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홀리데이 인>에 출연한 빙 크로스비, 마조리 레이놀즈, 프레드 아스테어
파라마운트픽처스
영화 <홀리데이 인>에서 한 여자를 사이에 두고 한 남자는 멋진 춤으로 다른 남자는 감미로운 노래로 유혹합니다. 춤추던 남자는 프레드 아스테어였고 "노래로 당신의 마음을 사로잡고 말겠어요"라고 노래한 남자는 영원한 가수 빙 크로스비였습니다. 크로스비는 가사처럼 노래로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는 슈퍼스타가 되었습니다.
크로스비는 엘비스 프레슬리와 비틀스의 히트곡을 모두 합친 것보다 더 많은 노래를 히트시키며 사랑을 듬뿍 받았습니다. 그는 공연과 음반에 만족하지 않고 70여 편의 영화와 2000여 곡의 노래를 녹음한 엔터테이너이자 아카데미 남우주연상까지 받은 배우였습니다. 부드럽지만 강인한 목소리로 희망을 잃지 말라는 이야기를 들려주며 미국 대중 문화의 아이콘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미국을 대표하는 목소리가 되기까지
크로스비가 1903년 워싱턴주 아일랜드계 가톨릭 노동자 집안에서 태어났을 때 누구도 그가 스타가 될 줄 몰랐습니다. 곤자가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한 그는 아버지가 만돌린을 연주하고 가족들이 노래 부르는 환경에서 자라면서 가수의 꿈을 키웠습니다. 정식 음악 교육을 받은 적은 없었지만 중저음의 바리톤 음색으로 워싱턴주 스포케인에서 일찍부터 이름을 날렸습니다.
동료 가수 알 링커와 함께 로스앤젤레스에 진출해 보더빌쇼 순회공연을 시작한 지 1년이 되기도 전에 폴 화이트만 재즈밴드에 들어가 '리듬 보이스' 멤버로 활동했습니다. 음악적 재능을 인정받은 그는 재즈의 거장 듀크 엘링턴과 빅스 바이더벡과 녹음하고 작곡가 어빙 벌린, 콜 포터, 호기 카마이클 등의 노래를 부를 영광을 누렸습니다.
크로스비가 대스타로 거듭날 수 있었던 이유는 시대의 변화를 읽고 적응할 줄 아는 민첩한 재능 때문입니다. 그는 나이트클럽과 극장에서 공연하면서 마이크가 잔잔한 목소리와 감정을 전달하는 최고의 도구가 될 수 있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미묘한 감정의 변화까지 담아낼 수 있는 마이크의 기술력과 자신의 부드럽고 낮은 목소리를 결합해 속삭이듯 노래하는 '크루닝' 스타일을 연마했습니다. 음악 평론가 헨리 플레즌트는 크로스비의 크루닝을 "자연스럽게 대화하듯 노래하는 새로운 음악 형식이 도래했다"고 평가했습니다.
크루닝 스타일을 완성한 그는 팝, 포크, 컨트리 등 다른 장르에도 도전해 성공을 거듭합니다. 신생 음반사 데카와 계약해 부른 노래들이 모두 흥행했습니다. 당시 음반사들은 대공황의 불황으로 어려웠지만 그의 인기는 식을 줄 몰랐습니다. 그는 음반산업의 성공에만 안주하지 않았습니다.
크로스비는 엔비시 라디오의 '크래프트 뮤직홀' 버라이어티쇼를 맡아 10년간 진행하며 대중과 비평가 모두에게 사랑받았습니다. 그는 딱딱한 연설 위주 목소리가 주도하던 당시 라디오 방송의 패러다임을 편안한 분위기로 바꿔 놓았습니다. 이웃집 아저씨 같은 익숙한 목소리로 다가가 고통받고 지친 대중을 위로했고 대공황과 전쟁으로 어두웠던 시절 특유의 유머 감각으로 희망을 전달하는 목소리가 되었습니다.
크로스비는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히트곡이 있지만 그의 인생에서 빼놓을 수 없는 노래는 '화이트 크리스마스'입니다. 어빙 벌린이 작곡해 1942년에 발표한 이 노래는 작은 마을의 어느 겨울날을 따뜻하게 추억하며 2차 세계대전의 절망적인 전쟁터를 벗어나 가족이 기다리고 있는 평화로운 고향으로 돌아갈 미래를 꿈꾸게 했습니다.
이 곡은 크로스비가 아니었다면 그토록 사랑받지 못했을 것입니다. 대중은 그가 낙천적이고 유머 넘치는 노래를 불러왔기 때문에 그의 삶과 닮았다고 느꼈습니다. 캐럴의 메시지와 그의 편안한 음성이 결합해 영원한 전설이 되었습니다. 이 곡은 매년 연말 뮤직 차트에 등장해 5000만 장 이상 팔린 역사상 최고의 싱글로 기네스북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연예산업의 관행과 차별에 맞선 용기
작고 왜소한 체구의 크로스비는 연예산업의 관행과 기술을 바꾸는 데 앞장선 개척자였습니다. 당시 라디오는 생방송이었고 미국 동부와 서부 시간에 맞춰 똑같은 방송을 두 차례나 해야만 했습니다. 방송계에 불만이 가득했지만 아무도 나서지 않고 있었을 때 애드리브가 많아 자신과 맞지 않았던 그가 용단을 내렸습니다.
법정 공방까지 간 끝에 비로소 미국 최초의 라디오 녹화 방송을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이는 방송사 제작 환경의 변화를 불러오는 중요한 출발점이 되었고 편집과 리허설이 가능해지면서 방송 수준을 한 단계 높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빌보드>는 '유성영화의 도래 이후 가장 중요한 쇼비즈니스의 혁명이었다'고 평가했습니다.
크로스비는 라디오 녹화방송의 핵심 기술인 존 멀린의 자기 테이프를 지원한 초기 후원자였습니다. 헨리 로우드 스탠포드대 교수는 "빙 크로스비는 실리콘 밸리 벤처 캐피탈리스트의 초창기 모델"이라고 밝혔습니다. 그가 지원했던 자기 테이프는 디지털이 나오기 전까지 35년 이상 라디오와 텔레비전의 기술 혁신을 주도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