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인들은 책(내기를)을 좋아한다.
선전효과가 크기 때문이다. 그런데 서점에서 가장 안 팔리는 책이 정치인들의 책이라 한다. 내용이 빈약하고 대부분 자기 홍보용인데 그나마 비서나 작가를 동원하여 만든, 대필이거나 국회 대정부발언을 묶은 것들이다.
노회찬은 2014년 11월 『노회찬, 작심하고 말하다 - 대한민국 진보, 어디로 가는가?』라는 책을 냈다. 저술이라기보다 대담집이다. 진보잡지 『월간 말』의 기자를 거쳐 『오마이뉴스』 정치팀장 구영식 기자가 묻고 노회찬이 답하는 형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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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한민국 진보, 어디로 가는가 정치기자 구영식이 묻고 정치인 노회찬이 답한 인터뷰 책. 노회찬 특유의 위트와 유머로 책을 읽는 내내 지루하지 않았다. 정치인 관련 책으로서는 보기 드문 경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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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역 정치부 민완기자와 1년여 동안 아홉 차례 만나 300쪽에 달하는 대담집을 낸 것은 처음이 아닌가 싶다. 우리나라 수많은 직종 가운데 가장 바쁜 축에 든다는 언론사 정치부 기자가 한 사람을 찍어 1년여 동안 취재하고 대담하기란 여간해서 쉬운 일이 아니다.
탐구 인물이 노회찬이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그는 파도 파도 마르지 않는 샘물이다. 살아온 다양한 역정, 일관된 신념, 다층적인 독서와 인간관계 등 심층이 매우 깊은 인물이다. 구영식 기자는 대담집의 '여는 글' 서두에서 말한다.
노회찬 전 진보정의당(현 정의당) 대표는 한국 진보운동이 쌓아온 역사의 지층을 생각하게 한다. 반유신투쟁의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을 거쳐 1990년대부터 지금까지 진보정당운동에 줄곧 헌신해왔기 때문이다. 특히 학생운동 출신으로 본격적인 노동운동에 투신한 첫 세대이자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을 거쳐 진보정당운동으로까지 나아간 첫 세대라는 점에서 그의 존재는 각별하다.
한국 사회에서 이렇게 장기전을 펼치기란 정말 쉽지 않은 일이다. 특히 그는 민주화운동 보상도 신청하지 않았다. "내가 원해서 한 일이기 때문"이라는 게 그 이유였다. "이 길을 택하지 않았다면 깨닫지 못했을 것을 깨달으면서 오히려 내가 구원받았다."며 자신은 희생한 것이 아니라 혜택받은 것이라고 겸손해했다. (주석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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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회찬 "통합진보당 강제해산 반대" "통합진보당 강제해산 반대와 민주주의 수호를 위한 2차 원탁회의"가 17일 오후 국회의원회관에서 학계, 노동계, 종교계, 문화예술계, 시민사회 등 사회 각계인사 2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노회찬 전 정의당 대표가 "통합진보당 강제해산 반대" 입장을 밝히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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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이제까지 필요에 따라 이 책의 내용을 부분적으로 인용해 왔다. 여기서는 중복되지 않는 범위에서 띄엄띄엄 몇 대목을 소개한다.
구영식 : 한국사회가 여전히 진보정당에 희망을 걸어야 한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
노회찬 : 현대 정치는 보수와 진보 양대 축으로 생산적인 경쟁을 벌일 때 가장 선진적인 정치가 보장된다. 이것은 세계적으로 보편적인 현상이다. 특히 우리는 어느 정도 정치민주화를 이루었지만 경제민주화가 시급한 과제로 대두된 상황이다. 이를 해결할 수 있는 가장 바람직한 체제는 강경보수와 온건보수의 체제가 아니다. 세계 최강국이면서도 오히려 복지나 의료에서는 우리보다 낙후한 제도를 가지고 있는 미국 같은 나라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보수 대 진보로 재편돼야 한다.
그런 점에서 진보가 제대로 설 때 그와 경쟁하는 합리적 보수도 함께 설 수 있다. 현재 정치체제 자체는 타파되어야 할 대상이다. 그런 정치체제에 균열을 만들어내는 것이 지금 진보정당의 역할이다. 원내교섭단체가 가능한 20석을 만들면 확실히 금이 쫙 가게 할 수 있다. (주석 10)
구영식 : 학생운동, 노동운동, 진보정당운동, 국회의원 등 노회찬 대표의 삶은 한국 진보인사의 한 표본이다. 그래서 노 대표가 지나온 삶을 되짚어보면서 한국 진보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얘기할 수 있을 것 같다.
노회찬 : 어떤 개인적인 특징 때문이라기보다는 태어난 시대 자체가 나의 삶의 궤적을 만들었다. 1956년생인데 제3공화국 때 초등학교에 다녔고, 유신정권하에서 고등학교와 대학교에서 보냈다. 그 다음 노동운동을 시작할 때가 광주민중항쟁 이후의 전두환 시대였다. 특히 나는 학생운동 출신으로 노동운동을 한 첫 세대에 속한다. 그리고 다시 진보정당운동으로 나아가는 첫 세대가 되었다. (주석 11)
구영식 : 그동안 한국에서는 보수의 영향력이 압도적이었다. 왜 그랬다고 보나?
노회찬 : 세 가지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친일세력을 단죄하지 못했고 6ㆍ25전쟁으로 인해 분단과 대립 상태였으며 연이은 군사쿠데타가 있었다. 5ㆍ16, 10월 유신, 12ㆍ12가 모두 군사쿠데타였다. 군사쿠데타로 인한 지배 때문에 한국의 보수세력 자체가 분열됐다. 보수만 그렇게 된 것이 아니다.
자본주의 선진국들을 보면, 보수정치를 이끄는 것은 자유주의다. 보수주의도 과거의 전제군주나 봉건권력에 저항했던 자유주의적 정서에 기반을 둔 세력이 주도해왔다. 반면 한국은 보수가 분열되면서 반독재 자유주의세력과 독재, 반공독재 강경 극우세력이 대립해왔다. 이것이 지난 50년간의 정치다.(주석 12)
인터뷰를 마친 구영식 기자는 책의 말미에 실린 「인터뷰어의 클로징 멘트」에서 정리한다.
1여 년 긴 시간을 인터뷰하면서 가장 인상 깊었던 대목은 '진보의 세속화 전략'을 주문한 것이다. 노 대표가 일반인들에게 부정적으로 들릴 수 있는 '세속화'라는 단어를 과감하게 쓴 것은 한국의 진보가 아직도 현실에 충분히 안착하지 못했다는 반증이다.(…)
노 대표가 주문한 진보의 세속화 전략도 '운동권적 진보'라는 궤도를 벗어나려는 시도다. 그 역발상을 통해 순결한 이념을 지키는 데만 열중하기보다 현실을 1센티미터라도 더 변화시켜 사람들의 삶이 조금이라도 나아진다면 그것이 현실에서 옳은 길이고, 승리하는 길이다.
이와 함께 언제나 '노동'이 이 세상에서 얼마나 소중하고 중요한지를 일깨워 주는 지도자가 되어주길 바란다. (주석 13)
주석
9> 『대한민국 진보, 어디로 가는가?』, 10쪽.
10> 앞의 책, 44쪽
11> 앞의 책, 53쪽.
12> 앞의 책, 256쪽.
13> 앞의 책, 290~291쪽, 발췌.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진보의 아이콘' 노회찬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