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6.15 14:06최종 업데이트 23.06.15 1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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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동산 정책 전문가이자 토지정의 운동가인 헨리조지센터 전강수 대표가 경제정의와 부동산 문제에 관해 정론을 피력하고 그때그때 부각하는 경제 이슈를 해설하는 '전강수의 경세제민'을 연재합니다.  '경세제민'은 세상을 잘 경영해 국민을 편안히 한다는 뜻으로 썼으며 이 말을 줄인 것이 '경제'이기도 합니다. 필자는 대한민국이 해방 후 농지개혁으로 잠시 실현했던 '평등지권 사회'를 회복하기를 꿈꿉니다.[편집자말]
필자는 1987년 3월 대학의 전임 교수로 임용되어 2023년 2월 말 정년을 2년 앞두고 명예퇴직했다. 한 대학에서 무려 36년간 근무한 것이다. 전임 교수가 되기 전 2년 동안 시간강사로 이 대학 저 대학에서 강의했으니 대학 교원으로 지낸 세월이 38년이다. 그 세월을 되돌아보니 대학도, 교수도, 대학 문화도 엄청나게 변했다는 것을 깨닫는다. 

사실 40년 가까운 세월이 지나는 사이에 한국의 대학이 어떻게 변했는지 정확하게 정리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또 정리한다고 하더라도, 그 내용과 부합하지 않는 대학과 교수도 많을 것이다. 이런 한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필자는 이 짧은 글에서 그 변화를 한번 정리해 보고자 한다. 무모한 시도가 되기 쉬운 이런 작업을 하려는 이유는 대학의 변화가 한국 사회 전체의 변화를 집약적으로 반영하고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자신과 자신이 속한 대학이 여기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할 교수도 있을 것이다. 이 글은 그런 대학과 교수를 향한 것이 아님을 밝혀둔다.


지난 40년간 한국 대학의 변화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점은 대학 교수의 변화다. 1990년대까지만 해도 한국의 대학 교수 중에는 지식인이라 부를 만한 사람이 많았다. 주지하듯이, 지식인이란 진리를 탐구하고 세상의 문제점을 진단하여 적절한 해결책을 제시하기 위해 고투하는 존재다. 그러니까 늘 책을 가까이하고, 현실 사회의 동향을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 노력한다. 동료들끼리 같은 주제를 놓고 토론하는 시간도 많다.

지식인은 오랜 시간 얻은 지식과 정보를 가지고 깊이 생각한다. 그 결과 사안에 관한 전체 그림이 그려지고 의미 있는 내용으로 서술할 자신이 생기면, 그때부터 논문이나 책을 집필한다. 자신의 주장을 섣불리 어설프게 만들어 내는 것은 수치스럽게 여긴다. 세상을 바꾼 뛰어난 저작은 이들 지식인에게서 나왔다.

필자는 교수가 당연히 지식인인 줄 알고 교수 되는 길을 걷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그런 분들이 대학 안에 많았다. 청년 연구자 시절 그분들을 닮기 위해 내 나름대로 많이 노력했다. 여러 책을 읽었고, 중요한 주제에 관해서는 깊이 생각했다. 뭔가 써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 때는 부족한 부분이 떠올라서 선뜻 집필에 나서지 못했다. 

대학 평가 제도, '논문 제작공' 양산

언제부터인지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지만, 대학을 평가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실제로 교육 당국은 대학 평가 제도를 도입했고, 그것을 기초로 대학 정원이나 대학 지원금을 결정하기 시작했다. 대학 평가제도에서 교수 평가는 핵심 사항으로 포함됐다. 교수의 활동을 연구, 교육, 봉사 등으로 나눈 다음 각 영역에 필요한 여러 활동 사항에 대해 점수 기준을 설정하고 개별 교수에게 점수를 매기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평가 대상이 되는 활동이 많지 않았으나 시간이 갈수록 점점 평가 항목이 늘어났다. 

지금은 대학 교수의 일거수일투족에 점수가 부여된다. 평가 항목이 수십 가지에 이르니, 점수를 잘 받으려면 엄청난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다. 관련 활동을 등한시 하는 경우 감점되기도 한다. 교수 업적 평가 점수는 연봉으로 연결된다. 교수 사회에서 수준 높은 연구 성과를 내서 인정받으려는 분위기는 점점 사라지고, 단기간에 논문 편수를 늘려서 연구 업적 점수를 많이 받으려는 문화가 정착되었다. '논문 쓰느라고 연구를 못 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는데, 오늘날 교수 사회의 분위기를 제대로 풍자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씁쓸했던 기억이 난다. 

예전과 비교할 때, 요즘 교수들은 책을 읽고 깊이 생각하는 연구 활동을 하지 않는 것 같다. 그저 논문 쓰기 위해 다른 사람들의 논문을 대충 훑어보고 끝내는 경우가 많다. 논문을 여러 편 쓰기는 하지만, 자신이 다룬 주제에 관해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이런 분위기에서 수준 높은 연구 성과가 나오기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한마디로 말해, 오늘날 한국 사회의 교수들은 지식인이라기보다는 '논문 제작공'에 가깝다. 자신의 연구 성과가 학문의 발전에 기여하고 세상을 바꾸는 역할을 할 것인지 아닌지는 관심의 대상이 아니다. 논문 제작공들의 목표는 오로지 주어진 시간 안에 가능한 한 더 많은 논문을 써내는 데 있다.

문제는 이들이 써내는 논문에 대해 사회적 수요가 거의 없다는 사실이다. 한쪽에서는 열심히 뭔가를 생산해 내는데, 아무도 그것을 소비하려고 하지 않으니 엄청난 낭비가 아닌가.
 

요즘 교수들의 사회 참여는 매우 저조하다. 이유를 들어보면, 논문 쓰느라, 업적 평가 점수 따느라 사회 운동에 시간을 낼 여유가 없어서 그리됐다는 것이다. 사진은 강제동원 해법 철회를 위한 경희대 교수 126명 시국선언 장면 2023.4.4 ⓒ 권우성

 
예전 교수들 가운데는 아무 대가도 받지 않고 자발적으로 학생들을 모아서 추가 강의를 하거나, 동아리 활동을 적극 지원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학생들은 교수들의 노력에 감동해 그들을 존경하고 닮고 싶어 했다. 사회 운동에 열심을 내는 교수들도 적지 않았다. 시민단체에 참여하는 교수들이 넘쳐났고, 그들의 열정적인 노력으로 수준 높은 정책 대안들이 만들어졌다. 그들에게 경제적인 대가는 없었다. 오히려 자기 돈을 쓰는 사람들이 태반이었다. 이들이 만들어낸 정책 대안 중에는 실제 정부 정책으로 채택되는 것들도 있었다. 

반면 요즘 시민단체나 사회단체의 내부를 들여다보면 교수들의 참여는 매우 저조하다. 이유를 들어보면, 논문 쓰느라, 업적 평가 점수 따느라 사회운동에 시간을 낼 여유가 없어서 그리됐다는 것이다.

대학 밖에서 지식인의 역할을 훌륭하게 해내고 있는 한 인사에게서 이런 말을 들었다. 기자들이 기사 작성에 필요한 멘트를 '따기' 위해 교수나 박사들에게 연락하면, 내용을 모르고 있어서 먼저 관련 내용을 설명해주고 의견을 들어야 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현실 사회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전혀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는 말이다. 이렇게 된 배경에는 점수로 논문 대량 생산을 강요하는 분위기가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조선 후기 성리학이 공리공담(空理空談)으로 흘렀던 상황과 매우 유사하다.

신자유주의의 득세와 대학의 퇴락

대학 사회에서 지식인이 사라진 것은 신자유주의의 득세와 무관하지 않다. 주지하듯이 신자유주의는 1980년대에 마거릿 대처와 로널드 레이건이 주창한 이래 후계자들에게 계승되었는데, 그들은 전 세계 여러 정당에 두루 퍼져 있다. 이 이념은 2007~2008년의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그리고 이어진 침체기에 실패가 명백히 드러났는데도, 오히려 활기를 회복하고 있다. 대한민국도 예외는 아니다. 

신자유주의와 대학 문화의 변화가 무슨 관계가 있는지 간단히 이야기해 보자. 신자유주의에서는 시장이 경제 조직의 최적 형태 또는 기본값이며, 규제가 적을수록 잘 작동한다고 가정한다. 경쟁 시장은 효율에는 상을 주고 비효율에는 벌을 줌으로써 사람들에게 행위를 '개선'할 동기를 부여한다. 따라서 정부는 가능한 한 많은 것을 민영화해야 한다. 금융시장에 대한 규제는 철폐해야 하며, 노동시장은 유연하게 만들어야 한다. 

공공 부문에서 민영화할 수 없는 부분이 있으면, 거기서는 실적표를 만들어 순위에 따라 상을 받거나 벌을 받도록 해야 한다. 학교, 대학, 공기업, 병원, 박물관 등이 지원금을 놓고 경쟁하게 만드는 것이다. 조직 내 구성원들에게도 똑같은 원칙이 적용된다. 경쟁력을 강화한다는 명분으로 말이다. 

여기에 저항하고 싶은 사람도 있겠지만, 신자유주의 사회에서 그것을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다. 시장을 이용하고 실적표를 의식하며 경쟁하는 삶은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선택이 되었다. 오늘날 대한민국 대학은 신자유주의라는 거미줄에 걸려든 곤충같이 되고 말았다. 교수 중에 진짜 지식인이 되고 싶었던 사람들은 답답함을 토로한다. 날이 갈수록 자신이 속한 대학이 이상적인 모습에서 멀어지니 말이다. 자기 신세도 처량하다고 느낀다. 초등학생에게도 하지 않을 점수 통제 아래에서 일거수일투족 조심해야 하고, 연구와 교육 외에 잡무도 엄청나게 늘어나니 말이다. 

대학의 퇴락은 도대체 누구의 책임일까. 제도를 도입한 정부의 책임일까. 애초에 미국식 신자유주의 제도를 무비판적으로 소개한 교육학 전공 교수들의 잘못일까. 아니면 말없이 제도에 순응한 대학 당국의 책임일까. 그것도 아니면 지식인 본연의 자세를 버리고 논문 제작공의 삶을 살아가는 교수의 잘못일까. 이 모든 이에게 일말의 책임이 있겠지만, 진짜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지 가리는 것이 중요하다. 

신자유주의의 영향이 강하다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러나 이를 이용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 문제다. 그릇된 제도와 문화가 누구의 잘못 때문인지 밝히려면 그 제도와 문화로 이익을 얻는 사람이 누구인지 따져보면 된다. 

대학 교수들이 업적 평가 점수에 매달려서 논문 제작공으로 지내면, 이익을 누리는 사람이 누구일까. 부정의한 경제 질서를 이용해 이익을 얻는 기득권층, 비리 사학재단 관계자들과 비리 대학 운영자들, 대학 지원금 예산을 들고 전국 대학들을 쥐고 흔드는 관료들이 떠오른다. 대학 교수들이 지식인의 정체성을 가질수록 골치 아파지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따로따로 지내지 않는다. 서로 긴밀하게 연결해 막강한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있다. 이 네트워크의 영향력은 사회 곳곳에 미치고 있다. 언론과 정치권도 이 네트워크에 포섭된 느낌이다. 앞에서 대학이 신자유주의라는 거미줄에 걸려든 곤충 같다고 말했지만, 사실은 대학뿐만이 아니다. 온 사회가 거기에 걸려들고 말았다.

깨어 있는 시민의 연대가 답

신자유주의 사회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것은 불가능하다 할지라도, 어느 정도 그 영향력을 막아내는 것은 가능하다. 하지만 그 일을 개인이 해낼 수는 없다. 개인 차원에서 시도할 수는 있겠지만 얼마 못 가서 포기할 수밖에 없다. 문제점을 깨달은 시민들이 연대해서 신자유주의의 실체에 대해서 학습하고,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생활 현장에서 작은 일을 감당하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 연대는 저항의 배경이자 대안을 만드는 기초다. 

그래도 상대적으로 형편이 괜찮은 교수들은 연대해서 점수 통제를 받지 않겠노라고 선언해야 한다. 그리고 논문 편수를 무리하게 늘려서 약간의 돈을 더 받으려고 하는 마음을 내려놓아야 한다. 그 때문에 점수가 깎이고 연봉이 줄어들더라도 부끄러움을 느낄 필요가 없다. 이는 신자유주의의 대학 통제를 강요하는 트랙을 벗어나겠다는 선언이다. 교수들은 새로운 트랙에 서서 신자유주의의 문제점을 고발하고 대안을 제시하는 진짜 연구에 몰두할 필요가 있다. 큰 손해를 볼 것 같지만, 사실은 그 트랙을 걷는 것이 장기적으로 이득이다. 역사에 남을 연구 성과는 어디서 나오겠는가. 지식인 트랙 아닌가.
 

서울대학교 정문 ⓒ 권우성

 
이 칼럼을 쓰는 도중에 서울대학교 교원 징계위원회가 조국 교수의 교수직 파면을 의결했다는 보도를 접했다. 최종 판결이 나오지도 않은 상황에서 대학이 앞장서서 조 교수에게 극약 처방을 내린 것이다. 서울대보다 교수의 처지가 훨씬 열악한 사립대에서도 잘 일어나지 않는 이례적인 일이다.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서울대 징계위원회는 이런 어처구니없는 결정을 내렸을까. 같은 기준으로 징계위원 본인들을 평가할 때 자신이 있는 사람들이 몇이나 될까. 서울대조차 '지식인의 전당'이라는 자리를 걷어차는 듯해서 거북하기 짝이 없다(관련기사: 서울대 '교수직 파면'에 조국 측 "성급하고 과도, 즉각 항소" https://omn.kr/24c8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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