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최근 많은 노동자들의 심금을 울린 드라마가 있었다. 바로 윤태호 작가의 원작을 바탕으로 한 <미생>이다. 종합상사라는 대기업에서 계약직인 장그래도 정규직인 안영이, 장백기, 한석율도 신입사원들은 하루 종일 뛰어다닌다. 그들의 상사인 김대리도, 철강팀의 우수사원 강대리도 한 귀에 블루투스를 꽂고 통화하면서 여기저기 분주하게 움직인다.

제대로 된 음식보다 햄버거로 점심을 때우고, 외국 거래처의 시간에 맞춰 낮이고 밤이고 메일을 확인하고 국제전화를 한다. 간간이 회사 옥상에 올라가 담배 한 대, 커피 한 잔 하며 숨을 돌린다. 영업 사원들의 일상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이 드라마를 마냥 재밌게만 볼 수 없었던 이유는 그들의 모습이 바로 나의, 또는 내 가족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쫓기는 노동의 문제는 노동밀도의 증가를 의미한다. 즉, 같은 시간 일을 하더라도 여유시간이 없이 바쁘게 일해야 하는 상황인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노동자에게는 노동강도의 증가로 읽히고, 사업주에게는 생산성 또는 효율성의 증가로 읽힌다. 노동밀도의 문제는 물리적인 노동시간의 길이가 이미 상당히 단축된 유럽에서 더 중요하게 취급되고 있다.

린 생산방식
본의 '도요타자동차'가 창안한 생산 방식. 기존의 수공업적 생산방식에서 나타나는 원가상승 및 대량 생산 문제의 대안으로, 숙련된 기술자들의 편성과 자동화 기계의 사용으로 적정량의 제품을 생산하는 작업 공정 혁신을 통해 비용은 줄이고 생산성은 높이고자 했다.
유럽연합의 직업안전청(EU-OSHA)에서는 2007년 미래사회의 주요한 심리적 위험요인을 발표하면서 고용계약 형태의 다양화와 고용불안정, 노동자의 고령화, 감정 요구도의 증가, 일-가정 양립의 악화와 함께 노동밀도의 증가(work intensification)를 제시하였다.

이는 린 생산방식이나 모답츠 기법(노동자의 신체동작을 분석하여 작업표준시간을 설정하고, 생산성의 향상을 꾀하는 경영기법) 등과 같은 새로운 경영기법의 확대되면서 더 극심해지고 있다. 노동밀도의 증가로 노동자는 매우 빠른 속도로 일을 해야 되고, 빡빡하게 설정된 마감에 쫓며 일을 완수하는데 늘 시간이 부족하다고 느끼게 된다.

특히, 조직 내에서의 경쟁이 격화되고 서비스업이 증가하면서 자동화, 목표 생산량에 대한 압박, 상사에 의한 위계적 긴장, 다른 동료와의 경쟁과 같은 수평적 경쟁, 고객의 요구에 즉각 응답하기 위한 것과 관련한 요구도 증가 등이 직접적으로 노동밀도의 증가를 유발한다.

실제로 한국에서 약 5만 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취업자 근로환경조사 결과에 따르면, 임금노동자의 직종별 노동강도는 속도와 마감의 측면에서 약간 다르게 나타나지만 생산직에서 상대적으로 높았다. 또한, 서비스업에서 매우 빠른 속도로 일을 한다는 응답이 16.8%에 이르는 것은 주목할 만한 부분이다.

쫒기는 노동, 빨라진 일의 속도는 노동자들의 건강에도 악영향을 미친다. 직무 스트레스를 증가시키며, 작업 반복성이 증가하기 때문에 근골격계 질환의 위험도 높아질 수 있다. 쉴 틈이 없이 일하다 보니 적절한 휴식시간을 확보하기 어려워지는 것도 문제이다. 언론이나 포털사이트 같은 곳에서 이런 문제 때문에 불편함을 호소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심심찮게 들을 수 있다.

"할인마트에서 계산원으로 일을 했었다. 최근 아랫배가 좀 이상해 병원에 갔더니 방광염이라는 결과가 나왔다. 그 이유는 너무나 오랫동안 소변을 참는 버릇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그 말을 듣고는 할인마트를 그만뒀다. 대형 할인마트의 계산원들은 항상 용변 걱정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원래 규정은 두 시간마다 쉬도록 되어 있지만 손님이 많아 정신없이 일을 할 때는 화장실에 갈 엄두가 나지 않는다. 그러다보니 적게는 3시간이 보통이고 길게는 네 시간 이상까지 쉬지 않고 일하는 것이 현실이다. 그나마 손님들이 약간 줄면 재주껏 화장실에 다녀오기도 하지만 이마저도 보이지 않는 눈총을 받기 일쑤다. 결국 대부분의 할인마트의 계산원들은 화장실 걱정 때문에 마음 놓고 물도 마실 수 없다."
- 2008년 4월 18일 '할인마트 계산원의 고충' 기사 중

"통신사 고객센터 해지방어 부서에서 일했던 사람입니다. 부서에 따라서 약간씩의 고충은 있습니다만 해지방어 부서의 경우는 들려오는 첫마디가 '해지해주세요'입니다. 그럼 우리는 이 말 저 말 하면서 막는 거죠. 그럼 고객은 아 그냥 빨리 해지나 해주라고 말합니다. 이 욕 저 욕 다 먹게 되겠지요. 근무 면에서는 그런 게 힘듭니다. 또한 화장실도 마음대로 갈 수 없어요. 이건 제가 일했던 곳만의 문제가 아니라 모든 고객센터가 그렇습니다. 빨리빨리 콜을 받아줘야 하기 때문이지요."
- 네이버 지식IN 2014년 8월 7일, '콜센터근무 경험담' 중

열악한 상황은 한국만이 아니다. 노르웨이의 한 은행은 콜센터 직원들의 화장실 이용시간을 하루 8분으로 제한하는 시스템까지 도입해 논란이 일었다는 보도도 있었다. 기사에 따르면 화장실이나 개인적인 시간을 위해 총 8분 이상을 넘지 못하고 이를 넘을 경우에는 경고음이 울리게 했다고 한다.

한편, 제조업의 경우에는 자동화나 모듈화가 진행된 이후 노동강도가 증가해 부담이 더해졌다는 이야기도 있다. 더불어 신설비 도입이 인력감축으로 이어질까 하는 불안감에 직무스트레스가 증가하는 요인으로 작동되는 것도 확인할 수 있다.

"산업이 발달하면 할수록 모듈화가 되는데, 이게 강도가 틀려요. 모듈화가 되면 사람이 어디 서고 어디로 간다 이게 있어야 되는데 무조건 모듈화가 되면 사람을 빼 버리고 그러니 사람이 불안을 느끼죠. 언제 잘릴지 집에 가라 할지 모르니까 그게 불안하죠."

"반자동에서 자동화가 되니까 많이 힘들죠. 생산은 편해졌지만 힘들어졌죠. 장비가 더 늘어났는데 장비관리를 그(예전) 인원으로 해야 하니까."

"옛날에는 파레트 작업도 좀 천천히 했는데, 지금은 자동화되면서 사람이 빨리 움직여야 해요. 기계에서 나오니까. 휴식시간이 정확히 정해지지 못해요. 제품이 밀려나오니 작업해야죠. 남들이 놀 때 그때까지 휴식을 못 취하죠."
- 현대자동차 노동강도 평가와 대안마련을 위한 연구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2005)」 中

경쟁이 심해지고 있는 병원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식사라도 제대로 챙기고 싶다는 간호사들의 바람에서 그들의 노동밀도를 짐작할 수 있다.

"물 먹을 시간도 없어요. 진짜 바쁜 날은 뛰어 다니는데 지금 뛰어다닐 정도는 아니고... 바빠서요. 아무 것도 못하고 그냥 차트 넣을 때랑 입력 넣을 때 이런 거요. 바이탈 그럴 때만 앉아 있지." - 고려대학교병원 노동자의 교대제 개선을 위한 노동조건 실태조사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2009)」 中

 임금노동자의 직종별 노동강도 그래프
 임금노동자의 직종별 노동강도 그래프
ⓒ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관련사진보기


노동자의 일손은 점점 빨라지고, 여유시간과 휴식시간을 확보하는 것은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다. 점심시간을 줄이거나 식사시간을 이용해 회의를 하는 등 효율을 높이기 위해 다양한 시도가 이루어지고 있는데, 이는 기업 간의 경쟁 격화될수록 더욱 심화될 것이다.

절대적인 노동시간도 길고 IT기술의 발달로 직장과 가정의 경계마저 점점 모호해져 가는 한국사회에서 노동밀도의 증가현상은 '노동자들의 소진'이라는 결과로 이어질 것이다. 노동자들의 자연적 필요를 반영할 수 있는 노동조직의 설계가 노동시간과 함께 고민되어야 하는 이유이다.

즐겨보는 예능 프로그램 <무한도전>에서 최근 '극한 알바'라는 주제로 방송을 했다. 유재석과 차승원이 탄광에 간 것이 이슈가 되었지만 나는 '130통'을 선택한 정준하가 과연 어떤 하루를 보낼지 더 관심이 갔다. '콜센터에서 전화 130통을 받아내려면 화장실 갈 정신도 없을텐데, 그 와중에 그는 개그맨으로서 웃음포인트까지 챙기며 하루 알바를 마칠 수 있을까?'라는 점에서 말이다. 하루 종일 뛰어다니고 전화를 받는 우리 주변의 장그래와 강대리는 어떤 생각을 하면서 하루를 마감할까? 내 옆을 바쁘게 스쳐 지나가는 노동자들에게 안녕하신지 묻고 싶은 요즈음이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 해미 님은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노동시간센터(준)의 회원입니다. 또한 이 기사는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에서 발간하는 기관지<일터>에도 연재한 글입니다.



#극한 알바#장그래#장시간 노동#노동시간
댓글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는 모든 노동자의 건강하게 일할 권리와 안녕한 삶을 쟁취하기 위해 활동하는 단체입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