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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년여의 교직 생활 중 올해로 8년째 초등 2학년 담임을 맡고 있다. 아, 초임 교사 시절에 한 번 2학년을 맡은 적이 있으니 도합 9년째인가. 초임 시절엔 뭐든지 서툴렀으니 아무리 최선을 다했다 해도 그때의 나를 떠올리면 언제나 부끄러움이 앞선다.

"지금부터 모두 선생님을 봅니다. 두 번만 이야기할 테니 집중해서 들으세요."

별의별 집중 방법으로 아이들의 시선을 붙들어 천천히, 또박또박 말해 주어도 도로아미타불. 용기 있는 한 아이가 손을 들어 "근데요..." 하며 이미 다 말해준 것에 대해 묻기 시작하면... 그때부터 아이들은 마치 내가 방금 한 말을 한 번도 듣지 않은 것처럼 돌변하여 같은 질문을 무수히 반복했다. 그런 아이들을 이해하기에 나는 한없이 미숙한 교사였다. 

나는 저학년 체질은 아닌가 보다,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이건 아니다, 싶어서 한동안 고학년 아이들만 맡기도 했다. 그러다 어느 해 운명처럼 다시 2학년 아이들을 맡게 되었을 때, 초임 시절 좌충우돌 2학년 담임 시절을 소환하며 슬쩍 걱정이 된 것도 사실이었다.

다시 만난 2학년
 
 이 글을 읽는 당신도 아홉 살 어린이였던 때가 있었다.
 이 글을 읽는 당신도 아홉 살 어린이였던 때가 있었다.
ⓒ envato elem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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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다시 만난 2학년 아이들은 초임 시절에 만났던 아이들과 뭔가 달랐다. 초등 입학 연령이 달라진 것도 아니니 1년씩 더 자라 학교에 들어온 것도 아닌데 이상하게 아이들이 더 의젓하고 똘똘했다. 나도 모르는 새 아이들이 훌쩍 성장한 것이 아니라 아이들을 대하는 내 태도가 변했음을 안 것은 한참 뒤였다.

쌓인 교직 경력만큼 다양한 아이들을 만나며 나도 어느샌가 기다릴 줄 아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한층 노련해진 나의 집중 잡기술(?) 덕분이 아니었다. 집중도가 짧은 어린이들은 같은 말도 최소 30번은 해야 알아듣는다는 걸 알기 때문에 그만큼 말해 줄 준비가 된 내 마음가짐의 변화 때문이었다. 

아이에 맞는 속도로 조금 기다려주면 대부분의 아이들이 스스로 성장하는 힘을 가졌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렇게 2학년 아이들과 만들고 오리고, 오카리나, 리코더를 부르며 책을 읽고 글을 썼다.

특히 아이들과 함께한 '글쓰기'는 겉으로 보이는 아이들의 모습뿐 아니라 보이지 않는 아이들의 마음까지 알게 해 주었다. 어린 아이들에게 글쓰기가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를 알기에, 거름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아이들이 쓴 글보다 더 긴 코멘트를 달아주었다. 맞춤법도, 띄어쓰기도 개의치 않고 "오직 너의 마음만을 보고 싶다"는 담임 선생님의 진심을 확인하면, 아이들은 대부분 흔쾌히 글을 써 마음을 보여주었다.

그렇게 오로지 한 독자(=나)만이 완독하는 아이들의 보석 같은 문장들이 켜켜이 쌓여 갔다. 아이들의 글을 읽으며 나는 때로는 미소 짓고 때로는 코끝이 찡해졌다. 아이들의 기발한 생각에 절로 감탄사가 나오기도 했다.

그렇게 나를 들었다 놨다 했던 아이들의 문장들을 어린이날 100주년을 맞아 몇 가지만 소개하려 한다. 대부분 지난해 가르쳤던 아이들의 글인데, 미처 일일이 허락을 구하진 못했다는 점을 미리 밝힌다(가급적 사생활을 드러나지 않는 글을 추렸지만, 혹시라도 이 글을 읽고 공개를 원치 않는 어린이가 있다면 선생님에게 꼭 쪽지를 보내주세요!).

우리도 지나왔던 아홉 살

여기 있는 글은 아이들이 쓴 글을 읽다 마음에 남는 문장을 사진으로 찍어 모아둔 것들이다. 2학년 아이들의 글이라 때로는 문법상 오류도 있고 문장 간 연결이 매끄럽지 않을 수도 있지만, 그래서 오히려 상상력이 발동할 여지가 많은 것이 바로 바로 요맘때 아이들이 쓰는 글의 묘미다.
 
오늘은 엄마가 회사 간 날이었다. 엄마 첫 회사 가는 날인데 걱정이 된다.
 
오늘 드디어 배을 탄다. (중략) 근데 아빠는 배를 안 탄다고 했다. 왜냐하면 그 배는 3명밖에 못 타기 때문이다. 아빠는 괜찮다고 했지만 난 아빠의 마음을 다 안다.
 
오늘 샤워실에서 엄마가 무섭게 문을 닫고 갔다. 무서웠다. 엄마가 미웠다. 엄마가 안아줬다. 그런데 엄마 옷이 젖었다. 엄마가 에라, 모르겠다 이러고 엄마와 물장난 샤워를 했다.

아직은 엄마, 아빠가 세상의 전부인 어린아이들이 부모와의 관계에서 가장 많은 마음의 변화가 이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엄마, 아빠를 걱정하고 그 마음을 헤아리는 어린 마음들을 만나면 난 교사가 아니라 그냥 '엄마' 마음이 되고 만다. 이런 아이들의 글을 마음 가득 담고 좀 더 좋은 엄마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한다.
 
나는 놀던 중에 선생님께 물었다. "일광욕은 햇빛으로 하는 거고 만약 월광욕이 있으면 달빛으로 하는 거예요?" 선생님께서 "그런가?" 하셨다. 나는 밤에 방에서 커튼을 열고 월광욕을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광욕'이라는 말에만 익숙한 나는 '달빛 샤워'를 떠올리는 아이의 생각에 감탄했다. 아이가 밤에 커튼을 열고 월광욕을 했을지 확인하지 못한 점은 내내 남는 아쉬움.
 
오늘 아빠와 독감 예방 접종을 했다. 처음에는 안 떨었는데 점점 숨이 막혀가면서 떨려왔다. 내 차례가 오는 순간, 가슴이 쿵쾅쿵쾅 식은땀이 뚝뚝 떨어졌다. 내가 맞을 차례가 됐다. 사나이의 명예를 걸고 꼭 울지 않겠다. 무서웠지만 꾹 참고 울지 않았다. 정말 무서웠다.
 
오늘 놀이 공원에 갔다. 처음에 바이킹을 타고 싶었는데 위로 갔다가 아래로 가고 도는 놀이 기구를 탔다. 정말 무서웠다. 나는 태어날 때 무서운 걸 잘 못 견디게 태어났고 동생은 잘 견디게 태어나서 나는 무섭고 동생은 안 무섭다.  

나고 자란 9년여의 생애 동안 씩씩함을 강요받은 남자아이들의 자존은 독감 주사 앞에서, 동생과 함께 탄 놀이 기구 앞에서 시험대에 오른다. 아이 아빠의 아빠도 아들에게 사나이는 함부로 울지 않는 거라고 했겠지. 

두려움을 꾹 참아낸 순간, 더 큰 사나이의 세계로 한 발 내디뎠을 아이들. 더 잘나고 더 못나서가 아니라 모두가 다르게 태어난 것일 뿐이라는 지혜를 아홉 살 인생은 어디에서 배웠을까. 이 아이들이 어른이 되었을 때, 더 큰 세상 속에서 사나이의 '진정한' 명예가 뭔지 알게 될 날을 고대한다.
 
4교시에 여행 풍선 놀이를 했다. (중략) 우리가 졌지만 우리는 최선을 다해서 괜찮았다.  1팀(이긴 팀)에게 박수를 쳐줬다.

최선을 다했다면 이기지 못해도, 꼴등을 해도 괜찮다고 말해 줄 어른들이 많았으면 좋겠다. 잘못을 인정할 줄 알고 규칙을 지키며 구성원 누구도 배제되지 않도록 노력하는 이에게 진심으로 손뼉 쳐 줄 수 있는 세상. 우리 아이들에게 물려주고 싶은 세상이다.  
 
오늘은 너무 바쁘다. 일어나자마자 학원 숙제한다. 열심히 해야 한다. 그다음에 피아노를 한다. (중략) 그러고 나서 도란(글쓰기)을 쓴다. 다 쓰고 나면 영어책 8까지 읽어야 한다. 하~ 많다, 많아. 공부가 적었으면 좋겠다.  

대한민국에서는 초등 2학년마저도 바쁘다. 어떻게 하면 창의적인 아이로 키울 것인가? 부모들의 끊임없는 고민거리지만 타의에 의해 바빠진 시간에 아이들의 창의적인 생각은 자랄 틈이 없다. 자주 시를 쓰고 넘실대는 상상의 세계를 글로 표현하곤 했던 이 아이. 아이만의 세계가 틀에 갇혀 다른 친구들과 똑같은 색깔을 갖게 될까 봐 걱정이다.

이 글을 읽는 당신도 아홉 살 어린이였던 때가 있었다. 타인 앞에서 하게 될 실수를 두려워하고 칭찬에 목말라하면서도 자신만의 색깔을 가졌던 아홉 살 말이다. 그 아이들에게 놀이동산도, 선물도 좋지만, 이번 어린이날에는 그 마음을 좀 더 들여다보았으면 좋겠다. 가족을 걱정하고 세상의 모든 두려움과 맞서느라 고군분투하는 어린 마음을.

'우리가 몰랐던' 어린이의 세계에 귀 기울여 들으려는 어른들의 진정이 닿으면 마음의 문을 활짝 열어주지 않을까? 100주년을 맞은 어린이의 날, 얘들아 마음을 다해 축하한다!

덧붙이는 글 | 개인 브런치에 함께 게시될 글입니다.


#어린이날#100주년축하#어린이의문장#어린이의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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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 넘은 공립초등학교 교사입니다. 아이들에게서 더 많이 배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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