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2.31 17:58최종 업데이트 20.01.06 18:23
지금 눈 내리고
매화 향기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다시 천고(千古)의 뒤에
백마 타고 오는 초인(超人)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


- 이육사 '광야'

우리 겨레의 반만년 역사에서, 언제는 눈서리 치지 않은 적이 있었을까. 그럼에도 지금의 우리가 있는 것은 겨레의 미래를 확신하며 홀로 눈밭에 노래의 씨를 뿌리고 기꺼이 자신을 내던진 분들 덕분이다. 이 땅에 뿌리 내리고 살아갈 백정·범부가 주인으로서 참살이를 하게 될 그날을 위해, 가시밭길 헤치고 나가는 발이 되기를 주저하지 않았던 애국열사들. <오마이뉴스>와 한국교직원공제회의 안내를 받아, 임들의 발자취를 찾으러 낯선 땅으로 향하는 마음이 무겁고도 설렌다.     

11월 11일, 상해에 도착하다

제 나라를 떠나 남의 나라 땅에, 한 나라를 대표할 정부를 '임시'로 세워야 했던 독립 운동가들의 비통한 마음을 감히 짐작이나 할 수 있을까. 다만 뒷사람들에게 부끄럽지 않을 곧은 발자취를 남기고자 하셨을, 임시정부 요원들의 행적을 좇아, 상해에서 자싱(가흥)으로, 다시 하이옌(해염)을 거쳐 항저우(항주)와 난징(남경)까지 3박 4일의 일정 시작!  

상하이 마당로에 남아 있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청사 건물과 기념관에서 본격적으로 탐방의 첫걸음을 뗐다. 이곳은 1926년부터 1932년까지 사용한 세 번째 청사다. 신해혁명(1911)으로 중화민국을 수립(1912)한 중국에서 우리의 대한민국을 꿈꾸었던 임시정부 요원들은, 일제의 수색과 압박을 피해 프랑스 조계지에 둥지를 틀 수밖에 없었다.

임시정부의 첫 번째 청사가 어디에 들어섰는지 지금은 확인할 길이 없어, 1919년 8월까지 있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는 서금이로 사거리에서 한참을 두리번거린다. 두 번째 청사가 있었던 곳 역시 자취는 사라지고 상가의 화려한 조명이 그 자리를 밝히고 있었다. 대한민국사의 첫 시작인 임시정부가 그 자취를 찾는 이들의 가슴과 기억 속에 잠들어서는 안 될 일이다.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지금 그 혜택을 고스란히 누리고 사는 우리의 책임이 더욱 무겁다.   

영경방. 망명한 김구 선생을 찾아온 부인 최준례 여사와 큰아드님, 어머니 곽낙원 여사가 22년부터 26년까지 잠시나마 단란한 가정을 꾸렸다는 이곳 역시 이제 꽤 이름 있다는 식당이 들어서 있을 뿐 그 흔적을 찾을 수 없다. 잃어버린 나라와 그 백성을 위해 독립운동에 투신한 분들은 정작 당신의 가족을 돌볼 여지가 없었다. 남겨진 가족들은 일제의 핍박을 온몸으로 감내하며 모진 세월을 견뎌냈으리라. 그 속에서 자식을 길러내고 함께 더 독하게 싸워야 했으리라.

윤봉길 의사의 발자취를 따라 홍커우(홍구) 공원을 찾았다. 백성의 무지가 나라를 잃게 한 근본 원인이라는 깨달음으로 농촌계몽운동에 뛰어들어 민족의식 교육을 시작한 것이 그의 나이 19세 때. 농촌 개혁을 주도하다가 독립운동만이 근본적인 해법임을 깨닫고 23세에 중국으로 망명, 김구 선생을 만나 홍구 공원 의거를 결행하고 일본형무소에서 순국한 윤의사의 나이 겨우 25세였다.

일왕 생일과 상해사변 승전 축하식이 진행되던 홍구 공원에서 삼엄한 경계를 뚫고 폭탄을 단상으로 던져 일본군 장교들과 정치인들을 제거한 이 의거로 우리 민족을 바라보는 중국인과 세상의 시선이 확 바뀌었다.  

"중국의 백만 대군이 못한 일을 일개 조선청년이 해냈다." 

감격해 마지않던 중국 총통 장개석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침체일로에 빠졌던 임시정부를 되살렸다는 윤의사의 애국심을 '매헌' 기념관에서 확인하고, 나는 그 나이에 무엇을 고민하며 살았는지 얼마나 치열하게 그 시기를 살아냈는지 돌아보니 다시 부끄러움만 하나 가득하다. 자유와 정의를 수호하기 위해 1980년대를 목숨 걸고 돌파한 청년열사들 덕분에 누리는 것들이 많아, 내가 이 세상에 갚아야 할 빚이 겹겹이다.           

서금이로를 지나 어둠이 내리는 골목길에서 예관 신규식 선생이 거주했다는 곳을 찾았다. 을사늑약 체결에 목숨을 걸고 항거했던 신규식 선생이 거주했다는 건물엔 그 지역 주민이 살고 있었다. 

음독자살을 기도했다가 오른쪽 눈만 실명한 채 살아남은 신규식 선생은 중국으로 망명해, 상해의 프랑스 조계지에 거주하면서 손문, 진독수, 진기미 등 중국 정치가와 교류하며 신해혁명에 동참했다고 한다. 이를 기반으로 임시정부의 주춧돌을 놓으셨고 임시정부의 법무총장과 외무총장을 거치며 평생을 대한민국 독립을 위해 바치셨다. 손문으로부터 임시정부 승인을 받은 것도 신규식 선생이다. 임시정부의 내분을 지켜보며 독립을 기원하는 유서를 남기고 절식으로 유명을 달리하셨다.        
첫날의 마지막 일정으로 황푸강 유람선에 올랐다. 황푸강 양안을 장악한 채 위용을 자랑하는 고층건물들과 휘황한 야경에 사로잡혀, 황포탄 의거지의 흔적을 찾기가 쉽지 않다. 눈까지 어둔 나는 해설자의 손끝을 좇아 간신히 공공마두 건물을 찾아낸다. 일본군 장성을 노린 의열단원 오성륜, 김익상, 이종암 열사의 권총이나 폭탄은 제 목적을 달성하지 못 했지만, 그들의 의기와 애국심을 지켜보았던 황포강 밤물결이 일렁댄다.  

11월 12일 가흥, 해염을 거쳐 항주로

어제 미뤄두었던 송경령 능원(상하이 만국공묘)을 찾았다. 임시정부 지도자들이 잠드신 곳이다. 박은식 선생을 비롯해 애국선열 다섯 분은 93년에 봉환돼 서울 동작구 국립묘지에 안장되셨다고 한다. 다섯 분의 기념석판과 아직도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하신 분들의 표석을 찾아 참배하는 마음이 쓰라리다. 제 이름도 찾지 못한 채 외국인 이름으로 잠들어 계신 분들도 많다니, 그 분들께 제 이름을 찾아드리고 한시바삐 고국으로 모셔 한을 풀어드릴 수 있도록 노력해야겠다.     

자싱(가흥)으로 이동해,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원의 거주지와 피난처들을 찾아보았다. 윤봉길 의사의 홍구 공원 의거 후 더욱 심해진 일제의 탄압을 피해 상하이를 탈출한 김구선생과 요원들은 홍주에 임시정부 청사를 마련하기까지 이곳저곳을 계속 옮겨 다니며 일경의 추적을 피해야만 했다. 그러니 그 생활이 오죽했을지 짐작하기도 쉽지 않다.

그러나 어디에든 의인은 있어, 중국의 뜻있는 지식인들이 조선에서 온 애국 열사들의 피신처를 제공하는 등 적극 돕고 나섰다. 같은 민족끼리도 개인의 영달을 위해, 또 위압을 견디지 못해 배신을 하는데, 타국의 망명 투사들을 위해 위험을 무릅써 준 그들이 아니었다면 임시정부가 명맥을 이어갈 수 있었을까, 생각하니 더욱 고맙기 그지없다. 자싱을 떠나 해염에서도 김구선생의 피난처를 들러보았다.   

이곳에서 우리를 안내한 중국인 해설가가 어눌한 한국어로 최선을 다해 당시 상황을 설명한다. 그 정성에 마음이 울컥해 더 귀를 기울인다. 엄청난 현상금을 걸고 뒤를 쫓는 일경을 피하느라 피난처에 꼭꼭 몸을 숨겨야만 했던 김구 선생이 이곳 재청별장에서 피신하던 시기에는 남북호 근처를 자유롭게 오가셨다고 한다. 김구선생이 머문 별장에는 아직도 그 때 선생이 쓰시던 침대와 옷장들이 그대로 남아 있다.     
드디어 대한민국 임시정부 항저우 청사(1932~1935)에 도착했다. 지난한 도피 끝에 이곳에 현판을 내걸었던 그 분들은 어떤 심정이었을까. 부디 이곳에서 임시 정부를 끝내고 당당히 해방된 조국으로 돌아가고 싶으셨을 테지. 중국 국민당의 도움으로, 항저우로 이전해 두 번째로 사용한 임시정부 청사에 들러 당시에 사용하던 집기와 벽에 걸린 태극기를 보니 감회가 새롭다.

걸음을 바삐 옮겨 사흠방으로 향한다. 임시정부 관계자들이 주축이 돼 결성했다는 독립운동 정당 '한국독립당' 항저우 사무소가 있던 곳이다. 이 분들의 지상최대과제가 무엇이었는지는 당명만 보아도 알겠다. 오늘의 대한민국이 이분들 품에서 온전히 태어날 수 있었다는 걸 인정하지 않으려는 자들이 누구일까. 광복절이 아니라 건국절을 주장하는 무리들의 속셈을 국민 모두가 알아야 할 텐데.  

밤길을 재촉해 임시정부 요원 가족이 거주했던 오복리를 둘러보고, 김구선생이 머물던 항저우 군영반점으로 향했다. 항저우로 이전한 임시정부가 처음으로 잠시 사용한 '청태 2여사' 자리에 들어선 호텔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역사를 찾아 방문하는 한국인들의 아쉬움을 배려해서일까, 김구 선생이 머물던 방에는 선생의 초상화를 걸어두었다고 한다. 객실을 확인할 수는 없어 1층 로비만을 둘러보고 발길을 돌린다.

저녁을 먹고 역사해설위원 홍소연 선생님의 강연을 들었다. 조소앙 선생의 삼균주의에 대한 설명을 들으면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만들고자 했던 '나라'의 모습을 그려 보았다. 그분들이 보고 싶었던 것은 지금의 이 나라가 아니었을 것이다. 

이 강연을 들으며 마음에 새긴 스승들이 있다. 사람은 옳아야 한다는 스승 고능선의 가르침을 평생 실천에 옮겼던 민족의 스승 김구 선생은 말할 것도 없고, 한약방과 잡화점을 운영하여 모은 전 재산을 털어 만주와 러시아 등지에서 민족교육과 독립운동에 헌신하던 중 조선에 부임해 오는 3대 총독 사이토를 처단하고자 폭탄을 던진 강우규 선생, 명문가에서 태어나 모든 것을 갖춘 인재였음에도 평생 농민과 노동자를 사랑하였으며 모든 역량을 동원해 외교를 통한 독립 운동에 헌신했으나 해방 후 미군정 하에서 통일정부 수립을 추진하다 극우세력의 손에 암살당한 몽양 여운형 선생.

어디 이뿐이겠는가. 파리강화조약에 파리장서를 들고 가 조선의 독립을 청원하였고 중국으로 망명한 후에는 중국을 상대로 외교 활동과 독립운동 선전활동을 하다가 의열 투쟁으로 방향을 바꿔 적극 지원하던 중 체포돼 일제의 모진 고문을 받았던 심산 김창숙 선생도 계시다.

임시정부 시대에 이승만 탄핵을 주도했던 이 분은 해방 후에도 반탁·반분단·반독재 운동에 앞장섰고, 성균관대학을 건립해 초대 학장과 총장을 지냈으나 집 한 칸 없이 여관을 전전하다 병원에서 세상을 뜨셨다 하니 그 대쪽 같은 정신의 끝자락만이라도 붙잡고 살고 싶다. '균권·균산·균학', 정치·경제·교육이 균등한 대한민국을 건설하고자 했던 조소앙 선생의 그 원대한 비전 앞에서는 머리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백만이 넘었을 것이라는 독립운동가, 그 중 겨우 만 오천여 분에 대해서만 확인되었다 하니 정말 마음 아픈 일이다. 특히나 여성 독립운동가에 대한 확인은 더욱 열악하다. 한인애국부인회뿐만 아니라 각계각층에서 조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했던 여성들에 대한 연구에도 힘을 쏟아 그 분들의 이름을 되찾아 드려야 할 것이다. 

11월 13일 난징(남경)으로 향하다
 

'The-K한국교직원공제회'와 '오마이뉴스'가 함께 진행한 '임시정부 100주년 역사탐방' 2차 탐방단은 지난 9월 16일부터 19일까지 3박4일 동안 상하이, 자싱, 항저우, 난징 등을 방문,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와 피난처, 윤봉길 의사 의거현장, 난징대학살기념관, 리지샹위안소 등을 돌아봤다. 사진은 '난징대학살 기념관' 내부에 있는 전시물로, 학살된 30만명을 명확하게 숫자로 보여주는 조형물이다. 이 조형물이 있는 대형홀 벽에는 수도 없이 많은 당시 난징 주민들의 사진이 걸려있다. ⓒ 오마이뉴스 장재완

 
항저우를 출발해 난징으로 가는 4시간여. 생각 깊은 길잡이가 준비한 김구 선생의 '나의 소원' 전문을 어린 학생들의 목소리로 돌아가며 낭독하는 걸 듣는다. 선생의 소원은 얼마나 제대로 실현되었을까, 또 나는 어떤 역할을 해 왔을까 스스로에게 묻는다. 역시 선생을 뵐 낯이 없다. 앞으로는 좀 다를까? 선생의 정신과 소원이 이들의 가슴과 혈관으로 뜨겁게 이어지기를 소원한다.

첫 일정으로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3기'가 훈련했다는 선사묘를 찾았다. 1932년 의열단 단장 김원봉 선생이 독립운동 군사 간부를 양성하기 위해 중국 국민당 장개석의 지원을 받아 설립했다는 군사학교. 일본의 감시를 피해 각 기마다 교육을 받은 장소가 달랐다고 하는데 이곳에서는 제3기가 훈련을 했다.

독립 운동가였다는 정도만 알고 있었던 이육사 시인이 의열단원이었다는 것을 듣고 시와 빈틈없이 일치한 이육사 시인의 삶에 숙연해진다. 탐방에 참가한 두 사람의 목소리로 이육사 시인의 시를 낭송하고, 만주 탈환과 조선 환국을 꿈꾸었던 임들의 염원을 생각하며 독립군가를 불렀다. 이곳을 먼저 찾은 이들이 남기고 간 마음들이 폐허 곳곳에 남아 발길을 돌리는 우리를 배웅한다, 
                     
다음으로 찾은 곳은 난징(남경) 대학살 기념관. 1937년 상하이와 난징을 점령한 일본군은 상하이에서 격렬한 저항에 부딪쳐 피해를 입자 그에 대한 보복으로 불과 6주만에 난징 시내의 민간인과 포로 30만 명을 무차별적으로 학살했다고 한다. 12초에 한 명씩 살해당했던 그 때의 참상을 기억하자는 의미로 기념관 벽 한 쪽에서는 12초에 한 방울씩 물방울이 떨어진다.

일본이 집단 학살을 자행했던 13곳 가운데, 하루만에 1만여 명이 살해당한 참혹한 자리에 지은 기념관이 바로 이 난징대학살 기념관이다. 일본의 만행을 뼛속 깊이 기억하고 고발하겠다는 의지의 표상일 것이다. <난징 대학살>이라는 책을 써서 세상에 일본의 만행을 고발한 중국계 미국인 작가 아이리스 장은 일본의 살해 위협에 시달리다 36세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한다. 가해자의 후안무치가 이러하다. 지금까지도 사죄는커녕 자신들의 죄과를 인정조차 않고 오히려 적반하장으로 자신들이 인류에 기여했다 억지를 부리는 일본이다.

일제의 탄압을 피해 난징으로 옮긴 김구 선생이 뱃사공 주애보와 함께 '고물쟁이' 행세를 하며 잠시 머물러 살았다는 마을의 회청교 주변, 선생을 따라온 임시정부 요원들이 거주했을 것이라는 건물과 다리 위를 걸으며 임들을 추억하고, 부자묘의 야경에 잠시 몸을 부리다 숙소로 향했다. 김구 선생이 장개석과의 회담을 위해 묵었다는 중앙반점에서 마지막 밤을 묵게 되어 감개무량이다.

일행과 함께 로비며 식당 이곳저곳을 돌아보며 혹시나 선생이 이곳을 지나셨을까, 이 의자에 앉아계시진 않았을까, 장개석과의 회담을 앞두고 무슨 생각으로 밤을 보내셨을까 얘기를 나누고 사진에 담느라 분주한 시간을 보냈다. 이제 내일이면 탐방 일정을 끝내고 인천행 비행기를 타야 한다.      

11월 14일 일정의 마지막 날이 밝다 

숙소를 떠나 아시아 최대 규모의 위안부 유적지 '리지샹 위안부 유적 진열관'을 찾았다. 건물 앞에 세운 동상 속 만삭의 여인은 박영심 할머니다.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가 이 위안소 19번 방에서 3년 동안 온갖 만행을 겪어야만 했던 박영심 할머니가 2003년 이 곳을 찾아 현장 증언을 한 결과, 중국 정부에 의해 유적 진열관이 건립됐다.

일본이 패퇴하고 나서도 평생 동안 그 때의 상처로 눈물을 흘리다가 실명을 하고 눈을 뜰 수 없게 되었다는 어느 중국 할머니의 기구한 사연에 눈시울이 뜨겁다. 악마들에 의해 인간의 존엄성을 유린당한 그 절망을 무엇으로 보상하고 위로할 수 있을 것인가. 진정한 사죄를 요구하자 무역보복으로 맞서며 배상은 다 끝났다고 억지 부리는 일본, 자신의 조국이 어떤 만행을 저질렀는지 알려고도 하지 않은 채, 아니 어쩌면 다 알면서도 인정할 수가 없어 혐한으로 일관하는 무지한 일본 국민들을 보며 우리는 과연 역사 앞에서 당당한지 돌아볼 수밖에 없다. 기념관을 나서며 바라본 가을 하늘이 구름 한 점 없이 푸르고 높아서 더 슬프다. 
          
이른 점심을 먹고 난징 공항에 도착했다. 3박 4일의 일정이 이렇게 마무리되는구나. 이륙이 늦어지는 비행기를 기다리는 동안, '내처 중경까지 가보았으면…' 생각하는데 탑승을 알린다. 아쉬움을 남긴 채 비행기에 올라 창 쪽에 자리를 잡았다. 어느덧 어둠에 잠겨가는 대한민국의 영해를 바라보다 인천이 가까워지자 점점이 차오르는 불빛에 마음이 울컥한다, 피와 눈물로 되찾아 주신 이 대한민국이 과연 임께서 꿈꾸시던 그 나라인지를 또 생각한다. '너는 이 나라의 주인 된 자로서 마땅히 잘 살고 있느냐?' 준엄한 목소리를 들은 듯하다. 

대한민국의 주인으로서 나는 이제 어떻게 살아야할 것인가. 이 아픈 고민을 심어주려고, 임시정부 100주년을 맞아 이 뜻깊은 탐방 프로그램을 기획했나 보다. 여기까지 우리를 길잡이 하느라 애쓰신 한국교직원공제와 <오마이뉴스>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 인사드린다, 몸도 벅차고 마음도 벅찼던 이 일정에서 생각하고 느낀 점들을 두고두고 곱씹으면서 이제부터는 이름값을 제대로 하고 살겠다는 다짐도 함께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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