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12.07 18:08최종 업데이트 23.12.08 1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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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하는 사람의 기록을 담은 책을 소개한다. 송곳이 되어 준 작가의 경험과 필자의 지금을 들여다보아 변방에서 안방으로 자리를 넓혀 먹고사는 오늘의 온도를 1℃ 올리고자 한다. [기자말]
수상하고도 익숙했다. 보수적인 영남 지역에서 식구 많은 가난한 집안의 맏이로 태어나 겪은 날들 말이다. 차라리 전쟁에 가깝거나, 아니면 통과의례였다. 고1 교실, 졸업 후 곧바로 취업을 희망하던 또래 여학생 친구들은 남자 형제의 대학 학비를 버는 일을 일찌감치 예감하곤 했다. 나 역시 대학을 가지 않고 바로 일터에 취업하면서, 사정이 비슷한 언니들의 동심원에 들어섰다.

점심시간, 오빠의 대학 등록금을 부치고 왔다던 선배는 낯빛이 창백했다. 평소 에너지 넘쳤던 언니는 일 잘하기로 소문난 팀장급. 그 겨울의 하루, 언니는 퇴근 무렵까지 말을 아꼈다. 누구에게든 힘이 돼주곤 했던 언니는 일터에서 어떤 인내를 했던 걸까. 누군가는 고교 졸업 후 일찍 일하는 여성의 삶을 소수자의 그것으로 보겠지만, 빈민층 여성 맏이가 가족으로부터 받는 과제는 비슷비슷하고 꿈은 다양하다. 만나지 못한 우주만큼이나.


첫 직장에 입사한 2005년, 시계는 잘 돌아갔다. 미뤘던 대학에 진학하고 성적장학금으로 연명하며 간신히 졸업이란 걸 했다. 알바는 기본이었고 밤새가며 시험공부를 하느라 대상포진 등 소소한 잔병치레에 들고 낫기를 반복했다.

이윽고 두 번째 직장에 들어가려고 면접을 보러 다니기 시작했다. 당시 20대 중반 여성이던 내게 다섯 곳 중 세 회사는 늘 면접 끄트머리에 이렇게 물었다. "혹시 남자친구 있나요?" "있습니다." 답했더니 묘하게 미간에 주름을 내며 "결혼 계획 있어요?" 묻는 면접자.

그의 얼굴에서 '애 낳지 않고 오래 일할 미혼 여성을 인력으로 두고 싶어' 하는 욕망이 읽혔다. 지레짐작 겁먹었나 싶어 주변에 조언을 구했다. 그런 질문을 한 곳에 들어가지 말라는 선배가 반, '없다고 말하라'는 선배가 반이었다. 이후 면접부턴 "없습니다"로 일단락했다.

취업 시즌, 신기하게도 남자 동기들은 그 질문을 받지 않았다. 대학을 졸업하고도 '여성'이라는 게 특수한 처지처럼 느껴졌다. 술자리에서 가장 어린 여성 직원이 가장 높은 직급의 상사 옆자리에 앉는 일, 워크숍에서 신입 여성 직원들이 음식을 주문하는 일, 진보적이라고 여겼던 어느 인사가 저녁 먹으러 가는 길에 "난 여자 없으면 술자리 안 갑니다." 하지 말아야 할 농담을 들은 일, 상사로부터 "이 오빠가 말이야"라는 말을 듣고 두 귀를 의심했던 일 등등. 수상한 농담들은 차고 넘쳤다.

돌아 돌아 나름 스펙터클한 진로를 밟아왔다고 자부하는 내가 사회에서 익힌 감수성 중 하나란, 학력을 막론하고 '여성 그 자체가 핸디캡'이 될 수 있다는 고정 관념이었다.

'일 중독' 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
 

ⓒ 고정미

 
여자가 회사에서 정수기 물통을 거뜬히 갈아도, 공용화장실의 전등을 갈아 끼워도, 무거운 물건을 남들보다 두세 배로 들고 날라도, 가정뿐 아니라 회사의 대소사는 '남성이 중심'이라는 사내 분위기가 사계절처럼 감돌았다. 2000년대 초반만큼 성차별을 대놓고 하는 일은 줄어들었지만, 여성은 여전히 어딘가 미성숙한 존재로 취급당하곤 했다. 불안을 좀먹으며 나는 '일벌레'가 되어갔다.

시댁이 원하는 며느리상을 떨치고 '사근사근하지 않은 커리어우먼 되기'를 감행하는 일, 아이를 돌보는 데 정신을 할애하던 걸 회사에서 티 내지 않으려고 출근 전 옷매무새를 고쳐매는 동기를 멀겋게 바라보았다(동료가 육아를 위해 반차를 내고 퇴근하려고 하면 갖은 눈총을 받는 일을 나는 흔하게 목격했다). 나 역시 그 세계의 동심원에 속해 있었기에, 아팠다. 명치 언저리에서 뚝뚝 소리가 났다. 이십 대 시절부터 거쳐온 직장에서 본 하루의 조각들이다.

"그 나이까지 결혼 안 한 건 자아가 지나치게 강해서야"라는 모종의 편견에 맞서기 위해, 비혼 여성들 역시 우산이라는 걸 써야 했다. 저마다 고요한 차별이라는 비를 맞았다. 약속이라도 한 듯 나와 동료들은 더더욱 일에 몰두했다. 그것이 우산을 쓰는 일이었다. <흠결 없는 파편들의 사회>를 쓴 저자 김현미의 말마따나, "많은 여성이 자기 계발만큼이나 자기 책임감의 윤리를 내재화한 일-중독 상태가 되었다."

2018년부터 2023년까지 20대~60대 일하는 여성을 인터뷰한 이 책은 흩어진 파편처럼 놓여 있던 여성의 곡진한 일 경험을 그러모아 구조적 불평등의 지도를 훤하게 펼쳐 보인다. 누군가의 엄마 혹은 누나, 언니, 동생의 삶과 일 경로를 정밀하게 청취하고 분석해냈다. 여성이 돈벌이하는 하루를 이만큼 다각도로 조명한 책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한숨에 읽은 이유는 또 다른 대목에 있다.

책에서 주목할 점은 "여성의 적은 여성"이라고 여기는 세간의 편견이 어디서 기인하는지, 왜 많은 여성이 비혼을 택하고 돌봄 노동을 포기하면서까지 아이를 낳지 않는 삶에 뛰어드는지 연구했다는 데 있다. 아이 없는 '딩크족'으로 살아가는 사연은 부부마다 다양할 테지만, 저자는 임금 노동과 돌봄 노동을 모두 완수하는 것이 대다수 '남성 중심의 일터'에 진입하는 여성들에 매우 불리하게 작용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에 따르면 "(비혼-무자녀 상황을 선택함으로써) 한쪽을 말끔하게 정리해야 생존이 가능한 구조에서 여성들은 자발과 강제를 구분할 수 없도록 사회가 구성한 제한된 선택지 안에서 선택권을 잃거나, 고통스러운 선택으로 내몰려왔다."

즉, 오늘을 살아가는 여성들에게는 '자립'이 최대 관심사이며, 사회 안전망에서 자신이 생존할 수 있는지가 인생 최대 화두가 된 것이다. 아이를 낳고 기르는 여성들 역시 생계를 책임지며 일터에서 생존할 방법을 강구하며 자기 계발을 계속하는 굴레에 집중한다. 습관성 번아웃을 겪는다.
  
일터 문화 가리켜 저자가 '남성동성사회'라 한 이유  

저자는 여성의 일 경험을 둘러싼 여러 키워드를 13장의 챕터를 통해 파헤친다. 고학력, 스펙이 높은 중산층 여성이 가정 혹은 직장에서 받는 다양한 압박, '남자처럼 생존하라'는 최면에 빠질 수밖에 없는 일터 환경, 때론 공모하고 방관하면서 여성을 소수자로 내모는 사내 분위기, 20대 여성들이 직장에서 무리 지어 다니며 네트워크를 형성하는 이유, 같은 여성 내에서도 세대 간 갈등이 일어나는 원인 등이 그것이다.

책 <흠결 없는 파편들의 사회>는 남녀를 막론하고 한번쯤 궁금했을 법한 '일하는 여성들이 겪는 딜레마'를 분석해 이를 반복하지 않기 위한 '앎'을 터득하자고 제안한다.
 
"딸에 대한 새로운 기대가 생겨났다. 이런 관심은 다시 대중 미디어에서 좋은 소재로 가공되어 '딸 바보' 아버지와 같은 이미지를 만들어냈다. (중략) 실상을 보면 이로써 격상되는 것은 실제 '딸'의 삶이 아닌 딸의 요구에 적극적으로 반응하는 딸 바보 아버지의 지위다. 오히려 딸은 추가적 감정노동의 수행자가 될 뿐이다."
- <흠결 없는 파편들의 사회>(김현미) 중에서

더 교묘해진 기대 심리에 의해 자신을 혹독하게 채찍질하며 살아가는 여성들이 내 주위에도 많다. 대체로 공감 능력이 뛰어나며, 타인을 배려하고, 소위 돌려말하는 '쿠션어'를 많이 쓰는 여성들은 먼 곳에 있지 않다. 나 역시 직관적인 언어를 쓰기보다 빙 돌려 쓰는 언어를 택하는 생존 방식을 고수해 왔으니까.

대다수 남성들이 직관적인 언어를 쓺으로써 강해 보이는 이미지를 가정에서부터 강요당해온 것과도 비슷할 것이다. 얌전하며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 무성적 존재가 되는 일을 내면화시켜온 여성들의 서사는 마르지 않는 우물처럼 날마다 들려온다. 
 

책 <흠결 없는 파편들의 사회>. ⓒ 봄알람

 
가정에서 살 빼라는 말을 귀에 딱지가 앉을 만큼 듣고 마른 몸매, 높은 학력, 갈고 닦은 인성을 숙제처럼 수행한 다음 여성들은 입사한 직장에서 '남성 연대'가 난무하는 서열 문화를 정면으로 마주한다.

저자는 이 같은 일터의 문화를 가리켜 '남성동성사회'라 말하는데, 이때 남성들은 "여성이 사회적 권력이 없는 존재이며 따라서 여성의 평가는 자신들의 사회적 지위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여성을 대상으로 한 성폭력이 빈번하게 일어나는 이유다.

남성동성사회에서 여성을 조롱하는 문화를 습득한 후배 남성 직원은 똑같이 여성을 희롱함으로써 남성 집단 내 결속감을 다진다. 그렇지 않은 남성도 있기 마련이지만, 이 울타리를 넘기 위해 여성은 '털털하고 호쾌한' 특유의 정체성을 만들어냄으로써 남성 동료들과 어울리는 데 에너지를 쏟는 경우가 허다하다. 생존 전략 중 하나가 된 것이다.

드라마 혹은 여타의 영화에서 위풍당당하게 성희롱 사건을 폭로하거나 일상적 페미니즘을 실천하는 여성들은 넘쳐난다. 하지만 실제 일터에서 여성들은 남성동성사회에서 성평등을 해치는 이슈가 생기더라도 싸우는 일에 주저하는 경우가 많다. 돈벌이하는 삶에서 그들과 결속감을 단번에 깨트리기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최근 '강한 여자' 이미지를 내세운 콘텐츠들이 불편했던 건 그것이 현실과 유리되어 지나친 판타지로 보이거나 강한 여성의 이미지를 또 다른 방식으로 소비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제 여자는 '전사'까지 돼야 한다. 더구나 고민 끝에 싸우겠다는 용기를 내 피해자로서 폭로하거나 내부고발자로서 연대하는 여성이 인내해온 시간을 대다수 남성은 이해하기 어려워한다. 이해하려는 노력 자체를 낯설어한다.

저자는 이 모든 현상의 원인을 '개인의 책임', 즉 여성에게 돌리는 현실에 있음을 주목한다. '훌륭한 기혼남성'이 리더로서의 고독을 드러내거나 결정권자로서 느끼는 부담을 털어놓으며 여성에게 접근하는 행태 또한 고착화된 성폭행의 패턴임을 지적한다.

편견을 넘으면 보이는 우리

매번 '여지를 준' 여성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사회 구조망에 문제가 있음을 고하는 저자는, 책의 끄트머리에 힘주어 말한다. 젠더 다양성을 여성과 남성이 갖는 몫, 숫자의 문제로만 환원하지 말자고.

일터에 만연한 집단주의, 성차별 등을 복제하는 일에 똑같이 동참하지 말자는 그의 당부는, 이따금 'OO은 남자라서 그렇게 단순 무식하게, 타인의 기분도 고려하지 않고 말하는구나' 지레짐작하곤 했던 나의 내면화된 젠더 의식을 일깨웠다.

그 생각 역시 남성을 특정화 하며 동시에 여성이 자신에게 오는 날 선 말을 무덤덤하게 받아들이는 데 일조하는 편협한 버릇일 수 있다는 걸 이 책은 알려 주었다. <흠결 없는 파편들의 사회>는 여자라서, 남자라서 흔히들 그럴 거라는 고착화된 편견의 기저를 쉬운 문장으로 탐험하게 하는 페미니즘 입문서다.

딸에게 정기적으로 다이어트를 요구한 경험이 있는 양육자, 비빌 언덕이 없는 저경력 여성 후배들이 무리를 이뤄 자신이 겪은 부당함을 객관화하며 버텨 온 사정을 예상해 본 적 없는 중간 관리자들이 이 책을 읽어 보길 권한다. '드센 여자가 너무 많아 탈'이라는 볼멘소리가 익숙한 일상에서, 고도로 세밀해진 과업을 수행하기 위해 녹초가 되어가는 여성들의 하루가 선명하게 펼쳐질 것이다.

특히 최고 관리자급에 종사하는 중년 이상의 남성들이 이 책을 읽어 봤으면 좋겠다. 쉽게 펼칠 리 없겠지만, 갖은 미션을 수행해 내면서도 '무해한 존재'로 조직에서 군림하지 않는 혹은 너무나 막강하게 군림해 온 여성 근로자의 생애와 부담을 조금아나마 파악하고 싶다면 말이다. 읽는다면 무척 반가울 것 같다.
 
"우리는 거리에서 '광년'이 될 줄 알았는데, 돌아보니 우울증 '환자'가 됐다. (중략) 내면화된 성취와 성공에 대한 요구는 자신을 '끊임없이 담금질'하는 자기 착취로 이어졌다."
- <일할 자격>(희정) 중에서
 
출근 직전부터 오늘 할 업무와 귀가해서 할 일(자녀가 있는 친구의 경우, 원래보다 대략 3배의 할 일이 더해진다)을 떠올리며 나는 침대에서 일어난다. 그 일과를 부던히 해내기 위해, 혹은 살아남기 위해 '광년'이 되다시피 한 친구들. 그리고 그 이야기를 다정하게 들어주는 소수의 남성 친구들과 이 책을 연말에 재독하고 싶다.

함께 '일'이라는 걸 잘해 보고 싶어서 동료에게 아침 인사를 건네는 용기만큼, 성별을 막론한 '직딩'의 불안은 저마다 이유가 있다. 당신 옆에 그녀와 그가 이 공간을 버터 내느라 내쉬는 숨은 같은 공간에 스민다. 우리는, 같은 동심원 안에 있다.


흠결 없는 파편들의 사회 - 한국 2060 여성들의 일 경험과 모험

김현미 (지은이), 봄알람(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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