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성근 평창국제평화영화제 이사장(오른쪽)과 정상진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집행위원장이 5일 오후 부산 해운대구 영화의전당에서 열린 제27회 부산국제영화제(BIFF) 개막식에 참석해 레드카펫을 걸으며 입장하고 있다.

문성근 평창국제평화영화제 이사장(오른쪽)과 정상진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집행위원장이 10월 5일 오후 부산 해운대구 영화의전당에서 열린 제27회 부산국제영화제(BIFF) 개막식에 참석해 레드카펫을 걸으며 입장하고 있다. ⓒ 유성호

 
다사다난했던 한 해였지만, 영화계에선 영화제들의 수난시대로 기억될 법하다. 평창국제평화영화제, 강릉국제영화제 돌연 폐지를 비롯해 대내외적으로 알려지고 있는 사례만 해도 서너 곳 이상의 크고 작은 영화제들이 중단되거나 사라졌다. 대체 왜일까. 

강원도 최초의 국제영화제로 올해까지 4회 행사를 치른 평창국제평화영화제는 신임 도지사의 말 한마디에 돌연 사라지게 됐다. 이제 막 행사의 틀이 잡히고 인지도를 쌓던 와중에 닥친 일이었다. 그보다 앞서 강릉국제영화제 또한 지자체장의 말 한마디로 예산 지원이 중단돼 사라지면서 강원 지역을 대표하던 두 영화제에는 정치적 간섭, 희생양이라는 꼬리표가 붙게 됐다. (관련 기사 : '평창영화제 폐지' 콕 짚은 강원도지사, 왜 이리 급했나, http://omn.kr/20f9z).
 
여기에 더해 최근 전주국제영화제 집행위원장 선정 과정에서 불거진 논란, 제천국제음악영화제 집행위원장 및 사무국장 돌연 해임 사태가 이어지며 연쇄적 상황이 아닌지 우려가 나오고 있다. 이에 <오마이뉴스>는 국내외 주요 영화제가 직면한 긴급 과제를 진단했다.
 
국내 영화제에 작용하는 압력
 
잊을 만하면 불거지는 지자체와 영화제 간 갈등의 핵심 중 하나는 영화제 운영 구조다. 정확히는 예산 편성 구조 때문이다. 물론 재단법인 혹은 사단법인 형태로 정관상 국내 주요 영화제들은 외부 요인이나 지역 자치장의 간섭을 받지 않는 기본 요건은 마련돼 있는 상태다. 하지만 영화제 예산 자체 중 공적 자금 비중이 매우 높다는 게 걸림돌처럼 작용하는 것.
 
부산, 전주, 부천영화제 등 국내 주요 영화제들은 적게는 80%에서 많게는 90% 이상 지자체나 정부 예산으로 살림을 꾸리고 있다. 지자체장이나 공기관은 정관상 영화제 폐지를 결정할 권한이 없지만 예산 지원 중단을 결정함으로써 그에 버금가는 영향력을 끼치기 쉽다. 강릉과 평창 사례가 대표적이다. 강원도지사나 강릉시장 모두 "영화제를 하지 말라는 게 아닌 예산 지원을 하지 않는 것"이라는 말로 압력행사 비판을 부정한 것도 그런 이유다.
 
2022년 현재 한국에 존재하는 영화제는 약 240여 개(영화진흥위원회 통합전산망 등록 기준)다. 이 중 국제영화제 규모로 인정받는 것은 부산영화제, 전주영화제, 부천영화제, 제천음악영화제,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서울여성영화제, 울주산악영화제 등 7개이며, 중소영화제 규모로 인정되어 영화진흥위원회 지원금을 받는 곳은 18개다. 이 25개가 국내 주요 영화제라 할 수 있겠다.
 
올해는 이런 영화제들이 몸살을 크게 앓았다. 앞서 언급한 평창, 강릉, 전주, 제천 외에도 서울국제만화애니메이션페스티벌, 제주영화제, 충북국제무예액션영화제, 미쟝센단편영화제 등이 중단되거나 폐지됐다. 부천영화제의 경우 한 시의원이 예산 대비 효율성 문제를 지적하며 폐지를 주장하기도 했고, 제천 또한 예산 초과 집행 문제를 지적한 주체가 청풍 지역을 기반으로 한 시의원이었다. (관련 기사 : 집행위원장 돌연 해임·임금 체불... 제천영화제에선 무슨 일이, http://omn.kr/2232h)
 
이처럼 불거진 문제들이 대부분 예산 및 집행과 관련돼 있다. 영화제마다 재정 자급률이 최대 20% 수준을 웃도는 상황에서 외부 입김, 특히 예산 지급 주체들의 의지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는 이유다. 
 
장병원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프로그래머는 "한국영화제들이 지자체 의존도가 높고, 예산도 편중된 경향이 있다. 정관상 지자체가 영화제를 폐지할 권한은 없지만, 지원 중단을 결정하는 것 자체가 폐지하겠다는 의지를 보이는 것"이라며 "오랜 시간 영화제의 물적 토대를 개선하지 못한 게 큰 문제"라고 뼈아픈 지적을 전했다.

또다른 도전과 위기에 직면한 해외영화제들
 
 제75회 칸영화제에서 <헤어질 결심>으로 감독상을 받은 박찬욱 감독.

제75회 칸영화제에서 <헤어질 결심>으로 감독상을 받은 박찬욱 감독. ⓒ FDC

 
해외 주요 영화제들은 어떨까. A 리스트(국제적 규모 영화제 중 가장 영향력이 큰 그룹) 영화제 중 칸영화제와 베니스영화제는 지자체와 정부 예산 지원 비중이 각각 50%, 58% 수준(2019년 기준)이다. 코로나19 팬데믹 직전까지 이들 영화제는 글로벌 기업의 협찬을 이끌거나 할리우드 영화의 대규모 프로모션 등을 유치하면서 재정 자부담률을 높여왔다.
 
베를린영화제의 경우 약 325억 원 예산 중 중앙정부가 97억 원, 지자체에서 162억 원을 부담한다. 비율로 치면 약 80% 수준이다. 토론토영화제는 정부 및 지자체 예산 비중이 20% 수준밖에 되지 않는다. 주요 재원이 티켓 판매와 영화제 배지 판매, 그리고 기업 후원금으로 이뤄져 있다.
 
단순히 비교하면 한국보다 해외영화제들이 더 재정 건정성이 높아 보이고, 상대적으로 안정적으로 운영되는 것처럼 보인다. 현실은 그렇지 않다. 코로나19 팬데믹을 지나며 세계 영화 산업 지형도 또한 급변했고, OTT 플랫폼의 약진으로 더욱 도전을 받게 됐기 때문이다.
 
국내에 잘 알려지진 않았지만, 올해 초 전 세계 영화인들을 깜짝 놀라게 한 사건이 하나 있었다. 지난 4월 네덜란드 로테르담영화제 프로그래머들 전원이 계약 종료를 통보받은 일이다. 2020년부터 임기를 시작한 새 집행위원장 바냐 칼루제르치치(Vanja Kaludjercic)의 의지였다. 사실상 해고인 셈이다. 그 명단엔 많게는 수십 년 넘게 영화제에 헌신해 온 아시아영화 전문가도 포함돼 있었다. 영화제 정체성을 만들어내는 핵심 자산인 이들을 아무런 논의 절차 없이 내친 것으로 알려져 많은 영화인들이 우려를 표하고 있다. 결과적으론 수익 구조 개선 문제 및 예산 마련과 관련됐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51년 역사를 자랑하는 로테르담영화제는 칸이나 베를린, 베니스 같은 거대 종합 영화제가 아닌 세계 곳곳에서 반짝이는 신인 감독을 발굴하고 소개하는 일종의 등용문 같은 역할을 해왔다. 홍상수 감독 데뷔작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이 해당 영화제에서 상영돼 타이거상(최우수상)을 받았고, 박찬욱, 봉준호 등 여러 국내 감독들 또한 신인 무렵 때 이곳에 소개되며 국제무대 진출의 발판을 얻기도 했다.
 
로테르담만큼은 아니지만, 여타 주요 영화제들도 변화를 겪고 있었다. 

전 세계 예술영화의 강력한 지지자 역할을 자임해온 스위스 로카르노영화제 그리고 35년 역사를 자랑하는 도쿄국제영화제도 팬데믹 기간 중 집행위원장이 바뀌고 새 집행부가 구성된 상황이다. 로카르노영화제의 경우 전임 집행위원장과 일부 스태프가 베를린영화제로 옮기면서 벌어진 일로 보는 시각이 강하다. 일반적이지 않은 경우이다. 도쿄영화제는 지난해 행사장소를 도쿄 롯폰기에서 긴자 지역으로 바꾸면서 내부 갈등이 불거지기도 했다. 

북미 지역에서 세계 주요 독립예술영화들의 요람 역할을 자처해 온 선댄스영화제에선 팬데믹 직후 임명된 다비다 잭슨(Tabitha Jackson) 집행위원장이 3년을 채우지 못하고 지난 6월 집행위원장직에서 물러났고, 킴 유타니가 아트 디렉터로 합류해 변화를 모색하고 있다. 다비다 퇴진을 두고 내부 갈등설이 나오기도 했으나 정확한 사유가 밝혀진 것은 아니다. 
 
전문가들의 진단은?

정리하면 국내영화제들은 예산 지원 주체의 압박으로 집행위원장 등 내부 인원이 물갈이 되거나 영화제 자체가 사라질 위기에 처하는 양상이라면, 해외는 산업 지형 및 외부 요인의 급변 등 보다 다양한 이유로 내부 인원 구성이 바뀌는 형국이라 해석할 수 있다. 

전주영화제 등을 거친 조지훈 무주산골영화제 프로그래머는 "코로나19 팬데믹 전후로 해외영화제들 주요 인사들이 전반적으로 물갈이되는 느낌인데 단순히 조직 문제라기보단 티켓 판매가 주 수입원이었던 여러 해외 영화제들이 운영이 어려워지면서 절반 이상 인력을 해고하는 곳도 있었다"며 "그나마 국내 영화제들은 지자체나 정부 지원금으로 버틴 면이 있다. 오히려 해외영화제들이 더 혹독한 경우가 많은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부산국제영화제, DMZ국제다큐멘터리 영화제 등을 두루 경험한 김영우 프로그래머는 이런 현상을 "산업이 급변하며 영화제들이 느끼는 압박과 위기감이 여러 형태로 분출되고 있는 것 같다"고 분석했다. 그는 "인력 재편이 여러 영화제에서 벌어지고 있는데 새로운 돌파구 내지는 정체성을 찾는 암중모색기"라며 "각 지역이나 나라를 대표하는 영화제들이 하던 신진 창작자 발굴 등의 역할을 칸이나 베를린 등이 흡수하고, 그 역할을 자임하던 다양한 영화제들 역할이 다소 희석되면서 양극화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고 진단했다.
 
말대로 '개와 늑대의 시간' 아닐까. 상대적으로 행사 개최 자체 문제보단 정치적 간섭 문제에 얽힌 국내영화제들, 외부 환경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해외영화제들이 현재의 시간을 어떻게 바라보고 대처하는지에 따라 운명이 뒤바뀌는 시기가 온 것이다.

과연 안팎으로 변혁기임엔 틀림없어 보인다. 대내외적으로 강한 도전을 맞이하게 된 세계영화제들 사이에서 국내영화제들과 예산 주체가 어떤 자구책과 협력 모델을 만들어 갈 수 있을까. 현실을 냉철하게 직시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 [영화제 '위기론' ②] "80~90% 예산 일방 지원은 위험, 정체성도 고민해야"
영화제 베를린 베니스 한국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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