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해월 최시형
 해월 최시형
ⓒ 자료사진

관련사진보기

 
춘암의 청년기는 혼돈의 시기였다.

구질서가 무너져가고 있었다. 신구 사조가 부딪히고 새로운 이념이 민간인들 사이에 전파되었다. 각종 도사·기인이 나타나고 종말론적인 비서가 나돌았다. 여기에 현혹되어 패가망신한 사람도 적지 않았다. 

춘암은 고뇌의 젊은 날을 보내고 있었다. 여러 지역을 순방하고 많은 사람을 만나면서 그의 사고와 인식의 폭도 그만큼 넓어졌다. 그는 '새로운 그 무엇'을 찾았다. 이 길이냐 저 길이냐 묻고 찾았다. 길은 찾는 자에게 주어진다.

25세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육친이면서 스승이셨던 부친의 사망에 생의 무상함은 느끼고 절망감에 빠졌다. 그리고 아버지를 대신하여 가정사를 맡게 되었다. 농사일을 하면서도 그 무엇을 찾는 일을 포기하지 않았다. 29세이던 1883년 3월 18일, 그의 삶에 엄청난 변화를 불러일으킨 일이 일어났다. 우연찮게 동학에 접하게 된 것이다. 

춘암에게 동학을 알려준 인물은 박모였다. 박씨는 예산읍내의 오리정 주막의 주모 김월화의 남편이었다. 동학 교도였던 박씨는 주막을 찾은 춘암이 '새로운 그 무엇'을 강구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 동학을 권하였다. 귀천의 구별없이 만인평등의 사회를 건설한다는 동학의 시천주는 춘암이 찾고 있던 '새로운 그 무엇'과 통하였다. 박씨로부터 동학의 교의를 들은 박인호는 교단의 지도자를 만나 동학에 관해 상세히 듣고자 했다.

춘암은 당시 충청도 목천에 있던 해월 최시형을 찾아가 "사람을 한울처럼 섬기고 바른 마음으로 한울님을 믿어야 세상이 포덕천하가 된다"는 말을 듣고 자신이 찾던 것과 동학이 합치됨을 알고 입도했다. 이때가 춘암이 29세이던 1983년 3월 18일이었다. (주석 1)

조선후기에 이르러 여러 갈래의 변혁의 조짐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큰 줄기의 하나는 서세동점에 따른 서양의 사조가 밀려들었다. 조정의 강력한 배척에도 불구하고 피압박 민중들 사이에 파고들었다.

조선후기 사회에서는 서학(西學)사상이 새롭게 전래되어 신봉되고 있었다. 이 서학사상은 중국에서 한문으로 씌여진 서학서적들을 통해 조선에 전파되기 시작했는데, 서학이라는 용어 안에는 서양의 과학기술이라는 개념과 함께 서양의 종교사상이라는 뜻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18세기 말엽 이후 조선에서 서학이라 할 때는 대개의 경우 천주교 신앙을 지칭하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그리고 서학, 즉 천주교 신앙은 집권층 내지는 성리학적 지식인들로부터 '사학(邪學)'으로 비난받아왔다. 그들은 위정척사론의 연장선상에서 '사학'으로 규정했고, 이를 성리학 즉 정학에 대한 대립적 사상으로 해석해서 배격했다. 이로서 조선왕조 정부에서도 1백여 년간에 걸쳐 천주교에 대한 탄압을 강행하게 되었다. (주석 2)

동학은 흔히 서세동점의 물결에 따라 밀려온 서학(西學)의 대칭개념으로 이해된다. 하지만 동학의 '동(東)'은 지정학적 대칭 용어가 아닌 우리나라 고대의 국호에서 기원한다.

옛부터 우리 나라는 '동방에 있는 나라'라고 하여 동국(東國)이라 불렀다. 조선시대 식자들이 이해한 '동국'이란 관념은 대체로 지리적으로는 요하(遼河)를 경계로 하는 '만리(萬里)의 국가'를 상정하였다. 중국에서는 동이(東夷)라고도 하였다. '동'과 관련하여 많은 저술이 이루어진 것은 이것이 국호이기 때문이었다.

<동국여지승람>·<동국명산기>·<동국문헌>·<동국문헌비고>·<동국문헌절요>·<동국사략>·<동국세시기>·<동국여지승람>·<동국지리지>·<동국통감>·<동사강목> 등 일일이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이다. 한의학을 동의(東醫)라 부르고, <동의보감>은 우리나라 의서를 한데 모아 편찬한 조선조 때의 으뜸가는 의학서를 일컫는다. 

동학은 우리 문화, 우리 학문, 우리 철학, 우리 종교, 우리 사상을 집대성한 것으로, 결코 배타적이거나 그렇다고 국수적이지 않은 시대정신이고 민족사상이고 민족종교이다.  

수운에 의해 창도된 동학은 유교의 인륜, 불교의 각성, 선교의 무위와, 수운 자신의 인시천(人侍天) 사상을 접화군생(接化群生)한 천도사상을 말한다. 동학의 중심개념은 인시천 즉 천인합일 사상으로 사람 섬기기를 하늘 섬기듯 하고(事人如天), 억조창생이 동귀일체(同歸一体)로 계급제도를 부정하며,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천부인권(人乃天)을 내세우는 신앙·철학·사상의 융합체이다. 

성리학을 기반으로 하는 조선의 봉건체제와 대립하여 수운이 창도한 동학은 개항 후 그 모순이 집중적으로 심화되어 온 삼남 지방을 토대로 크게 발전하였다. 동학혁명사 연구자들에 따르면, 동학농민혁명은 조선 봉건체제 해체사의 최종적 도달점이며 근대조선 민중 해방운동사의 본격적인 출발점이 된다. 

첫째는 18세기 이후 악화된 조선왕조 양반사회의 정치적 모순, 둘째는 삼정의 문란, 셋째는 19세기 이후 서세동점의 위기 속에서 국가 보위의식의 팽배, 넷째는 전통적인 유교의 폐해에 따른 지도이념의 퇴색, 다섯째는 서학의 도전을 민족적 주체 의식으로 대응하려는 응전, 여섯째는 실학에서 현실 비판과 개혁 사상에 영향받은 피지배 민중의 의식 수준의 향상과 높아진 지각도 등을 들 수 있다.   

동학은 주자학적 전통으로 굳게 닫힌 전근대의 강고한 철벽에서 인권·평등·자존을 바탕으로 백성들을 깨우치고, 삶의 주체로서 민족정신을 일깨워서 근대의 문을 열게 되었다. 봉건적 전근대의 철문을 닫고 근대의 광장을 연 것이다. (주석 3)


주석
1> 성강현, 앞의 책, 44~45쪽.
2> 조광, <조선후기 서학의 수용층과 수용논리>, <역사비평>, 1994년 여름호, 282쪽, 역사비평사.
3> 김삼웅, <해월 최시형평전>, 26~27쪽, 미디어 샘, 2023.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동학·천도교 4대교주 춘암 박인호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박인호평전#박인호
댓글1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