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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민권과 복지국가> 겉표지
 <시민권과 복지국가> 겉표지
ⓒ 김병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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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년이 지났다. 마셜(Thomas Humphrey Marshall)이 시민권을 통해 미래의 선도자라는 현대의 평가를 얻은 지가 말이다. 생뚱맞지만 그런 그가 살아있다면, 그리고 이 땅에서 일고 있는 몇 가지 논란을 직접 봤다면 뭐라고 했을까. 난 이 해답을, 책을 보고 짐작할 수 있었다. 김윤태 교수가 옮긴 <시민권과 복지국가>를 통해 알 수 있는 작은 단서의 조각들을 맞춰보면서.

책을 읽으며 내가 중점을 둔 사항은 두 가지였다. 복지의 범주가 넓어지는 횡적팽창에 대한 논의와 국제중이나 자사고 논란으로 대표되는 교육의 형평성에 관한 쟁점이었다. 물론 마셜이 이야기한 주제는 보다 고차원적이고 넓은 범주를 포괄한다. 하지만 이 책은 논문과 학술회의의 연설을 모아놓은 것으로, 나 같은 필부가 조금이나마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쟁점을 좁히고, 좀 더 실생활과 연관시킬 필요가 있었다. 하여 한정했고, 마셜의 반응에 대한 해석은 모두 지극히 주관적임을 미리 알리며, 책을 옮긴 김윤태 교수의 견해와는 다를 수 있음도 밝힌다.

복지? 정당하게 요구하라, 혜택이 아닌 권리다

복지에 관한 마셜의 주장을 이해하기에 앞서, 우리는 그의 '시민권'을 알아야 한다. 그는 시민권을 다양한 권리와 권력에 대한 접근을 포함한 일종의 지위로 봤다. 이는 세 가지 요소로 구성돼 있다. 공민권(Civil rights)·정치권(Political rights)·사회권(Social rights)인데, 가장 먼저 등장한 요소는 공민권으로 소유권·법 앞의 평등과 같은 개인의 권리와 연관돼 있다. 다음으로 19세기에 등장한 요소가 보통선거권인 정치권이다. 노동계급의 시민권에 대한 요구가 영향을 미쳤다. 마지막으로 20세기에 등장한 사회권은 복지와 관련된 권리다.

마셜은 이들 권리에 있어 가장 중요한 요소는 '평등'이라고 봤다. 한데 이 평등에 관한 재미있는 사실은, 현대산업민주주의 사회는 모순적인 가치들의 체계를 지속시키려 애쓴다는 점이다. 이 모순에 대해서는 1850년대 토크빌의 지적을 빌린다.

이를테면 우리 사회 질서의 토대가 되는 재산권은 -사회 질서를 숨기는, 말하자면 재산의 특권을 은폐하던 모든 특권이 파괴되고 있으며, 재산의 특권은 인간들 사이의 평등을 방해하는 가장 주요한 장애물로 남아있으며, 불평등의 유일한 신호처럼 보인다- 필요한 것이 아니며, 나는 재산의 특권이 결국 폐지되어야 한다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재산의 특권을 폐지하자는 생각은 분명 향유하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떠오르고 있다.(16쪽)

마셜이 말하는 시민권은 분명히 평등한 민주적 개념이다. 오늘날 모든 시민이 노동자고, 모든 노동자가 시민이라면, 노동은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 충분한 권리를 누리는 이들이 기꺼이 인정할 수 있는 의무가 된다. 이때의 권리는 투표뿐만 아니라 평등한 정의·언론의 자유·사회보장을 포함한다.

또한 노동이 이러한 사회적 유대의 시작이라면, 노동의 상실은 사회적 인간의 해체를 의미한다. 이런 심각성을 우려한 1950년대 복지국가는 빈곤의 주요 원인 중 하나였던 대규모 장기실업을 없애려는 목표를 최우선으로 설정하기도 했다. 당시 국가들은 실업의 영향을 최소화하기 위해 시혜적 정책을 폈다. 그러나 이는 실패로 돌아갔다. 왜일까. 그것은 바로 복지국가와 풍요로운 사회의 차이다.

첫 번째 유형의 사회는 광범위한 소득 범주와 사회적 지위의 위계질서를 가진 자유롭고 민주적인 사회이다. 두 번째 유형의 사회는 전체적으로 질서 있고 법률을 준수하는 사회인데, 경제적으로 실패한 사람들이나 불운한 사람들을 공공서비스를 통해 도와주어 겉으로 보기에 사람들의 생활 조건의 차이가 적다. 그러나 나는 두 유형의 사회가 가지고 있는 인생에 대한 철학의 차이가 매우 크고 중요하다고 본다.(173쪽)

마셜에 의하면, 전자는 복지사회고 후자는 풍요로운 사회다. 그가 말하는 '풍요로운 사회'에 대해서는 조금 설명이 필요하다. 풍요로운 사회가 번듯한 도시외관이나 활기차게 돌아다니는 군중을 뜻한단 생각은 착각이다. 마셜은 '부'와 '풍요'는 다른 의미라고 했다. 풍요는 사회에 광범위하게 분배되어야 하며, 대다수 인구의 속성이어야 한다. 즉, 풍요가 단지 존재하는 것을 넘어 풍요에 대한 공통적인 태도가 존재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복지사회는 그 반대의 원리에 기초한다. 복지사회는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복지사회는 문명 생활에서 자본주의 시장경제보다 상위에 있는, 시장을 억제하고 대체하여 달성해야 하는 몇몇 요소가 존재한다고 보았다. 복지사회는 모든 사람들 위해 소비 행동을 멈추는 것을 원했던 것이 아니라, 정당한 주장을 통해 불평등을 해명하고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고 믿었다.(126쪽)

시민권의 확립을 통해 현대 자본주의사회는 사회계급 제도가 발생시키는 불평등을 수정할 것이며, 균등한 소득은 아니더라도 균등한 권리에 기초한 사회가 도래할 것이라고 믿었다. 곧 시민권의 확대가 불평등한 자본주의사회를 평등한 사회로 변화시킬 수 있다는 얘기다. 그리고 그 평등을 추구할 수 있는 권리가 우리에게 있다.

따라서 마셜은 지금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 "복지를 당당하게 요구하세요! 혜택이 아니라 정당한 권리입니다!"

국제중? 교육의 형평성이 무너지면 안 된다

마찬가지로 마셜이 지금의 국제중이나 자사고를 봤다면 분명히 폐지를 요구했을 것이다. 것도 지극히 당연하게. 책에서 논의되는 복지국가는 평등을 옹호한다. 또한 복지국가의 계획은 모든 사람이 잠재적으로 어떤 지위에라도 오를 수 있는 후보라는 가정에서 시작해야 한다.

마셜은 공공 교육의 증가가 사회적 차원에서 정치적, 경제적 목표와 밀접하게 연결된다고 지적했다. 그는 교육의 권리를 비롯한 사회권의 등장은 단순히 도덕적 정언명령이나 자연권의 승리가 아니라 정치적 민주주의와 산업화 과정에서 필수적인 요소로 인식했다. 교육이야말로 사회의 건강과 문명화를 이루기 위한 근본적 토대라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보편적 시민권을 보장하기 위해서는 교육에 대한 균등한 기회가 선행돼야 한다. 물론 기회의 평등이 곧 결과의 평등을 의미하지는 않지만.

이미 영국에서는 1918년 법령에 '어느 아이도 수업료를 낼 수 없다고 해서 그들이 배울 수 있는 어떤 형태의 교육 혜택에서도 제외되어서는 안 된다'고 못 박았다. 아이들이 각각의 특별한 개인적 욕구에 가장 적합한 교육을 받을 권리는, 아이들이 필요로 하는 학교나 교사를 제공하는 비용에 따라 방해를 받거나, 사회의 수요에 따라 제한되는 식의 방해를 받아서는 안 된다는 요지다. 그러나 실상은 달랐나보다.

마셜은 1946년 발간된 책의 사례를 들었다. 당시 미국에 있던 한 중학교 교장의 말이다.

"수준별 학급은 단지 학교에서의 성적에 기초하여 만들어지도록 되어 있지만, 그렇지 않다. 그리고 모두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다. 나는 우리 A반에 있는 아이들 중 B반에 있어야 하는 아이들이 있다는 것을 알지만, 그들은 사교계 명사들의 자녀들이기에 그냥 A반에 머문다."(95쪽)

마셜의 복지국가는 정당하고 수용할 수 있는 경제적 불평등을 만드는 일부 조치를 인정해야 하지만, 그 원칙만큼은 엄격한 계급 구분이나 상이한 수준에서 뚜렷이 구별되는 계층 형성을 유도하는 어떠한 시도도 허용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책에서는, 만약 어떤 계층이 유년 시절에 선택을 받아 같은 곳에서 같은 교육을 받으며 자랐다면, 프랑스 정치학자 레몽 아롱이 전체주의의의 전형적인 특징으로 지적했던 '하나로 통합된 엘리트'를 형성할 것이라고까지 표현했다. 이 부분에서는 지금 우리사회에 형성된 모종의 '권력 카르텔'이 떠올라 아찔하기까지 하다.

현대적 관점에서 바라본 마셜의 시민권

마셜의 '시민권'에 대한 생각은, 글을 옮긴 김윤태 교수가 지적한 바와 같이 우리의 현안뿐만 아니라 세계적 차원에서 부국과 빈국·경제성장이 자연환경에 미치는 영향 등에 새로운 시사점을 던져주고 있다. 마셜 또한 책의 말미에 이에 대한 숙제를 남겼다.

풍요가 책임을 충족시키기 위한 수단을 제공하기 시작하면서 책임은 사람들에게 더욱 끈질기게 관심을 가지도록 강요할 것이다. 이러한 다른 힘들의 균형은 결국 어떻게 이루어질 것인가? 이는 20세기 중반 민주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 중 하나가 될 것이다.(187쪽)

20세기 중반 복지국가가 막 걸음마를 시작하던 시대에 마셜이 던졌던 질문은 21세기 신자유주의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도 중요한 영감을 준다. 마셜의 '시민권', 특히 '사회권'에 대한 현대적 해석은 우리의 몫이다.

덧붙이는 글 | <시민권과 복지국가>, T.H.마셜 지음, 김윤태 옮김, 이학사 펴냄, 2013.08, 1만7천원



시민권과 복지국가

T. H. 마셜 지음, 김윤태 옮김, 이학사(2013)


#시민권과 복지국가#T.H.마셜#김윤태#이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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