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12.11 15:14최종 업데이트 23.12.18 1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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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의 ○○'은 2023년을 마무리 하는 기획입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사건, 도전, 실패,인물 등 한 해 동안 일어났던 일들 가운데, 꼭 기록으로 남겨두고 싶은 이야기를 독자들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편집자말]
어느새 올해의 마지막 달인 12월이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한 해 한 해가 점점 더 짧게 느껴지지만, 올해는 유독 더 빨리 지나갔다. 2023년의 나의 테마는 '주부안식년'이었다. 막내의 대학 합격을 확인하고 드디어 내 할 일이 끝났다는 홀가분함에 안식년을 갖겠노라 선언했다.

일단 아무 생각 없이 쉬고 싶었다. 아침에 눈을 떠서부터 밤에 잠자리에 들 때까지 온전히 가족에게 맞춰져 있었던 주부의 생활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딱 일 년만 내가 하고 싶은 일만 하며 나만을 위해서 살아보고 싶었다.


한편으로는 내 인생의 거의 전부였던 아이들에게서 자유로워지고 나면 그다음에는 뭘 해야되나 은근히 걱정되기도 했다. 주위에서 자녀를 대학에 보내고 나서 무기력해지거나 우울감을 느끼며 힘들어하는 주부들을 많이 봐왔기 때문에 나의 다음 인생을 계획하고 준비할 시간이 필요했다. 그래서 나는 끝이면서 동시에 새로운 시작이 될 주부안식년을 가지고 싶었다.

안 해 본 일 하기 
 

주부안식년은 가족들 뒤에 가려진 나의 새로운 모습을 발견하는 값진 시간이었다. ⓒ 심정화

 
처음에는 다소 장난스럽게 식구들에게 안식년을 얘기했는데 남편과 아이들이 적극적으로 지지해 주었고, 우연히 <오마이뉴스>에 주부안식년에 대한 기사를 쓰고 연재까지 하게 되면서 주위로부터 많은 관심을 받게 되었다. 사실 안식년이라고 해도 크게 달라진 게 없어서 주위의 관심이 부담스럽기도 했지만, 어차피 내가 시작한 일이니 뭐라도 이야깃거리를 만들어야 했다.

주부안식년의 가장 큰 목표는 '안 해 본 일 하기'였다. 재미있을 것 같은 일들을 찾다 보니 라디오 만들기 수업에서 학창 시절부터 로망이었던 라디오 DJ가 되어보기도 했고, 비록 4주간의 체험 강습이었지만 꼭 배워보고 싶었던 해금도 배워봤고, 25년 전 한비야 작가의 여행기를 읽고 나서부터 내내 꿈꿔왔던 혼자만의 여행도 다녀왔다.

그리고 무엇보다 주부안식년이라는 주제로 <오마이뉴스>에 꾸준히 기사를 써서 '시민기자'라는 과분한 타이틀도 얻었고, 평소 즐겨 보는 에세이 월간지로부터 원고청탁을 받아 글을 싣는 뿌듯한 경험도 했다.

이렇게 소소하게 재미난 일들이 있기는 했지만, 안식년이라고 해서 내 생활이 크게 달라진 건 아니었다. 여전히 밥하고 빨래하고 청소하고 식구들 챙기고, 주부로서의 일은 거의 그대로였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기껏해야 매일 쓸고 닦던 집안 청소를 일주일 정도는 미뤄둘 수 있게 되었고, 매번 직접 담가 먹었던 김치를 가끔은 사 먹을 수 있게 되었고, 기사까지 쓰며 요란하게 안식년을 부르짖은 덕분에 손 하나 까딱하지 않던 남편에게 저녁 설거지를 떠넘길 수 있게 되었다는 정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 년간의 안식년은 나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매우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 아이들을 키우는 동안 행복하면서도 나만 정체되어 있는 것 같아 초조했고, 점점 나를 잃어가는 것 같아 불안했다. 워킹맘들에 대한 열등감만큼이나 전업주부로서도 완벽하지 못한 나를 자책하는 마음도 컸다.

에너지를 채우니 가족이 더 잘 보였다

하지만 안식년을 보내면서 나 자신에 대해서 많이 너그러워졌다. 지난 시간을 되돌아보니 최선을 다해서 한 가정을 꾸려왔고 두 아이를 건강한 젊은이로 키워낸 나 자신이 새삼 대견하게 느껴졌다. 또한 그동안에도 내 인생에 대한 고민을 계속 해왔기 때문에 지금 새로운 일에 도전할 수 있는 용기를 낼 수 있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건강을 위해 매일 아침 걷기 시작한 것이 혼자서 여행을 떠날 수 있는 동력이 되었고, 집안일에 지치고 힘들 때마다 블로그에 글을 쓰며 마음을 다독였던 것이 지금 이렇게 기사를 쓸 수 있는 발판이 되었던 것처럼 나는 그동안에도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성장해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 주변을 돌아볼 수 있는 마음의 여유도 생겼다. 휴일에 하루종일 쇼파에 누워 있는 모습이 얄밉게만 보이던 남편이 언제부턴가 측은하게 느껴지고, 어느새 다 커버린 아이들을 보면서 뒤늦게 아쉬운 마음이 들고, 늙어가며 점점 자식들에게 의지하시는 부모님이 애처롭게 느껴져 진심으로 잘해드리고 싶은 마음이 든다.

나만 생각하며 지내려고 했던 안식년에 가족들을 생각하는 마음이 더 커질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곳간에서 인심 난다'고 했던가. 아마도 안식년을 가지며 내 안에 에너지가 충분히 채워지고 나니 가족들에게도 더 너그러워지게 되는 것 같다.

한편으로는 아이들을 키우는 동안에도 나를 위한 시간을 종종 가졌더라면 전업주부로서의 생활이 훨씬 덜 힘들었을 텐데 하는 아쉬운 마음도 들었다. 주부가 행복해야 가족이 행복한 것을 가족만 행복하게 만들려고 너무 애쓰며 살았던 것 같다.

이제 막 아이들에게 벗어나 인생의 후반전을 시작하려는 전업주부들에게 안식년을 꼭 가져보라고 권하고 싶다. 가족들 뒤에 가려져 있던 자신의 새로운 모습을 발견하는 값진 시간이 될 것이다. 더불어 안식년을 원하는 주부들에게 가족들은 적극적인 협조와 응원을 보내주기를 바란다. 안식년으로 채워진 주부의 에너지는 결국 가족에게로 다시 돌아가게 되어있으니 말이다.
덧붙이는 글 '주부안식년, 1년의 기록 연재를 마칩니다. 그동안 관심 가져주신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이 글은 개인블로그와 브런치스토리에 게재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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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사는 연재 주부 안식년, 1년의 기록 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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