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완경기 이전의 여성들은 꽤 많은 양의 피를 한 달에 한 번, 혹은 더 많이 흘리고 있다. 과학 기술의 발전으로 인해 '여성들이 더 이상 생리를 하지 않는 미래 사회'를 유쾌하게 그린 코니 윌리스의 SF소설집 <여왕마저도>에서는 이를 마치 신기하다는 양 묘사하고 있다.

"옛날에는 모든 여성들이 생리를 했단다. 심지어 여왕마저도!"

그 새삼스러운 사실에 놀라며 고개를 끄덕인다. 맞다. 현실에서는 '여왕마저도' 생리를 한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우리는 그 사실을 공개적으로 이야기하기를 꺼린다. 생리하는 날을 말할 때도 '그날' 혹은 '마법' 등의 단어로 우회해 표현한다.

18일 개봉한 영화 <피의 연대기>는 '영문도 모른 채 비밀스럽게 다뤄야만 했던' 여성의 생리를 주요하게 다룬 국내 최초의 다큐멘터리다. 생리대만이 아니라 탐폰이나 생리컵 등의 대안 생리용품들부터 과거 여성들이 '흘리는 피를 처리하기 위해' 어떤 방법들을 강구했는지를 소개한다. 또 수많은 여성 출연자들과 함께 '피 흘리는 경험이 어떤 것인지' 이야기를 나누고 공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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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피의 연대기> 중 한 장면

영화 <피의 연대기> 중 한 장면. 영화 <피의 연대기>는 여성의 생리를 주요하게 다룬 국내 최초의 다큐멘터리다. 생리대만이 아니라 탐폰이나 생리컵 등의 대안 생리용품들부터 과거 여성들이 '흘리는 피를 처리하기 위해' 어떤 방법들을 강구했는지를 소개한다. ⓒ KT&G 상상마당


<피의 연대기>를 연출하고 직접 출연한 김보람 감독은 단편영화조차 연출한 경험이 없는 신인 감독이다. 그는 영화 속에서 직접 '고프로 카메라'를 이마에 달고 생리컵에 담긴 피를 세면대에 헹구는 과정을 그대로 보여준다.

'초짜 연출자'인 김보람 감독은 '이 영화를 보러 극장에 오는 사람은 없을 거다'라는 투자자의 말을 들으면서도 대체 왜 '생리 다큐'를 찍었을까. 지난 12일 서울 홍대 인근서 그를 만났다. 영화를 작업할 돈이 모이지 않아 자금이 모이기를 기다렸다가 촬영을 하고 또 기다리는 과정이 약 2년여 반복됐다. 이런 과정 끝에 <피의 연대기>는 2018년이 되어서야 마침내 세상에 나올 수 있었다.

"우리가 흘리는 피에 대한 다큐, 이거 너무 재밌는데?"

김보람 감독은 지난 2015년 가을 네덜란드 친구 샬롯에게 생리대를 담는 파우치를 선물했다가 샬롯이 초경 때부터 생리대 대신 탐폰을 사용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 해프닝은 <피의 연대기>를 작업하는 기폭제가 됐다.

'우리는 모두 똑같이 피를 흘리는데 왜 다른 생리용품을 쓰고 있는 걸까?'

 다큐멘터리 <피의 연대기>의 김보람 감독이 12일 오후 서울 서교동 KT&G 상상마당에서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다큐멘터리 <피의 연대기>의 김보람 감독이 12일 오후 서울 서교동 KT&G 상상마당에서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 이정민


- 2015년이면 한국에서 여성주의 이슈가 그리 대중적이지 않을 때이다. 그 당시 생리에 대한 이야기를 영화화해야 겠다는 생각을 했다는 게 신기한데.
"그땐 하나의 '재밌는 이야기'로 접근을 했다. 이거 너무 재밌는데? 왜 우리는 피를 (다큐 소재로) 한 번도 생각 못 해봤지? 아무도 안 한 이야기니까 내가 이야기를 할 만한 구석이 있지 않을까 생각했고 구글링(구글 검색)을 하다가 2015년에 미국에서 생리와 관련해 여러 논의가 있었다는 걸 알게 됐다.

하지만 영화 연출 경력이 없고 내가 영화를 직접 만들 자신감이 없어 처음에는 여성 감독님들을 알아보고 다녔다. (웃음) 그런데 여성 감독님들이 이미 자기 작품을 많이 하고 계셨다. 그 당시에는 내가 하고 싶은데 직접 나설 용기는 없고 그래서 다소 방어적인 형태로 나왔던 것 같다. 그러다가 내가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 영화를 한 번도 만들어본 일 없는 사람이 그 경험을 영화로 만들어야 겠다는 생각을 한다는 게 독특하다. (웃음)
"고등학교 때부터 소설을 썼다. 예고 문학창작과를 나와 소설 특기자로 대학에 진학했다. 원래 소설가가 꿈이었는데 등단을 못 했다. 직업을 구하지 않고는 계속 소설을 쓰지 못하는 상황에서 취직을 하게 됐다. 작은 영화 제작사였는데 시나리오 개발팀에서 일을 했고 다큐멘터리 피디로도 일했다. (김보람 감독은 영화 <저수지 게임>에 프로듀서로 참여하기도 했다 : 기자 주) 흘리는 피에 대한 다큐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한 동기가 뭐였을까 요즘 생각하고 있는데 여전히 내 안에 뭔가를 만들고 싶은 열망? 요구가 있는 것 같다.

오랜 시간 풀 죽어있고 포기한 상태여서 그런 욕구가 있다고 느끼지 못했지만 그것이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기폭제가 됐고 '이제는 뭔가를 완성하고 싶다'는 동력이 됐다는 걸 알게 됐다. 원래 창작자로서 살고 싶은 욕망이 있었지만 '안 될 것 같다'는 생각 때문에 자포자기했는데 <피의 연대기>가 계기가 된 게 아닐까. 사실 나는 페미니즘 활동을 하던 사람도 아니고 그리 관심이 많던 사람도 아닌데 이렇게 하게 되기까지는 그런 열망이 있었다고 본다."

- 영화를 보면 직접 출연까지 한다. 굉장히 적극적일 줄 알았는데? (웃음) 
"그렇지 않았다. 사실 내가 등장하는 것도 원래 예정에 없었다. 다른 여성을 섭외해 촬영을 하려 했는데 '이 사람의 삶을 책임질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몇 년 후에는 자기가 이 영화에 등장한 걸 후회할 수도 있고, 조리돌림 당할 수도 있고.

또 취재를 내가 하다 보니까 다른 사람의 입을 빌려 말하기에 자연스럽지 않은 요소들이 있어서 최종적으로 내가 나가는 게 낫겠다는 결정이 났다. 1년 넘게 주인공도 없이 촬영하고 인터뷰해 사실 아쉬운 점이 많다. (웃음) 애초에 기획 단계부터 내가 나오는 걸 염두에 뒀다면 좀 더 영화의 완성도를 높일 수도 있었을 텐데."

- 그렇다면 김보람 감독의 얼굴이 노출되는 것 또한 괜찮은 일이 아닐 수도 있을 텐데?
"이건 내가 좋아서 만든 영화니까. 어떤 일을 당하더라도 나는 만든 사람이고 그래서 괜찮을 거라 생각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내 친구가 '사람들 생각만큼 이 영화 그렇게 많이 안 볼 거라고 관심 없을 거라고' (웃음) 그랬다. 사실 이렇게까지 큰 관심을 받을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투자받으러 가도 '생리 다큐는 아무리 재밌어도 극장 가서 안 본다'는 의견이 많았거든. 그래서 그 친구 말을 믿었는데. (웃음)"

"초경은 축하해주면서도 이후 생리를 숨겨야 한다는 인식, 이중적"

 영화 <피의 연대기> 중 한 장면.

영화 <피의 연대기> 중 한 장면. ⓒ KT&G 상상마당


- 김보람 감독은 생리를 하는 것에 대해 불만을 많이 갖고 있었나?
"특별히 불만을 가진 사람은 아니었다. 그런데 입시랑 취업을 앞두고 6개월 동안 하루도 쉬지 않고 생리를 했던 적이 있다. 자궁 내벽이 스트레스 때문에 자극을 받아 그랬다는 거였다. 그러다가 한 유럽 친구로부터 자기는 생리를 18년째 하지 않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 '그게 말이 되냐'고 그랬는데 자궁 내 피임장치를 18살이 되던 해에 넣었다고 한다. 성인이 되고 섹스를 할 기회가 있을 거니까 자기 자신을 보호할 방법을 찾고 싶어 주치의랑 상담을 거친 후 자궁 내 피임술을 받았다는 거다. 그게 T자형 막대를 자궁에 넣는 거라고 한다.

처음에는 경악을 했다. '너만 이상한 거지?' 했는데 유럽 여자들은 많이 받는다고 했다. 그 자리에 계시던 남성 감독님께서 '여자로서 사는 게 이렇게 빡센 건 줄 몰랐다'고 (웃음) 하시더라. 나도 몰랐다! 여자로 사는 게 이렇게 힘든 줄. 생각해보면 여자들은 흐르는 피를 처리하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들이고 있었고 나도 그걸 처음으로 인지를 하게 된 거다. 그전까지는 너무 당연한 거라고 생각했는데. '내 몸인데 내가 이렇게 생각하지 않고 살았다니'부터 '다들 그러지 않을까 나만 그럴까' 하는 의문도 들었고."

- 그런데 지금 말씀해주시는 것에 비해 영화는 상당히 가벼운 느낌으로 이루어져 있다. 애니메이션이나 음악도 아기자기하고 소소한 것들로 구성돼있는데. 의도를 한 건가?
"그렇다. 제 1목표가 '긍정적인 느낌을 주자'는 것이었다. 편하고 쉽고 그러면서 정보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게. '누가 이렇게 한다는데 우리도 이렇게 해야 한다'는 것도 아니고 '여자들은 엄청 힘들어'라고 말하는 것도 아니고. 그저 '이런 경험들이 있는데 한 번도 말해지지 않았고, 우리는 몰랐지만 다른 방법들이 있는데 알아보자!'라는. 생리가 폭넓게 이야기되지 않은 이유에는 '공동 경험의 부재'도 있다. 영화관에 와서 모르는 타인과 앉아 그들의 숨과 반응을 느끼면서 즐길 수 있었으면 했다."

- 영화를 보면서 조금 놀랐던 부분 중 하나가 초경을 축하해주는 장면이었다. 외식을 하거나 케이크를 먹거나. 초경을 하면 다 그래야 하나? 그런 생각도 들었다.
"나도 그런 경험이 없는데 영화에 나오신 분들 중에 어떤 분은 초경을 한 날 가족들끼리 외식을 했다고 한다. 중학교에 촬영을 하러 갔는데 요즘은 초경 파티를 해주고 목걸이를 사준다고 한다. 남자 중학생들도 누나나 동생에게 축하 파티를 해주는 걸 보고 이미 다 알고 있었다. 그런데 초경을 엄청 떠들썩하게 축하해주고 그다음부터 생리를 알아서 해야 하고 갑자기 숨겨야 하는 무엇이 된다는 게 이중적이라 생각했다. 엄청 축하해줬으면 매달 엄청 기분이 좋아야 하는데 (웃음) 또 그렇진 않고."

"내 몸을 더 잘 알았다면 20대를 행복하게 살 수 있었을 텐데"

 영화 <피의 연대기> 중 한 장면

영화 <피의 연대기> 중 한 장면 ⓒ KT&G 상상마당


- 생리컵 후기 등을 소개하는 해외 유튜버들도 만났다. 영화에 소개되지 않은 흥미로운 이야기가 있었나.
"브리라는 영국 소녀를 촬영하러 갔을 때였다. 지금은 스무 살이 됐지만 10대 때부터 유튜브에 나와 유명해졌다고 한다. 그 당시 영국에 난민이 많이 들어올 때였는데 브리네 집에서 난민 모자(母子)를 무료로 돌보고 있더라. 애들 물건이 엄청 많았는데 모두 난민 아이의 것이었다. 브리는 실제 유튜브 채널을 통해 난민 여성들에게 생리대를 무료로 지급하는 활동도 하고 이미 사업가로 살고 있었다. 내가 10대 때는 내 앞길을 보느라 바빴는데 어렸을 때부터 사회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치면서 살 수 있다는 게 놀라웠다. 많이 반성을 하게 된 계기가 됐다."

-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 김보람 감독은 '내 몸을 좋아하게 됐다'는 고백을 한다. 이 고백이 <피의 연대기>가 도달한 최종적인 목표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내 몸을 스스로 알아갈 기회 없이 외부의 정보가 먼저 들어왔다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어렸을 때부터 이래야 예쁘고 저래야 남자들이 좋아하고. 그래서 나는 내 몸을 좋아하지 않았고 그것이 단순히 내 몸을 싫어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연애에 엄청 영향을 주었다. 어떤 사람과의 관계가 틀어지면 '내 몸이 예쁘지 않아서 그런가'라거나 '내 몸에 만족하지 못했나' 자책을 하게 되고 그러면서 좋지 않은 경험과 선택을 하게 됐다.

페이스북 등 SNS를 보면 가슴성형이나 지방흡입 등의 성형수술 광고가 엄청 많은데 20대 초반부터 스스로 저런 수술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사회가 싫더라. 물론 주변에 성형을 한 사람도 있고 그 과정에 결코 녹록지 않다는 것도 알고 있다. 왜 이렇게까지 해서 우리가 예뻐져야 할까? 그런 생각이 영화를 만들면서 피부로 와닿았고 좀 뜬금없지만 그 고백을 엔딩에 넣고 싶었다. 내 몸을 더 잘 알았다면 20대를 행복하게 살 수 있었을 텐데 그러지 못하고 30대가 된 것이 안타깝다."

- 원래 소설을 쓰고 싶어 하다가 영화를 하게 됐다고 했다. 영화는 소설에 비해 훨씬 예산이 많이 드는 예술이다. 다음 작업으로 염두에 두신 게 있으신가?
"다음 작품으로 하고 싶은 게 많지만 예산을 제대로 확보하기 전까지 시작하지 않을 예정이다. (웃음) 이번에 같이 일했던 사람들에게도 최소한 얼마 정도 있어야 영화를 찍을 수 있는 건지 물어보면서 다녔다. 다음 작품은 계약 단계부터 미안한 마음 없이 작업하고 싶다. <피의 연대기>를 시작하면서 인건비만큼은 '열정페이' 하지 말자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지만 결국 타협할 수밖에 없는 부분이 생겼다. 그래서 <피의 연대기>를 많이 봐주셔야 한다. (웃음)"

 다큐멘터리 <피의 연대기>의 김보람 감독이 12일 오후 서울 서교동 KT&G 상상마당에서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다큐멘터리 <피의 연대기>의 김보람 감독이 12일 오후 서울 서교동 KT&G 상상마당에서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 이정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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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부터 오마이뉴스에서 근무하고 있습니다. 팟캐스트 '말하는 몸'을 만들고, 동명의 책을 함께 썼어요. 제보는 이메일 (alreadyblues@gmail.com)로 주시면 끝까지 읽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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