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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문경새재 방향으로 진짜 길을 잡아 걷는다. 그런데 읍사무소 앞을 지나는데, 박정희 대통령이 살던 '청운각(靑雲閣)'이라 집이 있다는 큰 안내판을 발견했다. '대구사범학교를 졸업한 박정희가 1937~40년 경 교사로 잠시 문경에 머문 적이 있는데, 당시의 하숙집이 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예전에 초등학교 동기인 규진이의 춘부장께서 문경초등학교 다닐 때 박정희가 담임선생이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는데, 여기구나. 규진이 아버님은 박정희에게 배워서 그런지, 나중에 그의 뒤를 이어 대구사범을 졸업하시고는 문경, 영주, 예천 등지에서 초등학교 교사로 일하신 적이 있다.

아무튼 난 문경초등학교 앞에 있는 박정희의 교사시절 하숙집인 청운각으로 갔다. 이곳은 그가 문경서부심상소학교(현재의 문경초등학교) 교사로 재직하던 1937년 4월부터 1940년 3월까지 거처했던 하숙집이다.

1976년 문경초등학교 동창회장이었던 김종호씨가 매입하여 보수한 후 문경초등학교에 기부했으며 현재는 문경시가 관리하고 있다. 대지 1079㎡, 총면적 78.7㎡의 초가집으로, 박정희와 육영수의 영정과 교사재직 당시 찍은 사진, 책상·가방 등의 유품이 있다.
   
박정희의 하숙집
▲ 청운각 박정희의 하숙집
ⓒ 김수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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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경시는 지난 2012년 6월 청운각 주변에 박정희 사당과 기념관을 갖춘 공원을 추가로 조성해 시민과 관광객에게 개방했다. 17억 원의 사업비로 2년간의 사업기간을 거쳐 기존 청운각 부지 1079㎡를 2892㎡로 확장하고 청운각에 마련돼 있던 분향소를 새로 건립한 사당으로 옮겼다.

사당 옆에는 기념관, 기록영상실, 관리사, 화장실, 공원, 주차장 등을 조성했다. 마당에는 박 전 대통령이 교편을 잡았던 문경초등학교 100회 졸업 예정인 5학년 학생들의 장래 희망과 포부를 도자기 타일에 새긴 500개의 박석(薄石)이 깔려 있다.

이어 중앙에는 북 치고 장구 치는 아름다운 대동 세상을 표현한 북과 장구 형상의 상징물이 자리 잡았다. 이는 주역 상경의 마지막인 30번째 리괘에 해당되는 말로서 험난함을 넘어 새로운 세상으로 나아가는 혁신의 의미가 담겨져 있다고 한다. 

사당에는 홍익대 서양화가 조국현 전 교수가 그린 박 전 대통령과 한국미술협회 금천지부장인 정기창 화백이 그린 육영수 여사의 초상화 영정이 있다.

기념관에는 생존하고 있는 박 전 대통령 제자들의 육성이 녹음된 '박 대통령 이야기'와 대통령 유물 및 자료, 영상자료 등을 볼 수 있으며, 관련 도서와 기념품도 팔고 있다. 사당과 기념관 사이에 조만간 박 전 대통령 흉상도 세울 계획이라고 한다.

청운각은 박정희 서거 전인 지난 1978년 경상도 보존 초가옥 1호로 지정됐다. 현재 문경에는 박정희의 생존 제자들이 20여 명이나 거주하고 있다. 문경시는 민족정신의 산 교육장으로 거듭나 더 많은 추모객과 관광객이 방문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개인적으로 내 생각에는 지금은 박 전 대통령과 관련한 역사자원이 큰 관심을 모으고 있지만 박근혜 대통령의 임기가 끝나는 후에도 지자체와 관광객들의 관심을 끌지는 상당히 의문이다. 오히려 막대한 혈세를 투입해 조성한 기념물이 애물단지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계시는지 솔직히 궁금하다.

난 사실 너무 인공적인 냄새가 많이 나는 청운각을 둘러보면서 기분이 그랬다. 그리고 특이한 모양으로 우물 안에서 자라 오른 오동나무를 애써 '박근혜 오동나무'라고 이름을 정한 것도 그랬다. 아무튼 주마간산으로 청운각을 둘러보고는 화장실에 갔다가 길 건너 청운주막집'으로 갔다.

사실 배가 고파서 늦은 점심을 먹기 위해 이곳에 갔는데, 생각보다 너무 많이 붙어 있는 박정희 사진과 신문자료, 글씨 등이 정신을 어지럽게 하여 잠시 내부를 둘러보고는 나왔다.

박 대통령이 자주 애용하던 음식점인 것 같았다. 술도 팔고 해서 가끔 이곳에서 탁주를 한 사발하면서 이런저런 토론을 하면서 보냈을 것 같다는 상상을 해 본다. 술과 밥은 다음에 와서 하도록 하자.

벌써 오후 3시 30분이다. 이제는 문경새재까지 가는 것은 포기하고 새재 가는 길목에 있는 도자기를 굽는 '영남요(嶺南窯)' '문경도자기전시관(聞慶陶瓷器展示館)' '문경유교문화관(聞慶儒敎文化館)'을 순서대로 둘러보기 위해 3km정도를 걸어서 갔다. 무척 덥고 눈도 부시다. 목도 조금씩 마르기 시작한다.

가장 먼저 당도한 곳은 영남요다. 도자기의 고장 문경에는 동로면 인곡리에서 조선 초기부터 도요의 역사가 시작되어 현재 10여 개의 도요지가 분포하고 있다. 이곳에서는 조금씩은 다르지는 때로는 같은 백자, 진사대작, 분청사기대작, 다완, 다기 세트 등이 생산되고 있다.

문경 자기는 특히 나무의 재를 이용하여 유약을 만들고, 전통 가마에 장작불을 지펴 구워내는 고전 방식 그대로의 제작 과정을 지키고 있어 자기의 깊은 멋이 살아 있는 것이 특징이다.

진안리에 7대째 가업을 이어오는 중요무형문화재 제105호 사기장 기능보유자인 김정옥의 영남요를 비롯하여 천한봉의 문경요, 김억주의 황담요, 이정환의 주흘도요 등 10여 곳이 문경을 대표하고 있다.

여러 군데의 도예촌에서 나온 우수작들은 문경도자기전시관 등에 전시되어 있으며, 자기 홍보와 판매를 위해 찻사발축제와 도자기에 관한 강좌와 도자기를 직접 제작하는 체험 행사도 자주 열리는 편이다. 

문경에서는 특히 오늘 방문하게 되는 영남요와 천한봉의 문경요가 제일 유명한 편이다. 문경 도자기는 흙으로 빚은 그릇을 구워내는 방법에 따라 토기, 도기, 자기로 나누어지는데, 백토 등이 혼합되어 높은 온도에서 구워낸 그릇을 자기라고 하며, 사기장은 사옹원(司饔院)에서 사기를 제작하던 장인들을 일컫는 말이었다.

영남요의 주인인 백산 김정옥 선생은 1942년 문경읍 관음리에서 태어났다. 그의 7대조 김취정 선생이 관음리에서 사기장 일을 시작했다. 그때부터 오늘까지 200여 년간 사기장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문경
▲ 영남요 문경
ⓒ 김수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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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어린 시절부터 양친에게서 자기 제작기술을 전수받았으며, 18세가 되는 1960년도부터는 홀로 물레를 돌릴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어려운 살림형편으로 중학교 3학년을 중퇴하고 집안일을 도우며 사기장 일을 시작했다. 부친이 타계한 이후 일을 그만둘까도 고민하다가 현재의 터로 이전하여 영남요를 짓고 가업을 계승하기에 이르렀다.

18세부터 본격적인 도예가의 길로 들어서 그는 50년이 넘는 세월동안 고집스럽게 전통방식을 고수하고 있다. 지금도 일흔이 넘은 나이에도 발 물레를 고집하며 유약을 만드는 것에서부터 배합까지 모두 전통을 지키며 문경자기의 은은한 미(美)를 재현하고 있다.

그러한 노력으로 그의 작품은 전통적인 조선백자의 전통성을 가장 잘 유지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도자기를 구울 때도 장작 가마인 망뎅이 가마만을 사용하고 장작 또한 적송만을 사용한다.

선생이 만들어낸 작품들은 미국 스미스소니언박물관, 영국 대영박물관 등에서 한국 전통의 아름다움을 알리고 있다.

7대째 이어져 내려온 가업은 아들인 경식까지 8대째로 이어지고 있으며 손자인 지훈군 역시 경기 이천의 도예고에 다니고 있어 9대의 맥을 이어지고 있다. 지훈군은 2013년 문경전통찻사발축제 행사의 하나인 발물레 경진대회 학생부에서 3등을 차지하여 화제가 되기도 했다.

그의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청화백자 기술은 소박하면서도 고고한 멋을 느낄 수 있고 정호다완에서는 정갈한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

난 감탄사를 연발하며 이곳저곳을 둘러보고는 밖으로 나왔다. 이제는 배가 고파 도저히 참을 수 없어 문경유교박물관 큰 길 건너편에 있는 작은 순두부 전문점에서 늦은 아니 이른 저녁으로 순두부로 먹었다. 

너무 배가 고픈 가운데 먹은 음식이라 짜장 맛있게 먹었다. 더운 가운데 물도 한 모금 마시고 않고 4시간 넘게 다녀서 찬물도 5컵 이상은 마신 것 같다. 겨우 부른 배를 다시 부여잡고는 길을 좀 더 걸어 문경도자기전시관으로 이동했다.

덧붙이는 글 | 6월 8일 문경읍



태그:#문경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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