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준홍김종필 처남이자 박상희 선생 유복자 박준홍 전. 대한축구협회장(좌)과 필자(우). ⓒ 박준홍
지난 6월 15일 아침, 카톡을 열자 고향 후배 박준홍 전 대한축구협회장이 초대장을 보냈다. 잔글씨라 돋보기안경을 끼고 읽었다.
"초대합니다. 김종필 총재 탄생 100주년 기념 및 8주기 추도식." 초대장이었다. 나는 지난해 12월 10일로 만 80세를 넘긴 이후 나들이를 극도로 자제하고 있다. 그 무렵 친구 모임에 갔다가 낙상하여 몇 달 고생했기 때문이다. 카톡을 닫지 못한 채 한동안 고심했다. 사실 나는 교육자로 평생 정치권과는 관계없이 살아온 사람이다. 그렇게 볼 때, 내가 꼭 그 행사에 참석해야 할 이유는 없다.
하지만 고향 구미에서 어린 시절을 생각하면 김종필 총리 부인 박영옥 여사의 친정과 우리 집은 한때 이웃사촌으로 서로 쌀뒤주 사정까지 알고 지낸 돈독한 터였다. 더욱이 박영옥 여사가 구미초등학교 교사로 재직할 때, 나의 아버지도 동료 교사였다. 게다가 그분 선친 박상희 선생은 나의 아버지가 매우 존경하고 따랐던 민족주의자로 고향 사람들로부터 크게 존경을 받았던 어르신이었다.

▲박상희 선생일제강점기 선산구미 지역 민족지도자 박상희 선생 ⓒ 박준홍
1950년 후반 어느 날, 신문사네(고향마을에서는 그 댁을 그렇게 불렀음) 큰따님(박영옥)이 남편(당시 김종필 중령)과 따님 등 세 가족이 서울에서 친정에 왔다가 장 구경을 겸하여 장터 어귀의 우리 집에 들르셨다. 그날 우리 집 마루에서 세 식구는 물 한 모금 드시고 가셨다. 그때 나는 까까 머리의 머리 때 낀 시골 소년으로 '예리'라는 JP 따님 이름이 이국적이라 오래도록 기억에 남아 있었다.
그때 어른들(나의 할머니와 고모)은 신문사네 사위(김종필)는 세상에 없는 '애처가'라고 칭찬이 아주 자자했다. 결혼 후, 자기 부인을 대학에 진학 시키는 신식 신랑이며, 자기의 지프로 자택 청구동에서 아내가 다니는 용산구 청파동 학교(숙명여대)까지 날마다 등교를 시켜 준다고도 했다. 아마 그 당시로써는 그런 일은 좀처럼 드문 일이었을 것이다.(관련기사:
박영옥 여사 빈소에 다녀와서)

▲김종필 가족결혼 초기의 김종필 중령가족 (좌로부터 따님 김예리. 김종필. 박영옥) ⓒ 박준홍
우리나라 속담에 "처삼촌(妻三寸) 벌초 하듯"이란 말이 있다. 이는 그다지 정성을 들이지 않고 눈가림으로 대충대충 일할 때 쓰는 말이다. 박정희 대통령과 김종필 국무총리와 사적 관계는, 김종필 총리 편에서는 박정희 대통령은 처삼촌이다. 김 총리의 작고하신 장인 고 박상희 선생의 막냇동생이 박정희 대통령이다.
경상도 벽촌 구미 금오산 기슭 촌놈 박정희 소장이 5·16 쿠데타에 성공하기까지는 그런 인척 관계로, 치밀하고 머리 회전이 빠른 김종필 중령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또한, 박정희 대통령 편에서 김종필 전 국무총리는 그분이 아버지 이상으로 따르고 존경하며 물심양면 성원해 준 셋째 상희 형 맏딸 박영옥의 신랑인 '조카사위'다. 또한, 김종필 - 박영옥, 이들 부부의 사실상 중매는 박정희가 선 셈이었다.
박상희 선생 집안과 우리 집은 인척 못지않게 매우 가까웠다. 그래서 나는 어려서부터 그 집안의 많은 이야기를 듣고 자랐다. 하지만 나에게 그런 얘기를 들려주신 분은 이제 거의 타계하셨다. 그래서 이 글의 신뢰도를 위하여 '그렇다, 카더라'보다 <김종필 증언록>과 그동안 내가 직접 보고 들은 얘기로 이 기사를 쓴다.
거사(5.16)를 앞두고 펜 끝으로 상념이 모이고 있었다. 영국 명재상 벤저민 디즈레일리의 명언이다.
"인생은 짧다. 시시하게 굴지 말자."
청소년 시절 내가 감명 받았던 말이다. 길고 어두운 터널을 지났다. 나는 다시 문장을 가다듬었다.
"은인자중 하던 군부는 금조(今朝) 미명(未明)을 기해서 일제히 행동을 개시하여 국가의 행정‧ 입법 ‧ 사법의 3권을 완전히 장악하고 …."
펜은 거침없었다. 글에 제법 힘이 담아졌다고 여겨졌다. 은인자중 하던 군부의 중심은 나였다. 궐기문 서두를 그렇게 시작하고, 다음으로 구체적인 공약을 썼다. '반공(反共)을 먼저 꺼냈다.
"혁명 공약 제1. 반공을 국시(國是)의 제1 의(義)로 삼고…."
우리 대한민국이 가야 할 방향, 그러나 놓치고 있는 곳을 먼저 향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반공을 앞에 놓여야 한다. 혼돈을 정리하고, 국가의 안위(安危)를 먼저 따져야 했다.

▲박정희와 김종필5. 16 직후 박정희와 김종필 ⓒ 국가 기록원
박정희 "이거 나 때문에 썼겠구먼"
결정적 이유는 숨겨져 있었다. 거사의 중심, 박정희 전 대통령과 관련이 있는 일이다. 그분(박정희)은 오래전부터 공산주의자라는 의심을 받았다. 해방 후 그분이 남로당에 휘말려 들어간 사건 때문이었다. 그러나 좌익의 혐의는 부당했다. 그는 잠시 길을 잃었는지는 몰라도 결국 대한민국 군에 복귀해 공산주의 북한과 맞서 싸웠다. 누구보다 나는 그 점을 잘 알았다.
그런데도 적지 않은 사람이 그를 의심했다. 이들은 공공연히 "박정희는 빨갱이다"라고 떠들 정도였다. 미국도 의심의 눈길을 거두지 않았다. 당시 한국에 주둔 중인 미8군 사령관 매그루더는 박정희 소장을 예편 시키라고 한국 정부에 요구했다. 따라서 나는 궐기군. 지도자인 박 소장에게 걸린 그런 혐의를 불식하기 위해서도 반공을 공약 1호로 내세워야 한다는 판단을 내렸다.
뒤에 벌어진 이야기를 먼저 꺼내는 격이지만, 궐기문을 인쇄하러 가시 전, 박 소장은 이 반공 국시 조항을 읽으면서 나를 보고 빙그레 웃었다. 그러면서 혼잣말 비슷하게 "이거 나 때문에 썼겠구먼…." 이라고 말했다. - <김종필 증언록Ⅰ> 24~26쪽 축약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박도 페북에도 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