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마 탄 왕자 캐릭터가 없는 드라마 <쌈,마이웨이>.

백마 탄 왕자 캐릭터가 없는 드라마 <쌈,마이웨이>. ⓒ KBS


드라마 <쌈, 마이웨이>는 로맨틱 코미디다. 남녀 주인공들이 사랑을 쌓아나가는 과정을 달콤하고 쌉쌀하게 표현한다. 뻔해 보이지만 이 로맨틱 코미디가 다른 로맨스와 다른 점은, 주인공 중 어느 누구도 완벽하지 않기 때문이다. 여자 주인공과 시청자들을 홀리기 위해 나타난 백마 탄 왕자님(이라고 쓰고 재벌이라 읽는다)은 이 드라마에 없다. 그렇다고 출중한 능력을 갖춘 실장님도 없다. 엄청난 재능을 가진 천재도 없다. 그런데 왜 이렇게 가슴을 들었다 놨다 하는 것일까.

이 드라마의 남자 주인공 고동만(박서준 분)과 여자 주인공 최애라(김지원 분)는 어렸을 때부터 친구다. 욕설을 비롯해 할 말 못할 말 다 하는 편한 사이인 동시에 서로가 살아온 인생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그런 그들이 모르는 것은, 자신들의 마음이다. 왜 서로를 보면 갑자기 가슴이 떨리는지, 왜 서로가 그렇게 애틋하고 걱정되는지 그들은 그들의 감정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다.

이력서에 쓰지 못하는 청춘의 삶

<쌈, 마이웨이>는 '남녀 사이에는 친구가 없다'는 명제를 활용해 오랜 친구였던 두 사람이 점차 자신의 마음을 깨달아가는 과정을 톡톡 튀는 젊은 터치로 보여준다. 그들이 서로에게 조금씩 다가가고 서로를 위해 작은 배려와 관심을 보이는 것은 어딘지 모르게 특별하다. 사실 내용을 따져 보자면 친구였던 두 사람이 연인의 감정에 가까워지는 지극히 단순한 내용인데 이 드라마는 거기에 청춘에 대한 시선을 끼워 넣는다. 그 시선은 이 드라마가 보여주는 연애의 판타지 속에서도 현실에 발을 딛게 만드는 특별한 분위기를 만든다.

<쌈 마이웨이> 8회에서 최애라는 평생 꿈이었던 아나운서 공채 면접을 보게 된다. 이미 29살로 아나운서를 준비하기엔 늦었지만, 서류 합격만으로도 애라의 마음은 부풀어 오른다. 옷도 사고 머리도 바꾸며 면접을 준비한 애라는 긴장된 가슴을 누르기 위해 청심환까지 먹어가며 면접장에 선다. 그러나 면접이 끝날 때까지 면접관 누구도 애라에게 관심을 주지 않는다. "질문 없냐"는 마지막 면접관의 말에 애라는 "저한테 질문을 안 주셨는데요" 라고 물어봐야 하는 처지다.

 드라마는 현실에 발을 디딘 캐릭터들로 공감을 이끌어 낸다.

드라마는 현실에 발을 디딘 캐릭터들로 공감을 이끌어 낸다. ⓒ KBS


한 면접관은 차갑게 말한다. "여긴 다 시간이 금인 사람들이라서. 우리 시간 뺏고 싶으면 25번 시간을 먼저 채워 왔어야지. 저 친구들이 유학가고 대학원가고 해외 봉사가고 그럴 때, 25번은 뭐했어요? 열정은 혈기가 아니라 스펙으로 증명하는 거죠" 라고. 면접관들은 최애라라는 이름 석 자를 부르지 않고 25번이라는 면접 번호를 부른다. 그들에게 애라는 번호로 매겨진 평가 대상일 뿐이다.

면접관의 말이 틀린 말은 아니다. 아나운서가 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초라한 대학 졸업장과 아르바이트 경험, 혹은 백화점 직원으로 일한 경력 따위가 아니다. 그들은 이력서에서 조금이라도 더 특별한 것을 보기를 기대한다. 수많은 지원자들 사이에서 발군의 한 명을 뽑으려면 그만큼 합리적인 평가기준도 없다. "저는, 돈 벌었습니다"라고 대답하는 애라의 한 마디는 가슴 그래서 아프게 다가온다.

생각해 보면 유학, 대학원, 해외 봉사 모두 누군가에는 사치다. 당장 학자금 대출을 갚고 생활비를 벌어야 하는 상황에 놓인 청춘에게 '너는 왜 유학도, 대학원도 봉사도 하지 않았니'라고 묻는 것만큼 불합리한 일도 없다. 합리적인 평가를 가장한 불합리함에 그러나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다. 적어도 면접장에서 만큼은 '스펙'을 쌓지 못한 것은 핑계에 불과하니까.

그런데 생각해보면 돈을 벌었다는 것은 얼마나 대단한 일인가. 유학이나 대학원을 가려면 혼자의 힘으로는 어렵다. 스펙을 쌓는 일은 누군가의,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부유한 집안의 도움이 있을 때 훨씬 더 유리하다. 외국에 나가는 것도, 공부를 더 하는 것도 모두 큰돈이 들어간다. 남들은 그 돈을 쓸 때, 애라는 열심히 돈을 벌었다. 돈을 벌었다는 애라의 말에 황당한 표정을 짓는 면접관들은 '돈을 버는 일에 대한 숭고함'을 전혀 이해하고 있지 못하다. 그저 화려한 이력을 볼 뿐이고 그 이력을 가능하게 만든 것이 숨겨진 집안의 스펙이라는 것 따위는 생각하려 하지 않는다.

'우리는 항상 시간이 없었다. 남보다 일찍 일어나고 남보다 늦게 자는데도 시간이 없었다. 누구보다 빡세게 살았는데, 개뿔도 모르는 이력서 나부랭이가 꼭 내 모든 시간을 아는 척 하는 것 같아서 분해서, 짜증나서…'

애라의 내레이션은 이 시대 청춘들의 아픔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가난한 청춘은 원하는 꿈을 골라 꿀 수도 없다. 그런 꿈을 꾸는 사람에게 돌아오는 것은 "그동안 뭐 했냐"는 차가운 일갈  뿐이기 때문이다. 아나운서가 되는 것은 그만큼 뒤에서 지원을 해줄 만큼의 능력이 있는 집안의 사람들이 절대다수다. 이력서 한 줄도 제대로 쓸 수 없는 애라의 아픔은 단순히 게으름으로 규정할 수 없는, 너무 불합리한 출발선에 대한 것이다.

판타지의 극대화 

 주인공들이 처한 현실에서 판타지성을 극대화 시키는 전략이 있다.

주인공들이 처한 현실에서 판타지성을 극대화 시키는 전략이 있다. ⓒ kbs


이런 현실이 이 드라마에는 전반적으로 녹아 있다. 남자 주인공 고동만 역시, 태권도 국가 대표로 뽑힐 가능성이 높은 유망주였으나, 태권도를 포기해야 하는 처지에 놓인다. 불합리한 상황 속에서 꿈을 잃게 되는 남자 주인공은 그동안 우리가 숱하게 목격했던 '범접 불가 재벌 2세'와는 그 결부터 다르다. 그러나 뒤늦게 격투기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게 되는 남자 주인공에게 아낌없는 응원을 보낼 수 있는 것은, 그처럼 꿈을 포기하고 별 볼일 없이 살아가는 사람도 꿈을 이룰 수 있다는 희망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아픈 청춘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쌈, 마이웨이>는 청춘의 현실을 드라마에 녹였다. 그러나 로맨스만큼은 철저하게 판타지다. 이 양극단의 두 분위기를 통해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역시 현실보다는 판타지다. 드라마는 철저히 판타지여야 하고, 그렇기 때문에 시청자를 끌어 들일 수 있다.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지만 경기를 마치고 동만이 걱정돼 울고 있는 애라에게 다가가 "우는 것도 예쁘다"고 말하는 남자 주인공의 한 마디는 별 거 아닌 것 같아도 엄청난 울림이 있다. 그만큼 설레는 포인트에 대한 통찰력이 있다는 얘기다.

마냥 구질구질하고 처절한 것이 아니라, 현실 속에서도 서로에게 힘이 되며 마음을 주고받는 친구인 듯 연인 같은 두 사람의 관계는 김지원과 박서준이라는 예쁘고 멋있는 배우들에 의해 달콤한 환상으로 다시 태어난다. 그리고 그 환상은 현실이라는 무게와 적절하게 결합되어 무게 중심을 잘 잡는다. 두 사람이 처한 현실에 마음을 아프게 만들지만, 그 현실이 있기에 두 사람의 연애는 훨씬 더 가슴을 붕 뜨게 만든다.

이 이야기 속에서 시청자들은 그들에 대한 애정을 느끼고, 그들의 로맨스를 지지하게 된다. 사랑스러운 커플들의 로맨스는 누구에게나 판타지지만, 그 판타지를 표현하기 위해 구름위에 떠 있는 비현실적인 왕자와 공주가 아니라 현실 세계의 흙 수저들을 이용해 진정성을 확보한 <쌈, 마이웨이>의 영민함이 돋보이는 것이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우동균 시민기자의 개인 블로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쌈마이웨이 박서준 김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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