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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개화기의 계몽사상가, 교육가, 저술가인 후쿠자와 유키치.
 일본 개화기의 계몽사상가, 교육가, 저술가인 후쿠자와 유키치.
ⓒ 일본 국립국회도서관 소장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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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일본의 선각자로 평가받는 후쿠자와 유키치는 1885년 3월 16일자 <시사신보>에 '탈아론(脫亞論)'이라는 논설을 게재했다. 그는 이 글에서, 밀려오는 서구문명을 피할 수 없으므로 일본이 이에 대처하려면 아시아를 벗어나는 '탈아'를 단행할 수밖에 없다고 진단했다.

그는 이웃나라들과 절연할 필요성을 강조했다. 일본 주위에 있는 나라들은 새로운 흐름을 따라갈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게 그 이유였다. 그는 "문명개화에 보조를 맞출 수 없는 아시아로부터 이탈해 서양의 문명국들과 진퇴를 함께하자"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조선과 중국을 악우(惡友, 나쁜 친구)로 규정한 뒤 '이런 나쁜 친구들을 사절하자'고 호소했다.

좋은 친구, 나쁜 친구론

그의 주장은 1868년 메이지유신 이래의 일본 외교노선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것이었다. 영국을 위시한 서양 국가들의 침략 노선에 편승해 조선·오키나와 및 청나라령 타이완을 침공한 1870년대 일본 대외정책을 이론적으로 체계화시키는 한편, 향후 일본 외교가 지향해야 할 방향성을 제시했다. 그 뒤 일본의 아시아 침략은 그의 탈아론을 충실히 반영하는 쪽으로 전개됐다.

그런데 1945년 패망 뒤에 일본은 후쿠자와 이론에 대해 어느 정도 비판 의식을 드러냈다. 한국전쟁 중인 1952년 4월 28일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발효로 연합군의 점령이 끝난 다음날 트루먼 대통령이 미·일 종전선언을 발표하면서 패망의 족쇄에서 벗어난 일본은 1957년 9월 발간된 최초의 <외교청서>에서 그런 의식을 표명했다.

이 책에서 일본은 외교 3대 원칙으로 '유엔 중심주의' '자유진영과의 협조' '아시아 일원으로서의 입장 견지'를 제시했다. '유엔 중심주의'나 '자유진영과의 협조'는 미국 등 서방 세계와의 협력을 전제로 하므로 탈아론과 상통하는 부분이 있었지만, 마지막의 '아시아 일원'을 운운하는 건 후쿠자와의 주장과 거리를 두는 것이다. 

이처럼 이미 1950년대에 '아시아 중시 외교'를 천명했지만, 일본은 지금까지도 '이웃사촌'을 만들지 못하고 있다. 지금도 여전히 일본 외교는 미국의 전략에 편승해 동아시아를 압박하는 방향으로 전개되고 있다.

변하지 않은 일본 
 
스가 요시히데(菅義偉) 일본 총리. 사진은 지난 1월 25일 일본 중의원 예산위원회에서 답변하기 위해 손을 들고 있는 모습.
 스가 요시히데(菅義偉) 일본 총리. 사진은 지난 1월 25일 일본 중의원 예산위원회에서 답변하기 위해 손을 들고 있는 모습.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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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은 흐름은 아베 신조 내각 때 더 두드러졌고 스가 요시히데 내각에 들어서도 바뀌지 않고 있다. 일본은 미국과 함께 중국 압박을 위한 인도·태평양 전략에 착수했고, 이를 위한 4개국 협력체인 '쿼드'를 구성했다.

이 기조 위에서 스가 내각은 조 바이든 행정부와 협력하고 있다. 워싱턴D.C. 시각 12일 열린 쿼드 정상회담(화상)에서 스가 총리가 바이든 대통령, 나렌드라 모디 인도 총리, 스콧 모리슨 호주 총리와 함께 발표한 공동성명에도 '나쁜 친구' 중국에 대한 견제 의식이 드러났다.

이 성명은 "우리는 인도·태평양과 이를 넘어 안보와 번영을 증진하고 위협에 맞서기 위해 자유롭고 개방적이며 규범에 기초하고 국제법에 기반한 질서 증진에 전념한다" "우리는 법치·항행 및 영공 비행의 자유, 분쟁의 평화적 해결, 민주적 가치, 영토적 온전성을 지지한다"고 표명했다.

자유와 개방, 항행·비행의 자유는 남지나해(남중국해)에 대한 중국의 영향력 확대를 저지하기 위한 명분이다. 민주적 가치, 영토적 온전성 등은 홍콩·타이완 등에 대한 중국의 영향력을 견제하는 의도를 드러내는 것으로 풀이된다. 1950년대에 아시아 일원의 입장을 견지하겠다던 일본은 여전히 '좋은 친구들'의 손을 꼭 쥔 채 '나쁜 친구들'과 거리를 두고 있다.

한국도 중국을 견제할 수 있으므로 일본이 미국·호주·인도와 함께 중국을 견제하는 것 자체를 옳다 그르다 할 순 없다. 하지만 주목하지 않을 수 없는 건 동북아 역내에서 도덕적으로 불리한 일본이 외부 국가들과 합세해 역내 국가를 압박하면 일본의 위상이 더욱 위축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런 위험성에도 개의치 않고 '탈아' 노선을 한결같이 지향하니 일본의 행보를 주목할 수밖에 없다.

배상인가, 경제협력인가

일본이 패망 후에도 후쿠자와 유키치의 망령에 현혹되는 건 일본의 대외 정책이 미국의 세계전략과 연동돼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에 버금가는 요소로 고려할 만한 게 있다. 배상외교의 지지부진이 그것이다. 이웃과의 화해를 촉진하는 배상외교가 정상궤도에 오르지 못한 것이 일본 외교를 헛돌게 만드는 측면이 있다.

1965년 한일 국교정상화는 양국관계를 진정으로 정상화시키지 못했다. 일본은 한일기본조약 및 청구권협정 등을 통해 1945년 이전 문제를 털어버리고자 했지만, 문제 해결에 필요한 실질적 조치를 결여했을 뿐 아니라 '돈 몇푼'으로 봉합하려 했기 때문에 두고두고 한국인들의 원성을 사고 있다.

일본은 선심 쓰듯 금전을 쥐어주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것을 발판으로 상대국 경제를 자국에 예속시키려 했다. 1965년 이후로 한국 경제가 일본에 더욱 긴밀히 예속된 것도 그런 전략이 실효를 거뒀음을 보여준다.

앞선 언급한 일본 <외교청서>에도 이런 의도가 반영됐다. 아베 신조의 외할아버지인 기시 노부스케 총리가 내각을 이끌 때 발간된 이 책은 배상문제의 기본원칙으로 "배상은 구상국(求償國)에 대한 우리나라의 의무 이행이지만, 이것을 단순한 의무 이행으로 끝내지 않고 동시에 구상국 경제의 회복 내지 발전에 기여하고 나아가 우리나라와의 경제관계 긴밀화에 기여할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을 제시했다. 배상하는 기회에 상대국 경제를 일본 경제와 긴밀히 연계시킨다는 원칙을 견지한 것이다.
 
일본 56·57대 내각총리대신을 역임한 기시 노부스케.
 일본 56·57대 내각총리대신을 역임한 기시 노부스케.
ⓒ wiki comm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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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원칙이 한국과의 관계에만 나타난 것은 아니다. 한일 국교정상화 이전인 1950년대에도 그랬다. 배상한다기보다 경제지원을 한다는 인상을 풍기는 것은 1956년 5월 9일 체결된 필리핀(比律賓·비율빈)과의 배상 협정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해 5월 10일 발행된 <조선일보> 기사 '비·일 배상 협정'은 "일본과 비율빈은 9일 오랫동안 고대되어 오던 2차 대전 배상협정에 조인하였다"며 "동 협정 가운데서 일본은 20년의 기간 중 현물 및 용역으로 5억 5천만 불을 지불할 것과 2억 5천만 불의 차관을 공여할 것을 동의하였다"고 보도했다.

버마(지금의 미얀마)·필리핀·인도네시아·베트남에 대한 배상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청구권을 행사하지 않은 라오스·캄보디아의 경우에도 그랬다. 지난해 4월 <일본역사 연구> 제51집에 실린 조진구 경남대 교수의 논문 '일본의 전후 아시아 배상외교와 역사인식'은 "라오스와 캄보디아는 배상청구권을 포기하는 대신 1958년과 1959년 10억 엔과 15억 엔을 무상으로 제공하는 경제기술협력협정을 일본과 체결했다"고 말한다.

배상을 위한 건지 경제협력을 위한 건지 모호한 이 같은 협정을 체결할 수 있었던 것은 일본의 기를 세워주고 자국의 대리인으로 삼고자 했던 미국의 입김 때문인 면도 있고, 경제사정이 급했던 동아시아 국가들의 상황 때문인 면도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 일본 자신의 태도에 기인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진정으로 사과하고 배상할 마음이 없었기에, 배상인지 협력인지 모호한 것을 체결하고 이를 발판으로 상대방 경제를 예속시키는 전략을 구사했을 가능성이 크다.

부메랑

하지만 그런 전략은 되레 일본의 동아시아 회귀를 저해했다. 불철저한 배상 전략으로 인해 일본의 동아시아 위상이 개선되지 않고 있다. 시간이 흐를수록 잠잠해져야 할 일본의 전쟁범죄가 점점 더 많은 비판에 직면하는 것도 그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지금 일본의 과거 죄악은 동아시아를 벗어나 유럽·미국에서까지 이슈가 되고 있다. 위안부 피해자 문제가 서구 사회에서 외신 뉴스로 짤막하게 소개되는 게 아니라 베를린시 미테구나 하버드대학 사례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이제는 현지 사회의 쟁점으로 떠오른다. 동아시아에 대한 배상을 소홀히 하고 탈아 경향을 단속하지 않은 일본의 태도가 그처럼 뜻하지 않은 결과를 초래한 것이다.

그런데도 스가 내각은 미국과 함께 쿼드를 주도하는 자국의 위상에만 주목할 뿐이다. 자국의 무성의한 태도가 자신들의 입지를 얼마나 축소시키고 있으며, 그것이 동아시아를 벗어나 세계 각국에 어떤 파급력을 끼치고 있는가를 제대로 살피지 않고 있다. 전후좌우를 세밀히 살피지 않고 '탈아론'으로 핸들을 꺾는 위험한 운전자라고 평가할 수 있다. 

태그:#식민지배 배상, #한일관계, #위안부, #탈아론, #후쿠자와 유키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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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패권쟁탈의 한국사,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노비들,왕의여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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