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점심만 먹고 빨리 가봐야 해." "오자마자 왜 이렇게 서둘러?" "너희들도 다 알잖아. 우리 영감, 집에 있는 거. 아마 나 올 때까지도 밥 안 먹고 있을 거야.""아무리... 오늘 두 달 만에 친구모임 하는 거 알잖아?" "물론 알지. 갔다 오라고는 했지만 보나마나 뻔하다. 안 먹고 내가 가면 혼자 먹으려고 해도 밥맛이 없어서 안 먹었다고. 그러다가도 내가 차려 주면 밥 한 공기 뚝딱 해치운다." "야. 우리 남편도 집안일을 안 하지만 내가 모임 있는 날엔 밥 한 끼 정도는 스스로 해결하는데. 네 남편 너무 하는 거 아니니?" "나도 너무 한다고 생각하지만 그렇게 싸워도 안 되는 것을 어쩌냐? 내 팔자려니 해야지. 별별 방법을 다 동원해 봐도 안 된다."친구의 대답에는 힘이 빠져 있었다.
며칠 전 친구모임이 있었다. 그런데 친구 A가 자리에 앉자마자 빨리 간다는 소리를 한다. 우리들은 입을 모아 "네 남편이 정말 배가 고프면 라면이라도 끊여 먹을 테니깐 오늘만큼은 느긋하게 있어봐. 네가 끼니를 너무 잘 챙겨주니깐 그러지"했다. 하지만 그는 점심식사가 끝나자마자 안절부절 못하는 눈치였다. 그런 모습을 보곤 몇 명의 친구들이 "그래, 그럼 너 먼저 가라. 우린 조금 더 수다 떨다 갈게"했다. 그러자 A가 기다렸다는 듯이 미안하다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쟤는 나이가 몇 살인데 아직까지도 저러고 사는지 모르겠다. 점심 한 끼 정도 남편이 찾아 먹게 놔둬도 괜찮을 텐데." "그러게 말이다. 성격이 팔자 소관이다. 아무도 못 말려. 쟤는 1박2일 여행도 못가잖니. 남편눈치 보느라." A가 가는 것을 보니 안쓰럽기도 하고 왜 저러고 사나 싶기도 하는 마음들이 생긴다. 그의 남편은 6년 전 퇴직을 했다. 듣자하니 전형적인 퇴직자의 모습을 다 가지고 있는 듯했다. 외출도 안하고 친구도 잘 안 만나고, 집안일도 전혀 안하고, 집에서 인터넷 게임으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고 한다. 하니 친구가 꼼짝 못할 수밖에.
남 얘기 할 때가 아니라 내 남편도 비슷하지그런데 그게 생판 남의 얘기가 아니었다. 지난해 어느 날이었다. 남편이 집에 있는 날이었다. 외출했다 돌아와 보니 오후 3시를 넘어 4시로 향하고 있었다. 시간이 그렇게 되었으니 당연히 점심은 먹었으려니 하고 밥 먹었냐고 물어보지도 않았다.
내가 아무 소리 안하자 남편은 "나 아직 점심 안 먹었는데"한다. 그 소리에 나도 모르게 짜증이 확 올라왔다. "그래서 어떻게 하라고. 이제 막 들어온 사람한테 밥 차려 달라고. 해놓은 뜨끈뜨끈한 밥에 냉장고 문만 열면 반찬 잔뜩 있는데 왜 아직 안 먹었는데. 배가 아직 안 고팠나 보지. 나도 너무 힘들다"하곤 그대도 소파에 누워 버렸다.
속으로 '내가 놀다 온 것도 아니고 손자들 돌봐주고 마트에 가서 장보고 왔는데 어쩌라고 배고프면 알아서 먹겠지. 라면을 먹든지 밥을 먹든지 몰라몰라'하곤 모르는 척하고 눈을 감고 꼼짝 않고 가만히 누워있었다. 내가 꼼짝도 하지 않자 남편은 할 수 없다는 듯이 일어서더니 라면을 끓여 먹는다면서 주방으로 간다. '진작 그러지 못하고...' 그때부터 나도 안 되겠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하여 그 후부터는 밥상을 차릴 때에 "지금 상 차려요. 수저와 물 좀 놔주지요"하면 남편은 무거운 몸을 일으켜 마지못해 상 차리는 것을 도와주곤 했다. 그런데 남자들이 다 그런지, 내 남편만 그런지 알 수 없는 일이지만 그 간단한 일조차 잊어 버리고 가만히 있을 때가 태반이다. 나도 일일이 잔소리하기 가 정말 싫어 그냥 넘어갈 때가 더 많다.
그런데 그 친구의 말을 듣고 보니 수저 놓는 사소한 일이라도 꾸준히 하는 습관이 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막말로 내가 밥을 해달라는 것도 아니고 설거지를 해달라는 것 도 아닌데 왜 그게 그렇게 안 될까? 참 알 수 없는 일이다.
밥통 뚜껑도 못 연다는 형부 얼마 전 만났던 언니의 푸념도 생각났다. 형부는 고등학교 교사로 재직하다가 5년 전 퇴직을 했다. 형부도 친구 남편처럼 밥 한 번 챙겨먹지 않는 사람이다. 언니가 병원에 갈 일이 있어 병원에 가기 전에 냉장고에 꺼내 먹기 좋게 반찬을 담아놓고 여기 있다고 가르쳐 주고, 국은 여기에 있고 등등 자세히 가르쳐 주었단다. 그런데 "밥통 뚜껑은 어떻게 열지?"하고 물어 기가 막혔다고 한다.
그 얘기를 듣고 나도 기가 막혀서 "아무리 그래도 그럴 리가, 나이가 몇 살인데 밥통 뚜껑을 못 열어? 그건 그동안 언니가 너무 잘 해줘서 그랬거나 아예 밥 차려 먹기 싫어서 그런 거야"했다. 그랬더니 언니가 이렇게 말했다.
"아니야. 얘, 몇 년 전인가 어느 드라마에서 그런 장면이 나왔었잖아. 그거 전부 실제로 일어나는 일들이야. 하루 세끼 챙겨주는 것이 보통일이 아니다. 나 혼자 있으면 찬밥이면 찬밥, 밥 없으면 라면으로 대충 먹어도 될 일을 남편이 있으면 식탁에 백반정식으로 꼭꼭 차려 주어야 하잖아."하루에 한 끼만이라도 해방되고 싶다는 언니의 말이 안쓰러웠다.
"언니, 그러게 우스개 소리로 그런 말도 있잖아. 하루에 한 번도 안 먹으면 영식님, 한 끼만 먹으면 일식이 두 끼 먹으면 두식이, 세 번 다 먹으면 삼식이란 말."아는 말이지만 언니가 박장대소를 터트린다.
아내들도 퇴직한 남편들의 고충을 잘 안다. 50~60대의 남자들이 주방하고 친하게 지내는 세대가 결코 아니라는 것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렇지만 주방 살림을 도맡아서 해달라는 것도 절대 아니다. 다만 아내들이 잠시 외출했을 때에 한 끼의 끼니를 해결하는 정도로도 아내들은 아주 고맙게 생각한다.
아내들도 나이 먹으면 귀찮고 기운 빠져 힘들고 지칠 때가 많다. 그럴 때 아주 사소한 식탁 차리기라도 남편이 도와주면서 함께 하자는 것이다. 그러면 작지만 따뜻한 대화로 새로운 시작이 될 수도 있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