 미 국방부 산하 미군 병리학부 의무관 스펜서 박사가 작성한 이 소견서에는 "베레타 권총과 같은 반자동총기가 발사된 이후 뇌관(화약) 잔재물이 검출되지 않은 것은 비정상적인 것이 아니며, 일반적으로 반자동 권총을 발사할 경우에는 뇌관잔재물이 검출되지 않기 때문에 김 중위 오른손에서 뇌관잔재물이 검출되지 않았던 것"이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

 

하지만 이 소견은 국방부가 과거에 실시했던 3차례에 걸친 총기 발사 실험, 지난 3월 22일의 실험, SBS, MBN 등 방송사 취재진에 의한 2차례 실험에 나타난 결과와 판이하게 다르다는 점에서 신빙성이 의심된다. 즉 '총기를 발사할 때 사용된(방아쇠를 당긴) 손에 화약흔이 남지 않은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라는 것'이 스펜서 박사의 소견인데, 총 6차례에 걸친 총기 발사 시험은 단 한 차례의 예외 없이 그의 주장과는 정 반대의 결과가 나온 것이다.

 

총기발사 시험 결과 무시하려는 국방부

 

스펜서 박사의 소견은 같은 미군 기관인 미 육군성 범죄수사연구소 감식 결과와도 배치된다.

 

김 중위 사망 직후 1차 수사를 담당했던 미군 범죄수사대는 현장에서 발견된 권총과 실탄, 탄피 등의 유류품을 미 육군성 범죄수사연구소로 보내 감식을 의뢰해 그 결과를 통보받았다. 미 범죄수사연구소는 회신문에서 "오른손잡이(김 중위)의 왼손바닥에서만 뇌관화약 잔재물이 나왔다는 점은 스스로 쏘았다고 단정해서는 안 됨"이라고 주의 문구까지 특별히 넣어서 보냈다. 하지만 당시 군 수사당국은 타살 정황을 뒷받침해줄 수도 있는 미군 범죄수사연구소의 이런 분석 결과를 아예 묵살했다.

 

또 국방부는 김 중위가 자살했다는 근거로 스펜서 박사의 소견 외에 "발사자에게 화약잔재가 나타나는 경우는 38%에 불과하다"는 미국 논문을 제시하고 있다. '자살 사건의 총기 발사 잔사(GSR) 실험 결과 분석'(Analysis of Gunshot Residue Test Results in 112 Suicides)이라는 제목의 이 논문은 미 육군성 과학수사연구소에서 지난 1978년~1988년 사이 각종 총기로 자살한 112명을 조사한 통계를 싣고 있다.

 

그런데 <오마이뉴스>가 이 논문을 입수해 분석한 결과 38%라는 통계에는 비밀이 숨겨져 있었다.

 

총기발사 잔사실험에서 뇌관화약 검출 여부를 결정하는 것은 채취 시간 지연, 시체의 위치, 무기의 특징이 아닌 채취할 때 피해자 손의 상태라는 것이다. 즉 깨끗하고, 물기 없고, 현장에서 실험하거나 종이봉지로 보호된 손을 검사했을 때 뇌관화약이 많이 발견된다는 것이 이 통계의 핵심이다.

 

이 논문은 시체를 병원이나 시체보관소로 이송할 때 손을 보호하지 않은 사건들에선 주로 뇌관화약 성분이 나타나지 않았다고 밝히고 있다.

 

봉투에 싸여있던 오른손에선 왜 뇌관화약 안 나왔나?

 

김훈 중위의 경우는 어떨까? 김 중위가 숨진 채 발견된 직후 현장에 출동한 미군 수사요원들은 시신의 양손에 즉시 종이봉투를 씌웠고, 4시간 뒤 감식반이 양손에 뇌관화약이 묻어 있는지를 검사했다. 이 같은 사실은 사망 당시 찍힌 사진에 잘 나타나 있다.

 

물기 없이 건조한 벙커 안에서 발견된 김 중위의 손은 화약 성분이 날아가지 않도록 종이봉투에 의해 잘 보호되어 있었는데도 뇌관화약이 검출되지 않았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지난 3월 22일 총기발사 시험에 앞서 국방부 조사본부는 국과수에 "(스스로 쏜 사람이) 권총을 어떤 방법으로 파지했을 때 오른손에서 뇌관화약 잔재가 검출되지 않을 수 있나?"라는 질의를 했다. 이에 대해 국과수는 "그 원인으로는 일반적인 권총 파지 자세가 아닌 다른 형태의 파지 자세로 격발했을 가능성과 실제로 (김훈 중위가) 총기를 격발하지 않았을 가능성을 추정할 수 있다"라고 회신했다.

 

여기서 말한 일반적인 권총 파지 자세가 아닌 예로 국과수는 엄지손가락으로 방아쇠를 눌러 격발하는 파지 자세를 들 수 있다고 했다. 그런데 실제 총기발사 시험에서는 엄지손가락으로 방아쇠를 당긴 5명에게서도 예외 없이 오른손에 뇌관화약 성분이 검출된 것이다.

 

단 한 번의 예외도 없는 이 같은 결론은 김훈 중위가 스스로 권총의 방아쇠를 당기지 않았음을 강력하게 시사해주고 있다. 그런데도 국방부가 과학적 증거들을 애써 무시하고 과거 김훈 중위 자살의 근거로 내세웠던 자료들을 또다시 최종조사 결과에 반영하겠다는 것은 납득할 수 없는 처사라는 것이 유족 측의 주장이다.

 

김훈 중위의 아버지 김척 예비역 육군 중장은 지난 1일 <오마이뉴스>와 만나 "국방부가 명백한 과학적 증거는 모조리 무시하면서 이미 그 근거를 잃은 자료를 자살의 증거로 제시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 "국방부는 자신들이 원하는 결과가 나올 때까지 실험을 계속하겠다는 말이냐"며 "이러한 행태는 국가기관으로서의 자기 부정"이라고 지적했다.

 

국방부 조사본부는 이르면 이번 주 내에 김 중위 유족들에게 최종조사 결과를 통보할 예정이다.


#김훈 중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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