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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자는 한가로이 휴식을 취하거나 여럿이 모여 흥을 돋웠던 곳으로 선인들의 풍류 쉼터요 정치 토론의 장이었다. 넓고 시원스럽게 펼쳐진 극락강변 언덕위에 있는 풍영정은 산수의 경치를 고루 갖춘 영산강(극락강은 영산강의 샛강) 유역에서는 보기 드물게 빼어난 정자이며 극락강이라는 이름조차도 여기서 바라보는 풍경이 이승의 것이 아닌 극락의 모습이라는 시인들의 비유에서 유래했다니 예전에는 풍광이 어떠했을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극락강변에 자리잡은 풍영정 전경
 극락강변에 자리잡은 풍영정 전경
ⓒ 임무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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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자의 이름인 풍영(風詠)은 <논어>에서 가져 왔는데 언젠가 공자가 제자들에게 소원을 묻자 증점(曾點)이 대답하기를 "기수(沂水)에서 목욕을 하고 무우(舞雩)에서 바람을 쐬고 노래를 부르며 돌아오고 싶습니다"라고 했단다. 즉 풍우영귀(風雩詠歸)로 자연을 즐기며 시가를 읊조린다는 뜻으로 정자의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여기서 '기수'와 '무우'는 춘추시대의 전설 속에 나오는 곳이며 아마도 이 정자를 건립한 김언거의 평생 바람이었을 것이다.

 극락강변에서 풍영정으로 오르는 돌계단이 소담스럽다.
 극락강변에서 풍영정으로 오르는 돌계단이 소담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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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7일 풍영정에서 칠계문중 김양중 도유사님을 뵙고 역사적인 사실과 오랜 세월 구전되어오는 이야기를 듣게 됐는데, 그럴듯한 전설은 임진왜란 때 왜병들이 지른 불에 열한 채의 정각이 다 타버리고 풍영정에 불길이 붙으려 할 때 풍영정 현판 글씨가 오리가 돼 극락강 물속으로 들어가 버리는 것을 기이 여긴 왜장이 불을 끄게 하자 다시 오리가 글씨가 돼 제자리에 되돌아 와 소실되지 않았다는 전설과 함께 풍영정 현판에 얼킨 사연은 신비스러움을 더하고 있었다.

풍영정 정면 풍영정은 사방에 막힘이 없어 항상 시원하다.
▲ 풍영정 정면 풍영정은 사방에 막힘이 없어 항상 시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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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연인즉, 낙향한 김언거를 위해 그의 덕망을 높이 흠모하던 사람들이 적극적으로 나서 선창마을 뒷동산에 무려 열두 채의 정각을 지어줘다는 소식을 들은 명종 임금이 정각 현판을 무주에 살고 있는 기인 갈처사에게 받으라고 했다 한다. 열네 차례의 방문 끝에 만난 처사는 바위에 먹을 갈고 칡덩굴을 잘라 붓을 만들어 풍영정이라고 적어주면서 판각을 하기 전에는 절대로 글씨를 보지 말라는 당부를 했다.

풍영정 현판 '풍(風)'자와 '영정(詠亭)'자의 배열이 약간 다른 것이 풍영정을 더 신비롭게 느끼게 한다.
▲ 풍영정 현판 '풍(風)'자와 '영정(詠亭)'자의 배열이 약간 다른 것이 풍영정을 더 신비롭게 느끼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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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집으로 돌아오던 길에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글씨를 열어 본 순간 풍영정(風詠亭)의 풍(風)자가 회오리바람을 일으키며 날아가 버렸다. 다시 찾아 간 김언거에게 갈처사는 다시 공을 들여야 하는데, 그 때가 되면 자기는 천수를 다하여 쓸 수 없다 하며 제자인 황처사를 소개해줘 그에게서 풍(風)자만을 다시 받아 왔다. '풍(風)'자와 '영정(詠亭)'자의 배열이 약간 다른 것이 바로 이러한 전설을 낳게 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한석봉이 쓴 글씨 천하명필 한석봉이 풍영정의 아름다움을 보고 쓴 휘호
▲ 한석봉이 쓴 글씨 천하명필 한석봉이 풍영정의 아름다움을 보고 쓴 휘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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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영정의 별스러운 멋은 정자의 천정에 걸린 70여 개의 편액들일 것이다. 천하명필 한석봉의 친필인 '제일호산'이라는 현판을 비롯해 당대의 명현인 이퇴계·김하서·임석천·정송강·기고봉·송면앙 외 수많은 문인들과 교분을 나눴던 체취가 시율현판에 남아 걸려 있다. 광산 김씨 칠계문중에서 풍영정의 편액에 있는 한시들을 한글로 해석한 <풍영정시선>을 보면 다음과 같은 글귀가 나와 있다.

풍영정 천정에 걸린 편액들 풍영정을 더욱 별스럽게 해주는 70여개의 편액들이 천정을 꽉 메우고 있다.
▲ 풍영정 천정에 걸린 편액들 풍영정을 더욱 별스럽게 해주는 70여개의 편액들이 천정을 꽉 메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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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영정십영(風詠亭十詠) - 풍영정 열가지 아름다움을 노래한 시
선창범주(仙滄泛舟) 선창에서 배를 띄움
현봉요월(懸峰邀月) 현봉의 달맞이
서석청운(瑞石晴雲) 서석의 개인 구름
금성제설(錦城霽雪) 금성의 개인 눈
월출묘애(月出杳靄) 월출산의 먼 노을
나산촌점(羅山村店) 나산의 마을 가게
양평다가(楊坪多稼) 양평의 많은 곡식
유시장림(柳市長林) 유시의 긴 숲
수교심춘(繡郊尋春) 수교에서 봄을 찾음
원탄조어(院灘釣魚) 원탄에서 고기 낚음

<풍영정십영>은 정자에서 배를 띄우고 낚시하며 달맞이하는 아기자기한 풍광에서부터 가까운 무등산과 멀리는 나주의 금성산 그리고 영암 월출산을 바라보는 아름다움을 표현하고 있는데 하서·퇴계·석천 세 명현이 위의 운(韻)에 따라 시(詩)를 지은 것이다. 각각의 시 중에서 첫 수를 비교해 보는 것도 고전을 이해하는데 약간의 도움이 될까 싶어 인용하였다.

하서 김인후의 선창범주(仙滄泛舟)

백 길 깊은 풍담은 유월에도 가을인데
정자 앞에 그 누가 목란주를 띄웠을까?
연강의 한 거룻배에 진인이 누워 있고
은하의 외로운 떼배에 바다 손님이 떠 있다.
한밤중에 외로운 학은 울며 날아 가로지르고
가벼운 갈매기는 물결 사이에서 출몰한다.
선창(船窓)에서 선창(仙滄) 노인을 찾아보려고
혼몽 속에 오랫동안 두약꽃 핀 물가를 찾았네.

퇴계 이황의 선창범주(仙滄泛舟)

한줄기 맑은 물 흘러든 지 몇 천년인가
이제 시인들을 보며 낚싯배에 오르노라.
물결은 다만 안개 속을 따라 흘러가고
빙빙 돌아 때로는 달 밝을 때 떠간다.
필상과 차 다리는 부엌에 말 잘하는 오리며
가량비에 바람 비껴 부니 갈매기 춤추지 않네.
다만 알건대 영허는 원래 정해져 있다하니
우리 유도는 창주에 의지함이 무방하리라.

석천 임억령의 선창범주(仙滄泛舟)

흰 마름꽃 붉은 여뀌꽃 가을 저무는 강에
생계에 바쁘지만 한 척의 작은 배로
처음엔 내키기에 건네리라 생각하였건만
무심한 곳에 이르니 침부를 잘 알았노라.
돛을 내리고 잠시 하늘가의 비를 피하고
느린 노질에 모래 위의 갈매기 놀랠까 저어하네'
살아온 생애가 여전히 부족하니
그대와 함께 하늘 밖의 영주를 찾으리라.

풍영정 광주광역시 광산구 신창동 852번지에 있으며 광주시 유형문화재 제4호로 지정돼있다.
▲ 풍영정 광주광역시 광산구 신창동 852번지에 있으며 광주시 유형문화재 제4호로 지정돼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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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영정은 광주·나주·장성을 잇는 길목에 있었고 김언거의 교유 인물들이 갖는 높은 명성으로 많은 사람들이 찾는 명소로서 역할을 했다. 이런 수많은 사람들의 왕래는 자연스럽게 많은 차운시를 낳게 했고 그 차운시들은 여타의 정자들과 비교할 때 압도적으로 많아 풍영정을 대표하는 특징이자 또 하나의 경관이 됐다.

풍영정 후면 오래된 고목나무 숲에 쌓여 있는 풍영정의 정취가 고색 창연하다.
▲ 풍영정 후면 오래된 고목나무 숲에 쌓여 있는 풍영정의 정취가 고색 창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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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영정은 1560년 김언거(1503~1584)가 지은 정자이며 김언거(金彦据)의 자는 계진(季珍), 호는 칠계(漆溪), 본관은 광산(光山)으로 1503년 증사헌부집의 김정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중종 20년 사마시에 올랐고 1531년 문과중시에 오른 뒤 옥당에 뽑혀 교리 응교 등 내직을 거쳐 상주 연안군수를 지낸 뒤 승문원 판교를 마지막으로 정계를 떠나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많은 학자들과 사귀면서 거문고와 풍월을 벗삼아 82세를 일기로 행복한 여생을 마쳤다고 한다.

덧붙이는 글 | 광산김씨 칠계문중 도유사 김양중님의 가르침과 자료제공에 감사를 드린다.



#풍영정#제일호산#한석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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