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미국 테크 시장의 변동성과 맞물린 사모신용(Private Credit) 시장의 불안에 대해 김용범 대통령비서실 정책실장이 페이스북에 올린 글을 본인의 동의를 얻어 게재합니다.

▲미국 뉴욕증권거래소(NYSE)에서 트레이더들이 업무를 보고 있다. (자료사진) ⓒ AFP 연합뉴스
1997년 외환위기의 여파가 채 가시기도 전에 발생한 1999년 대우채 사태는, 금융시장에서 신뢰가 무너질 때 시스템이 얼마나 빠르게 무력해질 수 있는지를 보여준 사건이었습니다. 당시 재계 서열 2위였던 대우그룹의 부실이 드러나자 대우채권이 편입된 펀드들로 환매 요청이 빗발쳤습니다. 자산의 시가평가 원칙이 확립되지 않았던 시절이라, 장부상 가치에 대한 의구심은 삽시간에 펀드런으로 이어졌습니다.
당시 저는 재경부 금융정책국 실무 책임자로서 동료들과 머리를 맞대고 위기 돌파를 위한 대안을 모색했습니다. 우리 팀이 논의 끝에 제안했던 방안은 환매 시점에 따른 상환 비율의 차등 적용이었습니다. 즉시 환매를 원하는 투자자에게는 낮은 비율을 적용하고, 일정 기간 인내하는 투자자에게는 정상에 가까운 비율을 보장하는 구조였습니다. 이 비상 조치를 통해 밀려드는 환매 압력을 분산시켰고, 대우그룹 부도라는 충격이 금융 시스템 전체의 붕괴로 번지는 것을 막을 수 있었습니다. 그때 절감한 금융의 본질은 명확합니다. 금융은 숫자로 움직이는 듯 보이나, 그 근간을 지탱하는 것은 결국 시장의 신뢰입니다.
금융을 지탱하는 건 결국 시장의 신뢰
최근 미국 테크 시장의 변동성과 맞물린 사모신용(Private Credit)시장의 불안을 보며 낯익은 기시감을 느낍니다. 세계 금융의 중심인 월가에서도 유사한 장면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Blackstone, Blue Owl Capital 등 대형 운용사들의 사모신용 펀드에서 환매 제한(Gate)이나 유동성 관리 이슈가 거론되는 상황입니다. 이는 과거 신흥국들이 겪었던 자산-부채 만기 불일치와 자의적 평가 모델의 한계가 선진국 시장에서 재현되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이번 사태의 역설은 위기의 일차적인 원인이 AI 기술의 실패가 아니라 오히려 '압도적인 성공'에 있다는 점입니다. 지난 수년간 월가는 SaaS(서비스형 소프트웨어)기업들의 반복적인 구독 매출을 우량 담보로 간주해 왔습니다. 그러나 현장의 AI는 기존 소프트웨어 산업의 진입장벽을 예상보다 훨씬 빠르게 잠식하고 있습니다. AI가 코딩과 운영의 효율성을 극대화하는 데 성공할수록, 기존 소프트웨어 기업들의 현금흐름 가치는 하락하고 담보력은 약화됩니다.
이러한 변화는 개별 기업의 가치 하락에 그치지 않습니다. 사모신용 펀드들이 상당 부분 이러한 기업들에 대한 대출로 포트폴리오를 구성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할 때, 차주의 상환능력 약화는 곧 대출 자산의 가치 재평가로 이어집니다. 이는 펀드의 순자산가치(NAV)에 대한 하방 압력으로 작용하며, 평가에 대한 불확실성이 커질수록 투자자의 신뢰를 흔들고 환매 압력을 증폭시키는 요인이 됩니다.
여기에 저금리 시대의 낙관이 만든 구조적 부실이 더해졌습니다. 당장 이자를 낼 현금이 부족한 기업들에 대해 이자를 원금에 가산해 주는 PIK(Payment-in-Kind) 대출 관행은 리스크를 미래로 미루었을 뿐입니다. 기술 변화의 속도가 금융 시스템의 완충 능력을 앞지르면서, 그동안 가려져 있던 완화된 기준의 대가가 유동성 경색으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사모신용 시장의 불안은 자산의 건전성 문제를 넘어, 투자 구조와 투자자 구성의 불일치에서 비롯된 측면이 큽니다. 특히 비유동성 자산을 기반으로 하면서도 일정 수준의 환매를 약속하는 '준유동성(semi-liquid)' 구조와 개인 투자자의 결합은 본질적인 긴장을 내포합니다. 이러한 긴장은 시장이 안정적일 때는 드러나지 않지만, 신뢰가 흔들리는 순간 빠르게 유동성 압박으로 전환됩니다.
사모신용 시장 불안에서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떠올리는 시각도 있습니다. 당시 위기의 신호탄은 2007년 여름 프랑스 BNP 파리바가 서브프라임 관련 펀드의 환매를 제한했던 조치였습니다. 돌이켜보면 그 사건은 금융 시스템 전체의 취약성을 드러낸 초기 경고였습니다. 최근 사모신용 시장의 환매 제한 조치를 두고 이를 또 하나의 위기 전조로 해석하려는 시각이 존재하는 이유입니다. 저 역시 처음에는 상당한 긴장감을 가지고 이 사안을 들여다보았습니다.
이번 사태가 던지는 경고
다만 이번 사태를 2008년식 금융위기와 동일선상에서 보는 것은 경계할 필요가 있습니다. 현재의 충격은 복잡한 파생상품에 의한 시스템적 폭발이라기보다, 특정 섹터(테크)에 집중된 과대평가와 유동성 불일치가 해소되는 과정에 가깝습니다. 국내 금융기관의 사모신용 익스포저 역시 관리 가능한 범위 내에 있으며, 우리는 과거의 경험을 통해 자산 건전성과 유동성 관리 체계를 강화해 왔습니다. 투자심리 위축은 주시해야겠으나 시스템 위기로 확대 해석할 단계는 아닙니다.
그럼에도 이번 사태가 던지는 경고는 엄중합니다. 이는 이른바 'AI 버블론'에 대해 본질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AI가 기존 산업 질서를 파괴하는 속도만큼 새로운 수익 모델이 금융 시스템 안에서 안착되지 못한다면, 시장은 창조적 파괴 이후의 공백기를 견뎌야 합니다. 금융은 본질적으로 과거 데이터를 바탕으로 미래를 가격화하지만, AI는 그 전제가 되는 산업 구조 자체를 실시간으로 바꾸고 있습니다. 기술 변화와 금융 평가 모델 사이의 시차를 관리하는 것이 정책적 핵심 과제가 될 것입니다.
정책은 기술의 화려함보다 그 이면에 숨겨진 취약한 연결고리를 먼저 보아야 합니다. 월가의 혼란을 반면교사 삼아 우리 역시 비은행권 자산 평가의 투명성을 높이고 유동성 대응력을 재점검해야 합니다. 탐욕은 언제나 새로운 기술의 이름을 빌려 돌아오기 마련입니다. 금융의 신뢰를 지키는 최후의 보루는 투명하고 엄정한 원칙뿐입니다.
정부는 글로벌 금융 시장의 미세한 균열이 국내 실물 경제와 자본시장으로 전이되지 않도록 선제적인 모니터링 체계를 가동하고, 비은행권 금융 안정성을 철저히 점검해 나가겠습니다.

▲김용범 정책실장이 9일 청와대 춘추관에서 이날 오전에 열린 중동상황 관련 비상경제점검회의 결과 브리핑을 하고 있다. 2026.3.9 ⓒ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