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1.15 17:52최종 업데이트 24.01.15 1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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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독자 수 1위이자 전 세계적 흥행을 담보한 넷플릭스는 콘텐츠 제작자라면 가장 선호하는 OTT이다. ⓒ pixabay

 
새해를 앞두고 생각했다. 2024년에는 불량식품 같은 영화 보기를 줄여야겠다. 오해를 막기 위해 설명하자면 '불량식품'이라는 표현이 다소 직설적이어서 그렇지 나는 그런 영화들을 '나쁜 영화'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조금 더 완화해서 표현하자면 불량식품 보다는 '인스턴트 음식'에 가까운 영화들일 것이다. 편의점에서 손쉽게 구매할 수 있는 과자와 같은 영화들. 보기 전에 별다른 마음의 준비를 할 필요도 없고 딱히 집중할 필요도 없는 영화들. 빨래를 개거나 와인을 홀짝이며 보다가 중간에 30초 정도 놓쳐도 전혀 감상하는데 무리가 없는 영화들.

이런 영화들의 장르는 대부분 액션이다. 맨몸 격투부터 시작해 총격과 각종 폭발이 난무하는 작품들. 주인공과 악역이 명확하고 기승전결이 확실하다. 주인공은 원하는 바를 얻고 악역은 죗값을 치른다. 갈등과 파국은 수습되고 책임을 져야할 사람은 응당 그렇게 한다. 그리고 아무런 찜찜함이 남지 않는다. 이런 영화들을 못 만들었다고 표현하는 건 조금 억울한 일일 것이다. 그보다는 그냥 '잘 만들지 않은 것'에 가깝다. 전달하려는 것이 아주 단순하고 확고한 작품에 복잡한 공식은 필요 없다. 그러니 이야기도 매우 간소해진다. 촬영장의 배경이나 배우의 연기가 기성품 같아도 전혀 신경 쓰이지 않는다. 원하는 것이 바로 기성품이기 때문이다.

마치 '정크푸드'와도 같은 영화들, 헤어나올 수 없는 이유

지난해에는 주말에 별다른 일정이 없다면 집 밖을 나오지 않고 불량식품 같은 영화만 골라서 봤다. 얼마나 그런 영화를 많이 봤는지 나중에는 '정크버스터(불량식품을 뜻하는 '정크푸드'와 '블록버스터'의 합성어)' 분류까지 따로 만들어낼 지경이었다. 사실 그렇게까지 이 영화들에 몰입할 생각은 없었는데 상황이 그렇게 된 건 넷플릭스를 비롯한 OTT 서비스들의 힘이 컸다.


특히나 넷플릭스를 따로 언급한 건 이 서비스가 가장 특출난 강점을 보였기 때문인데, 이들이 가진 큐레이션 시스템(보유한 작품을 선별하고 진열하는 시스템)은 내가 이전에 본 영화들에 기반하여 그와 비슷하고 흥미를 보일 만한 작품들을 기가 막힐 정도로 잘 추천해 주었다. 그리고 넷플릭스를 포함한 대부분의 OTT 서비스들은 미국 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서 작품을 만드는 글로벌 서비스이기도 하다.

이 점이 왜 중요한가. 이유는 생각보다 단순하다. 만들어지는 비슷한 성격의 영화가 차원이 다르게 많아지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나는 중년 여성 주인공이 총을 잡고 악당들을 쓸어버리는 영화가 마음에 든다. 그런데 한국에서만 이런 작품을 찾자면 집에 누워서 감상이 가능한 작품은 손에 꼽을 수준이다. 그런데 아쉬워하며 서비스를 끄려고 하면 넷플릭스가 나에게 말을 건다. '프랑스에도 이거랑 비슷한 영화가 있는데요, 심지어 자막도 제공해요.' 그러면 나는 비슷한 성격의 프랑스 영화를 신나게 보고 목록이 바닥을 드러낼 때쯤 넷플릭스는 다시금 북유럽, 남미, 아시아의 비슷한 영화들을 내게 보낸다. 이러면 전 세계를 유랑하며 입맛에 맞는 작품들만 보는 게 가능해진다.

빠르게 실행한 새해의 결심, 그리고 깨달은 것
 

영화 <괴물> 포스터 이미지 ⓒ (주)NEW

 
하지만 이런 식의 영화 관람이 전혀 건강할 리가 없다. 공교롭게도 이걸 깨달은 건 새해의 결심을 조금 빠르게 실행하면서였다. 2023년 나는 그해의 마지막 영화로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괴물>을 선택했다. 해가 넘어가길 기다릴 것도 없이 결심한 걸 바로 실행하자고 생각했다.

스포일러를 막기 위해 아주 간략하게만 설명하자면 이 영화는 오해받고 소외되고 때로는 학대를 당하는 두 아이에 대한 이야기다. 그리고 이 영화의 어른들은 두 아이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거나 잘 알지 못하거나 정말 악역에 가까운 캐릭터는 고통을 준다. 영화는 어른들을 중심으로 한 1, 2부를 거쳐 두 아이가 전면에 나서는 3부로 이어진다. 당연한 흐름이지만 3부에 다다르면 두 주인공은 서로가 온전히 존중받을 수 있는 둘만의 세계를 향하고 당연히 그 공간은 사회와도 사람과도 떨어진 자연 속에 위치한다.

그리고 영화는 그곳에서 끝이 난다. 카메라는 다시 사회로 어른들에게로 돌아오지 않는다. 나는 그 지점에서 영화에 화가 났다. 속으로 생각했다. 책임지는 사람도 수습하는 사람도 없구나, 엉망진창이네. 한동안 주변에 <괴물>을 보고 가진 불만을 마구 쏟아냈다. 감독이 비겁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시간이 점점 흐르며 생각이 조금 달라졌다.

여전히 나와 같은 이유로 누군가는 이 영화에 화가 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현실이라고 다른가. 책임을 지고 수습을 하는 어른들이 존재하는가. 그게 누구인지가 늘 분명했는가. 지난 몇 년간 여러 가지 이유로 아이들이 고통을 받거나 심지어 목숨을 잃는 일은 발생했다. 하지만 책임을 제대로 지는 어른은 거의 등장하지 않았다.

이렇게 생각하자 그런 질문이 들었다. 현실에도 존재하지 않는 정의를 영화에서 실현하라고 요구할 수 있을까. 그리고 내가 마음에 들지 않는 건 정말 영화였을까. 아니면 영화가 투영한 지금 우리가 사는 이 세계였을까.

원하는 것만 보기 쉬워진 세상, 우리는 어떤 사람이 되어갈까
 

영화 <괴물> 스틸컷 ⓒ (주)NEW

 
<괴물>을 본 날 저녁, 함께 간 동행인과 술을 마셨다. 영화를 좋게 본 이의 기분을 해치고 싶지 않아 최대한 완곡하게 말하려 했으나 나는 결국 불만을 우르르 쏟아냈다. 내 이야기를 곰곰이 듣던 동행인은 '넷플릭스 영화를 너무 많이 본 거 같다, 원하는 대로라면 영화의 장르가 달라져야 하는 거 아니냐'고 내게 말했다.

그때는 그냥 농담 같은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뼈가 있는 말이었다. 현실의 시름에 힘이 든다는 이유로 1년 내내 찾았던 영화들, 모든 게 명확하고 모든 게 수습되고 책임이 있는 자가 결국 그것을 지게 되는 그 영화들. 아무런 불편함도 질문도 모호함도 남기지 않는 영화들. 큐레이션 시스템이 골라준 그런 영화들만 보던 내게 <괴물>은 이야기를 제대로 마치지 못한 영화처럼 보일 수밖에 없었다. 적어도 나의 경우는 그랬다(나와 다른 이유로 이 영화를 비판하거나 마음에 들어하지 않는 사람이 충분히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SNS도 OTT도 다른 플랫폼들도 개인화된 알고리즘과 큐레이션이 지배하는 요즘이다. 탐색의 수고도 내 취향이나 입맛과는 다른 엉뚱한 걸 고를 위험도 점점 줄어들고 있다. 보던 것과 비슷한 것, 그래서 내가 좋아할 만한 것이 알아서 배달이 된다. 그리고 때로는 그런 시스템을 원하거나 우리 손으로 직접 만들기도 한다. 하지만 좋아하고 익숙하고 원하는 것만 좇은 결과로 우리는 어떤 사람이 되어가게 될까. 그렇게 굳어진 선호와 취향이 판단력을 흐리게 만들지는 않을까. 우리가 사는 현실이 어떤 모양으로 존재하는지조차 잊어버리거나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게 되는 건 아닐까. 영화 <괴물>에 대해 들었던 복잡한 감정이 내게 남긴 질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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