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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대통령 선거가 공화당 도널드 트럼프 대 민주당 힐러리 로담 클린턴의 대결로 굳어가는 양상이다. 두 사람 모두 의외다. 공화당 쪽에서 볼 때 트럼프가 대세가 되리라 점 친 이들은 많지 않았다. 민주당도 마찬가지다. 무난히 대세로 떠오를 것만 같았던 힐러리가 예상 밖의 고전을 했다. 힐러리의 간담을 서늘하게 한 주인공은 바로 만 74세의 버몬트 주 상원의원 버니 샌더스였다.

아마 그 어느 누구도 일흔이 넘은 정치인이 같은 당 소속 유력 대통령 후보의 아성을 위협할 것으로 내다보지 못했을 것이다. 샌더스가 출마를 결심한 시점은 지난해 4월이었다. 출마는 자신의 의지가 아니었다. 진보진영에서 아무도 나서지 않자 마지못해 나선 것이다. 그런데 뚜껑을 열어보니 샌더스는 돌풍의 주역으로 떠올랐다. 비단 미국뿐만 아니라 세계 각국이 샌더스 돌풍을 예의주시하고 나섰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버니 샌더스를 주제로 한 카툰집 <버니>
 버니 샌더스를 주제로 한 카툰집 <버니>
ⓒ 모던타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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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저명한 시사만화가이자 칼럼니스트 테드 롤의 책 <버니>(원제 : Bernie)는 그 해답을 던져준다. 무엇보다 이 책은 카툰으로 구성돼 있어 금방 읽힌다. 그러나 그냥 흥미 위주의 만화책 정도로 이해하는 건 금물이다. 이 책은 여느 사회과학 서적을 방불케 할 만큼 탄탄한 구성을 자랑한다.

이 책의 모두 7개의 장으로 구성돼 있는 데, 저자는 1972년 대통령 선거에서부터 이야기를 풀어 나간다. 당시 현직 대통령이던 공화당의 닉슨은 민주당 맥거번 후보를 누르고 재선에 성공한다. 민주당은 패닉에 빠졌다. 닉슨은 베트남전에 발목잡혀 어려움을 겪고 있었고, 이에 민주당은 낙승을 예상했다. 그러나 결과는 패배, 그것도 역대 가장 큰 표차의 패배였다. 이때를 기점으로 민주당은 우클릭으로 선회하기 시작했다.

미국 정치사에서 전통적으로 공화당은 백인 부유층을, 민주당은 진보세력 및 흑인 등 비주류를 대변해 왔다. 그러나 1972년 대선 패배를 계기로 민주당은 리버럴리스트, 진보주의자, 사회주의자들을 당에서 배제하기 시작했다. 우클릭하기 시작한 민주당은 공화당과 별반 차이가 없어져 버렸다. 차이가 있다면 자본에 굴복하는 시간 뿐이었다. 저자는 민주당의 변화를 이렇게 요약했다.

"민주당 대선후보 연설에서 빈곤, 환경, 인종차별, 남녀평등, 불평등 심화 같은 진보적 의제는 사라졌다. 주류 언론도 이런 이슈를 무시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양당 정치는 중도 우파와 우파간의 논쟁이 되었다." - 본문 50쪽

민주당과 공화당의 차이는 자본에 무릎 꿇는 속도

사실 민주당과 공화당의 '동기화'는 새삼스럽지 않다. 미국의 지성들은 이 같은 현상에 줄기차게 경고음을 내보냈다. 미국 소비자운동의 대부 랠프 네이더는 "민주당과 공화당의 유일한 차이점은 대기업이 휘두른 주먹에 무릎을 꿇는 속도"라고 비판했다.

반항적 다큐멘터리 영화제작자 마이클 무어는 그의 책 <멍청한 백인들>에서 "같은 일을 하느니 민주당은 공화당과 합당하라"고 직격탄을 날렸다. 민주당의 중도보수화는 자본권력의 확대를 불러왔다. 미국의 문화역사학자 모리스 버만은 그의 책 <미국문화의 몰락>에서 이렇게 적었다.

"1962년에는 케네디 대통령이 대규모 철강회사인 US스틸의 가격인상 정책에 반발한 적이 있었는데 결국 이 회사는 가격 인상 계획을 철회했다. 그러나 지금은 내로라하는 대기업 CEO들이 백악관에 초청돼 저녁식사를 하는게 더 쉬워졌을 정도로 입장이 뒤바뀌게 됐다."

그럼에도 민주당의 우클릭은 멈출줄 몰랐다. 1972년 이후 집권한 대통령 가운데 지미 카터, 빌 클린턴, 버락 오바마가 민주당 소속이다. 그러나 이들은 민주당 간판이 무색하게 정부를 '보수적으로' 운영했다. 한편 1990년대로 접어들면서 리버럴리즘은 종말을 고하기에 이른다.

이 지점에서 의문이 생긴다. <버니>는 버니 샌더스를 주제로한 책인데 왜 곧장 주인공을 등장시키지 않고 장황하게 민주당의 변천사를 되짚어 보았을까? 바로 버니 샌더스 돌풍은 민주당의 우클릭으로 사실상 주류 정치판에서 배제된 진보주의의 귀환을 알리는 신호탄이기 때문이다. 이 책 <버니>는 이렇게 버니 샌더스 돌풍을 미국 정치사의 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다. 바로 이 점이 이 책의 미덕이자 강점이다.

좀 더 들어가 보자. 미국은 세계 최강의 군사력을 자랑한다.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를 차례로 침공하는가 하면, 세계 도처에 군사 기지를 운영하며 미국의 이해를 관철시킨다. 그러나 정작 보통의 미국인들은 무방비 상태다. 저자인 테드 롤의 말이다.

"미국은 가난한 나라가 아니다. 전쟁을 벌일 돈은 항상 있다. (중략) 그럼에도 보통 사람들을 위한 돈은 없다. 실업수당은 몇 개월 만에 바닥을 드러낸다. 이런 쥐꼬리만한 보조금이 바닥난 뒤에는 각자도생해야 한다. 일자리가 없거나 가난하더라도 개인 책임이다." - 본문 79쪽

버니 샌더스는 덴마크, 노르웨이, 스웨덴의 사회 민주주의를 주창해 왔다. 그가 그리는 이상적인 정부는 국민들의 삶, 특히 도움이 필요한 국민들의 삶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정부다. 각자도생으로 내몰린 보통의 미국인들은 버니 샌더스에게서 희망을 보기 시작했다. 특히 2000년을 전후해 성인이 된 '밀레니엄 세대'가 그렇다.

앞선 세대의 경우 비교적 적은 비용으로 공부할 수 있었고, 대학을 마치면 무난히 취업이 가능했다. 그러나 밀레니엄 세대는 다르다. 대학을 나와도 갈 곳이 없다. 대출 받은 학자금 부담도 만만치 않다. 2015년 기준 대학 졸업생의 빚이 평균 3만5000달러에 이른다.

청년 실업, 각자도생에 허덕이는 밀레니엄 세대들은 샌더스에게 열광했다. 힐러리가 샌더스에게 고전을 면치 못한 이유도 바로 이 대목에서 찾을 수 있다. 힐러리는 '미국 헌정 사상 최초의 여성 대통령'이란 슬로건만 내세웠지 구체적인 콘텐츠는 제시하지 않았다. 샌더스는 달랐다. 그의 외침을 들어보자.

"오늘날 우리는 미국의 위대한 중산층이 사라지는 것을 목격하고 있습니다. 한편 새로운 소득의 대부분과 새로운 부의 전부를 상위 1%가 차지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소수의 억만장자가 아닌 노동자를 위한 경제가 필요합니다."

"아이들 중 22%가 가난에 허덕이고 노인들이 연 1만 3,000달러의 사회보장연금으로 생활하는 상황은 말이 안됩니다. 헛소리죠.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중산층이 붕괴된 지금, 우리 국민들은 더 이상 기득권에 의한 정치나 기득권을 위한 경제가 필요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미국을 바꾸기 위해, 그리고 거액의 선거자금 후원자가 아닌 노동자를 대변하는 정부를 갖기 위해서는 정치혁명이 필요합니다."

애석하게도 샌더스 돌풍은 여기까지인 것 같다. 현지시간으로 지난 15일 클린턴은 플로리다, 노스캐롤라이나, 오하이오, 일리노이, 미주리주 등 5곳에서 열린 '미니 슈퍼화요일' 민주당 경선에서 전승을 거뒀다. 사실상 대세를 굳혔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샌더스는 지지 않았다. 그는 70년대 이후 설 자리를 잃어버린 민주당 진보진영에게 새로운 활력을 불어 넣었다. 또 기성정치가 말하지 않는 의제를 거침없이 토해내며 내일의 희망을 잃어버린 밀레니엄 세대를 일깨웠다.

샌더스는 제임스 매디슨 고등학교 재학 시절 학생회장 선거에 출마했지만 3등에 그쳤다. 그러나 그때도 지지 않았다. 당선자가 그가 내세운 즉 한국전쟁 고아 돕기 기금 모금 공약을 받아들인 것이다. 이번 미국 대선에서 샌더스는 완주를 약속했다. 클린턴이 그의 의제를 받아들일까? 흥미로운 관전 포인트가 아닐 수 없다.

끝으로 샌더스의 연설 한 대목을 인용하고자 한다. 이제 인용할 연설은 지금 한국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저 이 말만 기억하자. '힘을 합치자, 그러면 이긴다!'

"저는 백만장자들의 어젠다를 믿지 않습니다. 그들의 돈을 원하는 게 아닙니다. 돈은 다 가지라고 하세요. 그들이 권력도 다 가질 수 있겠죠. 하지만 우리가 힘을 합치면 이깁니다."


버니 - 카툰으로 만나는 진짜 정치인 버니 샌더스

테드 롤 지음, 박수민 옮김, 모던타임스(2016)


#버니 샌더스#테드 롤#클린턴#밀레니엄 세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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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이런 제목 어때요?>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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