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10.27 15:45최종 업데이트 23.10.27 1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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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하는 사람의 기록을 담은 책을 소개한다. 송곳이 되어 준 작가의 경험과 필자의 지금을 들여다보아 변방에서 안방으로 자리를 넓혀 먹고사는 오늘의 온도를 1℃ 올리고자 한다.[기자말]
각종 청문회와 국정감사로 영웅의 흥망성쇠가 펼쳐지는 곳. 뜨는 정치인과 저무는 정치인이 세간의 안주가 되어 입방아에 오르는 곳. 그간 의원들의 성지로만 국회를 바라봤었다. 그들 등 너머 입법 노동자가 수두룩하다는 사실에는 관심 두지 않았다. 의원을 대표 주자로 앞세워 일하는 입법 노동자 중, 자리에서 물러나 면직된 보좌관의 근속연수는 평균 1년 2개월 정도에 그친다(지난 5월 29일 <더팩트> 보도).

머릿속으로 국회의원실을 하나 그려보자. 그곳에는 9명의 보좌진이 일한다. 한쪽에는 정책, 정무 업무를 실행하는 보좌관과 비서관 책상이 자리해 있다. 한편에는 의원의 활동 전반을 보조하는 수행 비서, 법률안을 검토하고 질의서를 쓰는 정책 비서가 분주하게 움직인다. 의정 보고서 등을 비롯해 의원의 일정을 관리하는 행정비서까지. 가끔 휴일도 반납하고 일하는 모두가 이곳에 있다. 그들을 보좌관이라고 부른다.

별정 공무직인 탓에 이들은 의원이 선거 이후 임기를 끝내면 면직되는데, 하루아침에 일자리를 잃기도 한다. 그래도 유권자의 의견을 반영할 수 있다는 믿음으로 일을 시작하는 보좌관들이 여전히 많다.
 

ⓒ 고정미

 
의원실 개별 공고를 통해 채용되는 경우, 시민단체에서 오랜 운동과 연구 끝에 추천받는 등 국가공무원법상 인사권자의 재량에 따라 보좌관의 입사는 정해진다. 은퇴가 불안정한 회사원들처럼 그들 역시 정년이 보장되지 않는다. 그들 중에도 식구가 딸린 가장이, 갓 독립한 청년이 있다.

행정부를 감시, 견제하며 조금이나마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일념으로 그림자 노동에 나서는 입법 노동자들. 그들 가운데 시민들이 종종 '안주거리로 일삼는' 정치에 관한 생각에 기분 좋은 균열을 일으키는 사람이 있다. 11년 넘게 일한 보좌관 이보라는 정치에 참여하는 주체는 국회의원 다수가 아니라, 그들을 포함한 시민 다수임을 책으로 일깨워준다.


그는 이제는 국회에서 나와 경찰청 사이버성폭력 수사자문단 위원으로 활동 중이다. 이 글은 저자가 국회에서 일하며 담은 분투의 기록 <법 짓는 마음>을 읽고 쓴 독자의 작은 일기다.

국회가 '가진 사람'의 것이 되지 않도록

보도블록 하나 까는 일, 밥상 위에 밥 한 공기 오르는 일까지 세상만사 정치에 연관되지 않은 일이란 없다. 그러나 미디어 속 국회의원 이미지는 대체로 '불호'에 가까워서, 대다수 시민은 그 어둑어둑한 편견에 사로잡혀 자신의 권리를 밀봉하기 일쑤다.

드라마, 영화에서조차 나랏일하는 사람과 장소를 사리사욕 채우는 이미지로 써먹는 클리셰를 반복한다. 물론 부패로 얼룩진 의원들의 온상인 것도 기정사실이지만, 국회는 생각보다 그리 간단한 '악의 이미지'로 굴러가지 않음을 이보라는 책에서 상세히 드러낸다.

저자는 '편견의 국회'를 '호기심의 국회'로 볼 수 있도록 시야를 넓혀준다. "욕만 하고 관여하지 않으면 국회가 가진 사람의 것이 되고, 그러지 않으면 국회는 가장 절실한 사람에게 가닿지 못한다"는 문장은 보좌관으로 일하면서 빚어진 경험의 산물일 것이다. 국회의 기능과 가려진 보좌관의 세계를 소개하는 데 집중한 여타의 에세이와 달리, <법 짓는 마음>에는 법 본연의 기능을 골똘히 자문한 대목이 많다.
 
"제정된 법을 가지고 일차적으로 정부와 지자체를 움직여야 하고, 그다음은 기업, 최종적으로는 시민의 생활이 변하도록 설계해야 한다. 이제부턴 디테일에 숨어 있는 악마 찾기 게임이 시작되는 것이다."

"필연적으로 고통을 측량해야 한다. 얼마만큼 고통스러운지, 얼마나 죽었는지. 그 정도를 알아야 법도 만들고 정책도 만든다." 
- <법 짓는 마음> 중에서

법제처에서 운영하는 국가법령정보센터에만 접속해도 우리나라 모든 법령을 열람할 수 있다. 하지만 일반 시민이 보면 추상적이고 선뜻 이해하기 어려운 조항들이 많다.

모호한 조항 탓에 어떤 법은 피해자를 이해하기 어렵게 만들거나 구제하기 어려운 올가미로도 악용된다. 저자는 이러한 법의 올가미를 파악하고, 더 나은 법을 만들기 위해 법 조문 사이사이 '디테일에 숨어 있는 악마' 찾기에 주력해 왔다.

 

책 <법 짓는 마음> ⓒ 유유출판사



그래서인지 책 초입에 언급된 저자 이보라의 별명에 눈길이 갔다. 김영란 전 대법관에 따르면 그의 별명은 '국회 귀신'. 같이 일하는 국회의원이 일에 몰두하는 그에게 붙여준 별명이라는데, 실제로 그가 입법에 참여한 법 이름들을 살펴보면 우리 사회 가장 밀접한 이슈와 연관된 것들이 많다.

저자의 땀이 맺혀 만들어진 법들을 살피면 다음과 같다. 디지털성폭력 피해자 보호를 위한 법, 선감학원 피해사건의 진상규명 및 보상 등에 관한 법률, 환경정책기본법 등등. 모든 챕터가 그가 참여하여 본회의를 통과해 제정된 법 혹은 제출, 발의된 법의 이름으로 명시돼 있다.

처음엔 법 이름으로 이뤄진 챕터 제목들이 낯설어서 어려운 전문서를 펼치는 느낌이었다. 이내 책장을 넘기면서 시민으로서 입법 과정에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당위를 알아갔다. 저자는 "사람들의 고통보다 항상 늦게 도착하는 법이 조금의 쓸모"를 더 가질 수 있도록 만들어온 '법'의 촘촘한 그물망을 펼친다. 입법의 이유가 먹고사는 사람들의 일과에서 비롯됐음을 자명하게 보여준다.

그 그물망의 첫 번째 이야기를 읽으면 그간 국회를 둘러싼 세계에 관한 오해가 차츰 풀린다. 책상 자리에 앉아 어려운 법전을 뒤적이며 종이로만 씨름할 줄 알았던 보좌관들은 법의 언어를 생활에 긴요하게 녹이고자 발로 뛰어다니는 사람들이었다.

때는 2018년, '디지털 장의사(당사자가 비용을 내면 온라인에 배포된 자료를 삭제해 주는 대행업체)'를 통해 삭제를 해도 무한대로 복제되는 탓에 누군가의 목숨까지 앗아갔던 불법 영상물이 판을 쳤다. 당시 저자가 근무했던 의원실은 경찰청을 비롯해 여가부, 방심위, 방통위에 '디지털 성폭력 사건의 피해‧수사‧검거 현황' 자료를 요청받아 검토했다.

방심위는 웹하드 업체의 불법 데이터베이스가 잘 관리되고 있다고 호언장담했던 상황. 하지만 완벽히 삭제됐다는 불법 영상물들이 또 다른 사이트에 버젓이 올라와 피해자들을 지난하게 괴롭혔다. 저자는 사이버 성폭력 수사 담당자로부터 수사 기법 매뉴얼을 제출받아 검토하던 중 한 IT 전문가를 통해 업계의 불법 관행을 알게 된다.

웹하드 업체와 필터링 업체의 유착 사실을 알던 전문가는 업체가 경찰의 모니터링을 우회하는 기술 수법을 쓴다는 사실을 제보한 것. 사이버성폭력대응센터 활동가들과 저자는 집요한 모니터링을 통해 웹하드 업체가 꼼수를 쓰는 '결정적인 장면'을 포착하기에 이른다. 

웹하드 실시간 모니터링을 하는 경찰의 눈을 피해, 표준시 프로그램(인터넷을 통해 컴퓨터의 시각을 대한민국 표준시에 일치시키는 프로그램. 경찰이 이 프로그램을 통해 불법 업체들의 관행을 적발함) 작동이 감지되자 범죄 업체는 '불법 의혹이 없는 화면'을 때맞춰 보여 주는 수법을 썼고, 그 찰나를 포착한 것이다.

이를 녹화한 장면은 보좌진을 거쳐 방송사 기자에게 제보됐고, 2018년 국회 경찰청 첫 국정 감사장에 그대로 상영됐다. 입법의 단초가 마련되는 순간들이다.

법은 우리의 목소리를 대변할 책임이 있다

저자가 근무했던 의원실은 당시 국정감사에서 불법 게시물을 건당으로만 확인하는 경찰청의 사후 조치 중심의 수사를 지적한다. 정밀 수사를 요구한 끝에 경찰은 웹하드 업체와 인터넷 데이터센터를 압수 수색해 범인들을 검거한다. 이후 처벌 강화와 피해자 보호 조치를 포함한 '웹하드 카르텔 방지 5법'이 만들어진다. 국내에 웹하드 카르텔의 불법 구조를 처음 알린 사건이었다.
 
 "국회가 국회의 언어에 갇혀 있지 않고, 피해자의 언어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뒤 집행자의 언어로 질의하니, 경찰이 단박에 피해자 입장에서 움직이는 것을 봤다."  - <법 짓는 마음> 중에서

불합리한 현실이 당사자의 요구로 시정될 수 있다는 입법 노동자의 감수성이 없었다면? 디지털 성폭력 피해자를 위한 법의 그물망은 더욱 느슨해졌을 것이다. 그동안 저자는 사회적 참사가 벌어진 현장 곳곳을 누벼 왔다. 강정마을을 비롯해 세월호 사건, 가습기 살균제 사건, 산업재해 사망자들로 유족들이 오열하는 현장을 쏘다니며 '제각각 할 말이 있었을' 시민들의 얼굴을 복기해왔다.

그는 우리의 목소리를 대변할 책임이 있는 법이, 우리의 인생과 결코 동떨어진 곳에 있지 않다고 책을 통해 힘주어 말한다. '책임 소재가 불분명한 죽음'을 핑계 삼아 방치를 일삼는 국가의 민낯을 매일 가까이서 보는 마음이란 어떨까. 국회에서 일하면 누군가의 죽음도, 억울함도 기계처럼 대하는 타성에 젖지 않을까. 피켓을 든 시민들 사이에서 무심한 '회색의 마음'을 가질 법도 하지 않을까.

그렇지 않았다. 저자는 민원을 제보하는 사회적 약자들을 테이블에서 마주할 때마다 마음을 앞세우지 말 것을 되뇌었다고 한다. "공감은 당위고 해결은 의무"라는 목표로 누군가의 '외마디'가 '타인에게 이해되는 말'이 될 때까지 법을 통해 사회 시스템을 갖추는 일에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고 고백한다. 보좌관 홍지현도 <대한민국 국회 보좌관입니다>에서 이렇게 말한다.
 
 "국회의원 보좌진을 정치 활동이라는 틀에 국한해 바라보는 나머지 직원들이 국회의원이라는 입법기관을 작동하게 만들기 위해 어떤 일을, 어떻게 하는지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을 두지 않고 그 능력과 중요성을 간과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아 아쉬움이 남는다."
- <대한민국 국회 보좌관입니다>(홍주현)
 
노동자의 기본권을 지키자는 내용의 질의서를 쓰면서도 정작 법의 사각지대에 놓인 채 밤 12시에 일하는 사람들이 국회에 있다. 각종 선거 준비와 국정감사, 예산안 심사 등 숨 가쁜 한해살이 가운데 보이지 않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법에 녹이고자 납작해진 마음으로 사투를 벌이는 보좌관들.

그들은 권력의 암투가 펼쳐지는 드라마 속 격정적인 캐릭터들이 아니다. 시민들의 곡절과 바람이 법으로 스미길 바라는 또 하나의 시민이 그곳에서 밥을 짓듯 법을 짓고 있다는 사실을, 어쩌면 저자는 평범하게 이해되길 바랄 것이다. 법의 세계 또한 그리 이해될 수 있도록.


법 짓는 마음 - 당신을 지킬 권리의 언어를 만듭니다

이보라 (지은이), 유유(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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