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엔 미처 몰랐다. 생리가 어떤 느낌인지 들어볼 기회가 없었고, 탐폰이 어떻게 생겼는지 본 적도 없었다. 생리용품이 이렇게 다양하다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누구에게 어떻게 물어봐야 할지도 애매했고, 성교육 시간에도 자세하게 다룬 걸 보기는 어려웠다. 편의점에서 생리대를 구매할 때 내용물이 비치지 않게 '검은 비닐 봉투'에 담아줄 정도로, 사회 전체가 '생리'를 입에 올리는 것이 금기시된 곳이 한국 아니던가.

 영화 <피의 연대기> 중 한 장면

영화 <피의 연대기> 중 한 장면 ⓒ 상상마당


'고대 이집트에선 파피루스로 생리대를 만들었다고? 탐폰엔 끄트머리에 끈이 달려 있었다니?'

영화 <피의 연대기>를 본 후 느낀 감정은 단연 '놀라움'이었다. 내가 모르던 세계가 이리 넓은지 알게 된 계기였다고 할까. 생리를 겪은 사람들의 생각과 체험기, 생리와 생리대의 역사, 생리컵을 제품별로 리뷰한 유튜버도 볼 수 있었다. 생리컵을 넣다가 실패한 이의 경험까지 솔직하게 다룬다. 또한 영화에서는 처녀막에 관한 오해와 순결 이데올로기도 다룬다. 무엇보다도 여성이 감독을 맡고 출연해 화자로 나서서 직접 말하는 방식이 인상적이었다. 결국 여성이 아니면 자세한 부분까지 알 수 없는 소재이니까.

"피가 나올 땐 차라리 느낌이 없는데 (때로는) 덩어리 같은 게 쑤욱!"
"신생아 기저귀가 차라리 양도 많고 더 싸더라."

"나 땐 (생리대라고 할 만한 게) 아무것도 없었다"며 천에 목화솜을 넣고 손바느질을 해서 직접 당시의 생리대 제작 방법을 보여주는 할머니. "처음엔 휴지를 몇 장 겹쳐서 받치고. 조금 묻으면 빼서 버리고. 그걸 하루종일 했지"라고 첫 월경을 회상하는 어머니. 그리고 네덜란드 친구 덕분에 생리컵을 처음 접한 김보람 감독의 경험에 이르기까지. 영화 <피의 연대기>는 생리를 직접 경험한 당사자, 다양한 세대와 문화권의 여성들이 생리와 생리대에 관해 말하는 '고백의 장'이다.

영화는 더 나아가서, 생리대가 흘러내리는 걸 방지하고자 '똑딱이 단추'에 특수 벨트까지 개발하며 지난 수십 년간 '생리대 고정'에 공들인 발전 역사도 다룬다. 최근엔 수영장이나 온천에 가도 새지 않는 '스펀지 탐폰'도 개발됐다고 나온다. 화학 약품으로 만든 생리대를 사용하다가 면 생리대를 쓰니 "냄새도 안 나고 덩어리가 생기는 일도 없었다"며 '그걸 본 후로는 생리가 더러운 것이란 생각도 변했다'는 체험담도 흥미롭다. 그런데, 왜 많은 사람이 어느샌가 생리를 '부끄러운 것'이나 '더러운 것'으로 여기게 된 걸까?

생리를 '혐오스럽고 불경한 것'으로 여기는 관점

 영화 <피의 연대기> 중 한 장면

영화 <피의 연대기> 중 한 장면 ⓒ KT&G 상상마당


"사진에 모자이크 처리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분들은 '혐오스럽다', '이런 걸 왜 기사로 다뤄야 하느냐' 하시는 분도 계셨다"는 <국민일보> 기자의 증언도 나온다. '효진'이라는 이름으로 영화에 등장하는 기자는, 너무 가난해서 '깔창을 생리대'로 쓰는 학생의 실태를 기사로 쓴 바 있다. 학생의 빈곤 문제가 지적된 기사인데도 '생리대를 기사로 다루다니' 같은 반응이 언론사에 전화로 걸려왔다는 건 무얼 보여주는 걸까. 어쩌면 생리에 관한 혐오가 무의식적인 반발로 나타난 건 아닐까?

"여자가
몸에서 피를 흘릴 때, 그것이 여자의 몸에서 흐르는 월경이면 그 여자는 이레 동안 불경하다." - 레위기 15장 19~21절

<피의 연대기>는 과거 성경에서 여성의 생리를 어떻게 봤는지도 다룬다. '중세 기독교가 여성의 신체를 어떻게 해석했나'에 관해 논문을 쓰고 있다는 종교학 공부노동자 민지는 "중세에는 종교와 의학이 분리되지 않았다"고 말한다. 인터뷰 장면 중 민지는 중세 기독교의 해석을 소개하며 "(당시) 생리는 타락의 지표이자 증거"라고 덧붙인다. 성경에서 하와가 원죄를 짓기 전엔 생리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생리가 곧 원죄의 결과'라 봤고, 이는 성경 기록 당시의 기독교가 여성의 몸을 열등하다고 본 관점이 드러나는 부분이라는 것이다.

동양에서도 유사한 사례는 있다. 비슷한 시각이 <피의 연대기>에 소개된 '혈분경'(중국 경전)에서도 엿보인다. 전통 민화 안에는 아이를 안은 여성들이 연못에 들어가 있고, 그 연못이 온통 피로 물든 상태다. 영화에 등장한 역사학자 요후는 '여성이 타고날 때부터 열등한 것으로 봤다"고 말한다. 그림 속 핏빛 연못이 일종의 지옥이고, 죽으면 그 연못에 빠져 핏물을 모두 마셔야 한다고 과거에 믿었다는 것이다.

어찌 보면 유치하고 시대에 뒤떨어진 발상처럼 느껴진다. 수백 년, 수천 년 전의 그림과 글이니 당연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오늘날의 시각은 달라야 한다. 당장 생리대가 비싸고 저소득층은 돈이 부족해 깔창을 써야 하는 현실. 이런 문제가 지적되는 상황에 '중세 시대에 머무른 관점'으로 생리에 관한 반감부터 드러내지는 말아야 할 일 아닐까.

'더 잘 피흘리기 위하여' 만들어진 영화

 영화 <피의 연대기> 중 한 장면.

영화 <피의 연대기> 중 한 장면. ⓒ KT&G 상상마당


<피의 연대기>는 출연자의 머리에 '고프로' 카메라를 부착해서, 생리컵에 담긴 생리혈은 어떻게 처리하는지 직접 보여줄 정도로 파격적이다. 그런데 인류의 절반이 자연스럽게 겪는 일이 2018년에 소개되는 것이 파격적이라는 건 그만큼 사회가 지나치게 보수적이라는 의미는 아닌가.

여성 보건 문제인데도 생리를 다루는 일에 한국 사회가 아직 보수적이라면, <피의 연대기>라는 영화가 던지는 시사점은 더 유효하다. 여성의 목소리로 생리와 생리대에 관해 발언하고 제도적인 발전 방안도 영화를 통해 거론하기 때문이다.

영화에서는 지난 2016년 미국 뉴욕에서 통과된 법안을 재조명한다. 학교를 비롯한 모든 공공기관의 여성 화장실에 생리대를 무료로 배치하는 내용의 법안이었다. 준비하지 못한 상황에서 생리를 겪은 어느 여성 학생의 사례가 퍼지며 법안 제정으로 이어진 장면이었다. 지난 2017년 11월 24일 한국 국회에서도 청소년복지 지원법 개정안이 의결됐다. 이는 국가와 지방자치단체가 여성 청소년에게 생리대 등 보건위생에 필수적인 물품을 지원할 수 있도록 한 법안이다. '깔창 생리대'를 쓰는 일이 다시 없어야 하기에 나온 법안이라고 볼 수 있다.

 영화 <피의 연대기> 중 한 장면

영화 <피의 연대기> 중 한 장면 ⓒ 상상마당


법안의 필요성뿐만 아니라 교육의 중요성도 언급한다. 어린 시절부터 제대로 알고 준비할 수 있다면 지금보다 생리를 더 나은 경험으로 만들 수 있으므로. 영화 후반부에서도 감독은 여러 생리용품을 써보며 본인에게 맞는 것을 찾는 과정을 영화로 공유하며 그 이유로 '더 잘 피흘리기 위해서'라고 말한다.

"우리는 영문도 모른 채 이 세상에 태어나 나이를 먹어가고 의지와 상관없이 피 흘리는 존재로 자라난다. 한 달에 약 5일, 큰 숟가락 세 개 분량. 1년으로 치면 300mL, 10년에 1.5리터 생수 두 병을 채우고 평생을 모두 합치면 10리터에 달하는 피."

많은 사람이 겪는 생리, 편견을 깨고 지식을 넓혀주는 데 <피의 연대기>가 관객을 도울 거라 믿는다. 생리에 관해 아무것도 모르던 남성 기자가 느낀 바는 그랬다. 더 많은 사람이 더 잘 피흘리기 위해 노력하고 싶은 사람이라면 가족과 친구, 연인의 손을 잡고 극장을 찾아 '피의 연대'에 동참해보면 어떨까? 언젠가 생리에 관한 편견과 해프닝이 과거의 일이 된 먼 훗날에, '옛날엔 생리를 더러운 것으로 생각했단다'라고 우리보다 젊은 세대와 함께 웃으며 돌이켜볼 수 있도록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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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부터 오마이뉴스에서 근무하고 있습니다. 팟캐스트 '말하는 몸'을 만들고, 동명의 책을 함께 썼어요. 제보는 이메일 (alreadyblues@gmail.com)로 주시면 끝까지 읽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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