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재벌에 대한 규제가 필요하다는 것은 온 국민이 피부로 느낄 만큼 명확한데도 이에 대한 논의는 생산적으로 진행되지 못하고 있다. 전경련을 앞세운 재계는 헌법을 들먹이며 재벌개혁이 위헌이라고 반박한다. 어떤 이들은 재벌개혁을 무조건 재벌해체로 몰아가기도 한다. 이제 재벌개혁의 구체적인 방안을 두고 토론해야 한다. 무엇을 목표로 하여, 어떤 방식으로, 어느 정도나 규제할 것인지에 대해 서로 합의할 수 있는 지점을 찾아갈 필요가 있다. 새사연이 먼저 재벌개혁의 구체적 방안을 제시하고자 한다. - 기자말

사실 지금 있는 법들만 잘 지켜도 재벌개혁의 많은 부분이 실현될 수 있다. 문제는 재벌로 하여금 법을 지키게 강제할 세력이 없다는 것이다. 정치인, 관료, 검찰, 언론이 모두 재벌의 영향권 아래 있는 한국사회의 현실을 우리 모두 알고 있다. 또한 앞서 제안했던 기업집단법과 기업분할/계열분리명령제와 같은 새로운 법을 만든다고 해도 이를 지키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 따라서 여러 가지 규제와 제도를 도입하는 것과 함께 실제로 재벌을 감시할 수 있는 사회적 세력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재벌 감독기관 공정위, 권한 대폭 보강해야  

우선 재벌 감독기관인 공정거래위원회(공정위)를 강화해야 한다. 공정위는 공정거래법에 의거하여 국무총리실 산하에 설치된 행정기관이다. 법률적 성격을 확인해보면 대외적으로 행정의사를 표시하고 집행할 수 있는 행정 관청이며, 다수의 위원으로 구성된 위원회에서 의사결정을 내리는 합의제이며, 각종 고시, 규정, 규칙을 제정할 수 있는 준 입법기관이자, 이의신청에 대한 재결정 등의 업무를 수행하는 준 사법기관이다.

공정위는 독점 및 불공정 거래를 규제하고, 경쟁 정책을 수립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현재 우리나라에 존재하는 유일한 재벌 감독기관이다. 하지만 재벌들은 놀라운 변화를 겪으면서 권력을 키워온 반면, 공정위는 1981년 설립된 이래 그 권한이 크게 발전하지 못했다. 공정위가 강력한 독립 감독기구가 되어 재벌의 검찰이 되도록 해야 한다.

 이명박 대통령이 2011년 12월 15일 서울 서초구 양재동 한국소비자원 대회의실에서 열린 2012년 공정거래위원회 업무보고에서 발언하고 있다.
 이명박 대통령이 2011년 12월 15일 서울 서초구 양재동 한국소비자원 대회의실에서 열린 2012년 공정거래위원회 업무보고에서 발언하고 있다.
ⓒ 연합뉴스

관련사진보기


당장 공정위의 인적 구성 방식에 변화가 필요하다. 공정위는 위원장과 부위원장을 포함하여 9명의 위원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런데 이들 모두 대통령의 임명으로 선출된다. 대통령의 재벌개혁 의지 여부에 따라 공정위의 판단이 달라질 수 있는 셈이다. 이를 개선하여 대통령 임명 위원 외에 정당 추천과 국회 동의로 지명되는 위원을 추가하여 공정성과 독립성을 보강해야 한다.

나아가 공정위의 감독과 조사 권한을 대폭 보강해야 한다. 현재 공정위가 갖고 있는 조사권은 강제력이 없는 자료제출 요구권에 불과하다. 기업에게 시장 구조 조사 및 공표를 위해 필요한 자료의 제출을 요청할 수는 있지만, 기업이 이에 응하지 않아도 벌칙이나 과태료를 부과할 수는 없다. 제대로 된 감독과 조사를 위해서는 자료제출을 넘어서는 강제조사권이 필요하다.

반면 공정위의 전속고발권은 폐지해야 한다. 공정거래법 위반에 대한 벌칙을 내리려면 검찰이 정식으로 공소를 제기해야 하고, 이를 위해서는 고발이 필요한데 오직 공정위만이 고발의 주체가 될 수 있다는 것이 전속고발제도이다. 고발권의 남발로 기업인의 경제활동이 위축될 수 있다 하여 1996년 도입되었다. 하지만 지금의 성숙한 사회문화 환경을 감안할 때 이는 오히려 국민들의 고발권을 제약하고 있다. 공정위만 갖고 있던 고발권을 일반 중소기업이나 소비자에게 넘겨주어야 한다.

감독기관으로서 공정위를 강화하는 한편, 상시적으로 재벌을 견제할 수 있는 사회적 세력이 필요하다. 어쩌면 현 단계에서 재벌개혁의 가장 확실한 대안은 제도 설계가 아니라 견제세력 형성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누가 재벌을 견제하는 세력이 될 수 있을까? 재벌로 인해 피해를 받고 있는 모든 사회 구성원이 견제 세력이 되어야 한다. 경제적 약자들의 힘이 강해져야 한다.

상인·중소기업·소비자·노동자가 나서야

 18일 지역 중소상인들이 서울 마포구 합정동 메세나폴리스 앞에서 홈플러스 합정점 입점을 반대하며 천막농성을 벌이고 있는 가운데, 건물 앞에 '입점 반대' 펼침막들이 걸려 있다.
 18일 지역 중소상인들이 서울 마포구 합정동 메세나폴리스 앞에서 홈플러스 합정점 입점을 반대하며 천막농성을 벌이고 있는 가운데, 건물 앞에 '입점 반대' 펼침막들이 걸려 있다.
ⓒ 이주영

관련사진보기


최근 재벌의 골목상권 잠식으로 생계를 위협 당하고 있는 상인들, 재벌 대기업의 납품단가 인하 압력에 시달리는 중소기업들이 저항에 나서고 있다. SSM에 대한 저항, 유통법과 상생법 통과, 중소기업 적합 업종 선정 부활, 일감 몰아주기에 대한 비판, 납품가 원가연동제 요구 등이 모두 상인과 중소기업에 관련된 것들이다. 피해 받던 이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직접 나섰다는 점에서 매우 바람직하다.

하지만 이들이 재벌과 대등하게 협상하고 요구하기 위해서는 법적, 제도적 보장이 필요하다. 지역 상인들에 대해서는 지역 상권을 보장해주는 권한을 주고, 중소기업의 경우 중소기업협동조합이 납품가 협상권을 가질 수 있도록 공정거래법을 개정해야 한다. 현재는 중소기업의 단체협상을 일종의 담합으로 취급하여 금지하고 있다.

재벌 대기업의 제품을 사용하는 소비자들도 재벌의 견제세력이 되어야 한다. 올해 초 삼성과 엘지가 세탁기와 TV의 가격을 담합했다가 공정위에게 적발당한 적이 있었다. 당시 녹색소비자연대에서 소비자 피해 집단소송을 하겠다고 나섰었다. 담합으로 인해 소비자들은 부당하게 높은 가격으로 제품을 구매해야 했기 때문이다. 가전제품 뿐 아니라 자동차, 석유, 통신 등 많은 분야에서 소수의 재벌이 독과점을 형성하고 있다. 높은 자동차 가격, 높은 기름값, 높은 통신요금은 단순히 물가상승의 문제가 아니라 재벌로 인해 국민들이 입고 있는 피해를 보여주는 문제이다.

마지막으로 노동자들의 힘이 강화되어야 한다. 물론 우리의 현실에서 노동조합이 재벌의 견제세력이 되기에는 역부족이다. 심지어 1위 재벌 삼성에는 실질적인 노동조합은 존재하지 않는다. 우선은 노동자 대표의 사외이사 추천권 보장과 같이 노동자들이 경영에 참여할 수 있도록 제도적 보완이 필요하다. 중장기적으로는 독일의 공동결정제도에 준하는 이해관계자 자본주의로 발전해야 한다.

결국 노동자, 소비자, 중소기업, 상인, 그리고 그 외 99%에 해당하는 시민들이 경제 영역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내도록 보장하는 것이 재벌을 감시하고 개혁할 수 있는 세력을 형성하는 길이다. 이는 경제민주화의 가장 핵심적이고 종국적인 대안이기도 하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새로운사회를여는연구원(새사연)의 보고서를 바탕으로 쓰여졌습니다. 김병권 기자는 새사연 부원장입니다.



#재벌개혁#경제민주화#공정거래위원회#공정거래법#전속고발권
댓글

새사연은 현장 중심의 연구를 추구합니다. http://saesayon.org과 페이스북(www.facebook.com/saesayon.org)에서 더 많은 대안을 만나보세요.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