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12.26 07:09최종 업데이트 23.12.26 07:09
  • 본문듣기

싱가포르 공공아파트인 HDB의 모습. 싱가포르 가구 80%는 HDB에 삽니다. ⓒ 이봉렬

 
싱가포르 일간지 <스트레이츠 타임스>에 따르면 지난 10월, 싱가포르 부동산 중개인 협의회(CEA)는 의뢰인이 분양을 받은 후 실거주 의무를 지키지 않은 공공아파트(HDB)를 중개하려던 중개인 두 명에게 벌금을 부과하고 거래를 중단시켰습니다.

이 뉴스가 어떤 의미인지 파악하려면 싱가포르의 독특한 주택정책에 대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싱가포르의 주택 시장은 HDB로 상징되는 공공주택과 콘도라 불리는 민간주택으로 크게 나눌 수 있습니다. 이 중 HDB는 전체 가구의 80% 이상이 거주하고 있는 싱가포르의 대표적인 주거 형태입니다.


전 국토의 90%가 국유화된 싱가포르는 땅은 정부가 소유하고 거기에 건설한 아파트는 국민에게 99년 동안 장기 임대하는 방식으로 소유하게 하는 토지임대부 분양 정책을 펴고 있습니다. 땅이 정부의 소유이기 때문에 좁은 땅에 많은 사람이 사는 도시국가 싱가포르지만 분양가를 크게 낮출 수 있습니다.  

여기에 정부가 분양받은 서민에게 여러 가지 명목으로 보조금을 주고, 잔금의 75%까지 대출을 해 주기 때문에 싱가포르 국민이라면 평생 한 채의 HDB는 그리 어렵지 않게 마련할 수 있습니다. 대신 조건이 하나 있습니다. 본인이 직접 거주할 목적이어야 합니다.

분양받은 HDB는 입주 후 5년은 무조건 본인이 들어가서 살아야 합니다. 임대도 안 되고, 5년 안에는 재판매도 안 됩니다. 해외 이민이나 소유자의 중병 등 어쩔 수 없는 상황이 생겨서 집을 팔아야 할 경우에는 시장에서 거래하는 대신 정부가 되삽니다. HDB를 가지고 있는 가구는 다른 HDB를 살 수도 없습니다.

한국에서도 주목하는 싱가포르 주택정책의 특징

이런 상황에서 일부 부동산 중개인이 실거주 의무를 지키지 않은 HDB 소유자의 의뢰를 받아 중개를 하려고 하다가 발각이 되어 벌금을 받은 것입니다. 분양받은 주택의 실거주 의무는 싱가포르 주택정책의 핵심 항목이며, 이를 지키기 위한 촘촘한 규제 조항이 있습니다.

나머지 20%의 민간주택에 대해서는 이런 류의 규제가 없습니다. 당연히 민간주택 구매에 정부의 지원도 없습니다. 그러다 보니 HDB의 경우 실거주자 위주로 거래가 되고, 민간주택은 실거주 뿐 아니라 투자의 대상이 되기도 합니다.

싱가포르 국민의 주거 안정이 어느 정도 이뤄진 후 정부는 소득 수준에 따라 주거지가 다른 현상에 주목했습니다. 부유한 사람들만 좋은 위치의 HDB에 모여 살고,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변두리로 밀려간 겁니다. 싱가포르 정부는 소득수준이 낮은 서민들도 좋은 위치의 HDB에 살 수 있어야 한다고 판단했습니다. 다양한 층위의 사람들이 서로 섞여 살아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2021년부터 처음 분양할 때 서민들을 위해 지원금을 더 주는 대신 실거주 의무 기간을 10년으로 늘린 '프라임 로케이션 공공 주택(PLH)'를 공급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로 치면 강남지역에 고급 아파트를 분양하면서 소득수준에 따라 서민들에게 보조금을 더 줘서 이주를 돕는 대신 실거주 의무 기간을 5년이 아닌 10년으로 제한하는 것입니다.
 

싱가포르 프라임 로케이션 공공 주택(PLH)의 경우 정부가 보조금을 더 주는 대신 10년 동안 실거주하도록 제한하고 있습니다. ⓒ HDB

 
PLH의 경우 분양을 받으면 입주 후 10년을 무조건 살아야 합니다. 10년 뒤에 정부가 정한 조건에 맞는 사람을 대상으로 재판매는 가능하지만 집을 계속 소유하면서 다른 사람에게 임대를 할 수는 없습니다. 10년 뒤 재판매를 할 때도 그동안 집값이 올라 시세 차익이 있다면 그 중 일부를 정부가 환수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한마디로 집 없는 서민들이 좋은 위치의 좋은 아파트에 살 수 있도록 하는 목적 하나로 설계된 아파트입니다.

이러한 싱가포르의 주택정책은 우리 정부도 관심 있게 지켜보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국책연구원인 국토연구원이 2022년 발간한 <싱가포르 주거정책 심층 사례 연구> 보고서는 이런 싱가포르 공공주택 정책의 주요 특성을 보편성, 부담가능성, 투기수요 억제, 지속가능성, 책임성으로 요약하고 있습니다.

"보편성은 싱가포르 시민권자라면 누구나 입주 대상이 되며 생애 최소 1~2회의 당첨 기회를 보장하는 것이며, 부담가능성은 입주자 부담능력을 고려하여 소득수준이 낮은 경우 더 많은 보조금을 지급하고 모기지 월 상환액이 부담 가능 하도록 설계하는 것이다. 또한, 분양 후 최소 5년간의 의무거주기간이 존재하고 그 전에 매각하고자 할 경우 주택개발부에 환매하도록 하여 투기수요를 억제하고 있다. 지속가능성은 공급자인 주택개발부는 수요자 요구 변화에 따라 주택 공급면적을 확대하고 다양한 커뮤니티 시설을 추가로 설치하거나 고령자 대응 방안을 마련하는 등 지속적인 공급이 이루어지도록 하는 것이다. 책임성은 싱가포르 정부는 건국이념으로 자가소유를 장려하고 이를 위하여 헌법에 주택공급 기관인 주택개발부의 적자를 정부가 보전하고 있는 것이다."

제법 긴 내용이지만 싱가포르의 경우 자국민 누구나 집 하나는 가질 수 있도록 정부가 책임지고 투기를 억제하며 서민들의 내집 마련을 적극 지원한다는 걸로 요약할 수 있겠습니다.

이런 정책 때문에 대부분의 싱가포르 국민들은 주거문제에서만큼은 자유로울 수 있게 됐습니다. 싱가포르의 주택보급률은 112%에 자가점유율은 92%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싱가포르 국민 중 열에 아홉은 자기 소유의 집이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거꾸로 가는 한국의 주택정책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21일 서울 중랑구의 소규모주택정비 관리지역인 모아타운 사업지에서 열린 지역주민들과의 도심 주택공급 간담회에서 발언하고 있다. ⓒ 연합뉴스

 
이제 한국의 현 상황을 살펴보겠습니다.

"투기를 잡는다는 명목으로 도입된 불합리한 규제가 시장을 왜곡하고 있습니다."

지난 19일 윤석열 대통령이 제54회 국무회의에서 한 말입니다. 윤 대통령이 지목한 "불합리한 규제"는 분양가상한제를 적용받은 저렴한 아파트에 청약 당첨됐을 경우 입주 시점에 무조건 2~5년간 직접 거주해야 하는 '실거주 의무'제도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싱가포르 주택정책의 핵심인 실거주 의무 제도가 한국에서는 왜 불합리한 규제가 됐을까요?

실거주 의무 제도는 부동산시장이 과열됐던 2021년 2월 투기를 막고 집값을 안정시키기 위해 도입됐습니다. 모든 아파트에 적용되는 건 아니고 주변 시세에 비해 저렴한 일부 분양주택에 대한 공공성을 확보하기 위한 것이며, 시세 차익을 노리는 투기세력을 배제하고 무주택 실거주자를 보호하기 위한 것입니다. 윤 대통령은 이를 두고 "시장을 왜곡"하는 "불합리하는 규제"라 말하며 제도 폐지를 요구한 것입니다.

아파트를 서민의 주거공간이라 여기는 게 아니라 시세 차익을 위해 사고 파는 시장의 하나로 보고 있다는 걸 대통령의 발언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이번에 지명된 박상우 국토교통부 장관 후보자(22일 임명 재가) 역시 청문회에서 비슷한 취지의 발언을 했습니다. 그는 실거주 의무 제도를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한 데 이어 "전세를 끼고 집을 사는 게 투기라는 분도 있지만, 주거사다리의 중요한 한 부분이라고 생각한다"라고 밝혔습니다.

통계청에 따르면 2021년 기준 한국의 주택보급률은 102.2%입니다. 모두가 집 한 채는 가질 수 있을 만큼 주택이 있는 겁니다. 하지만 자가점유율은 57.6%로 떨어지고, 수도권만 한정해서 보면 51.3%로 절반밖에 되지 않습니다. 집은 많지만 한 사람이 투기 목적으로 집을 여러 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아 정작 집이 필요하지만 가질 수 없는 사람이 아직도 절반 가까이 있다는 뜻입니다.

실거주 의무 제도는 한마디로 무주택자에게 싸게 분양해 주는 대신 일정 기간은 진짜로 거기에서 살라는 겁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입주 전에 전매제한과 실거주 의무 제도를 폐지해 줄 걸 믿고, 들어가서 살 생각이 없는 사람들도 싸게 분양받아서 비싸게 되팔 요량으로 너도나도 분양신청을 했습니다. 이렇게 되면 실거주 하려던 무주택자가 분양을 못 받는 경우가 많아지게 됩니다.

이럴 때 정부가 해야 할 일은 끝까지 실거주 의무 제도를 지켜서 실거주 목적의 무주택자의 청약 말고는 모두 LH에 분양가 그대로 되팔게 해야 합니다. 그래야 다른 청약에서도 차익을 노린 투기꾼들이 청약할 엄두를 못 내고, 실수요자에게 보다 높은 당첨 기회를 줄 수 있는 겁니다. 정부 정책에 대한 신뢰도 지킬 수가 있습니다.

보도에 따르면 한 재건축 아파트는 분양가 대비 6억 원 이상 시세가 올랐다고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거주 의사가 없으면서도 아파트를 분양받아 시세차익을 보려는 이들을 위하는 것인 양 기존 제도마저 폐지해 달라고 요구하고 있고, 해당 부처 장관 후보자는 집값 상승의 원인으로 지목되고 있는 이른바 갭투자를 두고 "전세를 끼고 집을 사는 게 주거사다리의 중요한 한 부분"이라는 궤변을 늘어놓고 있는 겁니다. 주거사다리의 한 부분이 아니라 주거사다리를 걷어차는 행위입니다.

갈수록 힘들어지는 내집 마련 때문에 결혼과 출산도 미루는 나라에서 투기 방지와 무주택자의 내집 마련 대책에 힘써야 할 정부가, 도리어 투기꾼들의 바람대로 전매제한을 완화하고 실거주 의무 제도를 폐지하려는 등 거꾸로만 가고 있습니다. 정부의 역주행을 막을 수 있는 의회권력이 아직 남아 있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라 하겠습니다.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8,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취재후원

독자의견


다시 보지 않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