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고령인구비율(2000~2019)출처 : KOSIS(통계청, 고령인구비율), 2020.09.06
하지만 지금도 그러한 방식의 대규모 신축 주택 공급이 한국 사회에 필요한 조치일까? 그때와 달리 현재는 인구는 정점에 다다라 줄어들 예정이고 인구 구성은 빠르게 고령화되고 있다. 주택의 수도 1980년대와 지금은 다르다. 교통이 편리한 특정 지역에 신규주택 수요를 제외하면 주택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고 보긴 어렵다.
인구가 줄어들 것을 고려하면 이전과 같은 대규모 택지개발은 우려스럽다. 1980년대보다 임금 대비 주택가격 격차가 커진 것을 고려한다면 지금은 주택 자체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부담 가능한 주택이 필요하다. 대규모 주택 공급으로 주거비를 안정화하겠다고는 하나 대규모 주택 공급만으로 주택가격이 저렴하게 유지되었던 것도 아니었다.
주거환경 면에서도 달라졌다. 인구가 고령화됨에 따라 휠체어를 타더라도 이동에 불편함이 적은 주택이 다수 필요하다. 유니버셜 디자인(universal design)이라는 개념이 주택에 도입된 것이 최근임을 고려하면 지금까지 지어진 주택 중에 엘리베이터가 있고 화장실 문 폭도 넓어서 휠체어를 타고도 불편하지 않게 사용할 수 있는 주택은 많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월세 수익을 최대화하기 위해서 한 호당 면적을 가능한 좁게 하여 여러 호를 공급하고 엘리베이터를 두지 않는 주택이 유행하듯 지어지고 있는 것을 고려하면 고령 1인 가구가 거주할 수 있는 주택은 비율적으로 점점 줄어들고 있는지도 모른다.
주택을 공급하는 방식에서도 다른 선택을 고려할 수 있다. 과거엔 판잣집, 불법 주택 등 리모델링을 통해 재사용하기 어려운 주택이 다수였다면 지금은 리모델링을 통해 재사용 할 수 있는 주택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최근에 제기되고 있는 환경 문제를 고려하면 부수고 새로 짓는 것보다 리모델링 비용이 더 든다고 하더라도 리모델링으로 주택을 공급할 수도 있다.
이처럼 지금 우리는 어떤 주택이 필요하며, 그 주택은 어떻게 공급돼야 하는가 하는 질문을 다시 던지고 논의해야 할 때다. 과거에 효과적이었던 문제해결 방식이 현재에는 적합하지 않을 수 있다. 그만큼 사회가 많이 변하고 있다.
사회적 합의를 위한 정당의 역할
분야마다 변화에 적응하기 위해 적합한 대응이 논의되고 있을 것이다. 개별로 그러한 노력이 이뤄지더라도 공통으로 해야 할 일이 있다. 바로 그 변화의 토대를 만들 정치적 합의를 만드는 일이다.
공공 자원을 배분하는 기준을 바꾸는 것은 단순히 어떤 시각에서의 합리성만으로 가능하지 않다. 그 사회 구성원의 합의를 전제로 한다. 그 합의가 있어야 여러 가지 시도들이 현실에서 구현될 수 있다. 그 합의를 만드는 것은 정당의 역할이다. 정당이 사회 변화의 토대가 될 시민적 합의를 형성하는 데 실패한다면 그와 관련한 제도를 현실에 맞추어 바꾸어가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한국 사회의 정당은 변화되는 사회에 필요한 합의를 구축하기 위해 그와 관련된 노력을 어떻게 하고 있는가. 기존의 질서에서 과소대표되고 있는 이들이 자신의 처지에 맞는 정치적 의사를 밝힐 수 있는 집단이 될 수 있도록 지원하고 그곳에 귀 기울이는 노력이 모든 당에 절실히 필요하다.
나는 정당이 과거에 머물지 않고 새로운 시대를 열어가기 위해 만나야 할 유권자 집단으로 3가지 집단을 우선 제시하고 싶다. 1, 2인 가구 정체성을 가진 시민, 비정형 노동자 정체성을 가진 시민, 세입자 정체성을 가진 시민이다.
현재의 한국 사회는 과거와 달리 1인 가구가 일반적이며, 비정형 노동이 다수화되고 있다. 소득으로 주택을 구입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해졌다. 다수의 사람이 4인 가구로 살고, 이미 정규직이거나 정규직이 될 수 있었으며, 주택이 공급되면 월급으로 주택을 살 수 있었던 시대에는 4인 가구, 정규직, 소유권자라는 기준점이 정책설계를 위한 사회적 표준지표가 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과거와 다르다. 이젠 그 익숙한 '생각'과 '제도'를 다시 돌아볼 때다. 새로운 집단의 이해를 포함하여 새로운 '생각'과 '제도'를 세워야 한다.
앞서 글에서 '1인 가구 집단'이 아니라 '그러한 정체성을 가진 시민'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1인 가구로 지금 살아가고 있음에도 '언젠가 4인 가구가 될 테니깐 4인 가구 입장에서 생각해보면'이라고 자신의 필요를 조정하거나, 세입자로 살고 있음에도 예비소유권자로 스스로를 여기는 일이 흔해서이기 때문이다. 1인 가구, 비정형 노동, 세입자로 살아가는 시민이 현재 삶에서 느끼는 필요를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 지금은 더욱 필요하다. 현재의 처지를 스스로 임시화하고 주변화하는 익숙함에서 벗어나야 현실을 있는 그대로 다룰 수 있는 공론의 장을 만들 수 있다.
현실을 반영한 이전과 다른 방식의 '존엄의 울타리'를 쳐야 한다. 그것이 어떤 모양인지 필자도 알지 못한다. 다만 우리가 지금까지 보았던 모양과 다를 수 있겠다는 생각은 한다. 정규직이 아닌데도 안정적 소득과 계획 가능한 노동, 혈연 관계망이 아니면서도 삶의 불안을 나누고 돌보는 공동체, 주택을 소유하지 않고도 주거계획을 세울 수 있는 집에 대하여 말이다.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찾아야 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지금 비정형 노동으로 살아가는 사람들, 1·2인 가구로 지내는 사람들, 빌려 쓰는 수 많은 시민들을 삶을 사회가 외면하게 두는 것이다.
우리는 시대 변화에 맞는 사유와 제도를 찾기 위해 그를 추동할 수 있는 인프라를 구축해야 한다. 그것은 정치적 합의를 통해서만이 가능하다. 정치적 공간에서부터 현실을 드러내고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에게 말을 건네야 한다. 합의 가능한 지점을 제안하고 찾아야 한다. 시간이 걸리고 노력이 필요한 일이다. 이를 위한 인력과 자원을 다룰 기구가 정당별로 설치되길 간절히 바란다. 이 시작이 지금도 그리 이르진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