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기한 삶의 틈새로 끼어든 이물질'

귀농운동본부 대표로 활동하고 있는 전희식이 88세의 치매 어머니와 함께 살며 일어난 작은 변화와 기적을 기록한 <똥꽃>에서 치매를 규정하며 한 말입니다. 

그가 노모와 함께 전북 장수군으로 들어가 살게 된 계기는 이렇습니다. 노동운동을 하다 고문 후유증으로 세상을 주유하던 중 찾은 큰형 집에서 치매를 앓던 어머니가 그의 손을 잡고 보여줍니다. 기저귀를 찬 어머니의 아랫도리는 이미 다 헐어 있었고,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자식들을 생산한 그곳의 체모가 온통 하얗게 센 것은 돌이킬 수 없는 충격이었습니다.

그는 어머니가 벽에 칠한 똥칠이 잘 익은 된장 같다며, 팔십 평생 삶의 흔적이라고 얘기합니다. 늙고 병든 노인을 한낱 관리의 대상으로 보는 한, 똥칠이 삶의 흔적이 될 수는 없습니다. 어머니의 삶에 대한 '존엄'이 없다면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리고 어느 노부부의 사랑을 한 폭의 수채화처럼 그린 영화 <러블리, 스틸>은 그 '존엄한 사랑'이 무엇인지를 가슴 시리게 보여줍니다.

낯선 여인의 데이트 신청, '가슴이 뛴다'

 프랑스 레스토랑에서 첫 데이트를 하며 메리가 로버트에게 “포기하지 않으면 실패하지 않는다”며 숟가락 파이팅을 제안하고 있다.

프랑스 레스토랑에서 첫 데이트를 하며 메리가 로버트에게 “포기하지 않으면 실패하지 않는다”며 숟가락 파이팅을 제안하고 있다. ⓒ (주)에스와이코마드


크리스마스를 앞둔 어느 날, 혼자 사는 노인 로버트(마틴 랜도)가 악몽에서 깨어난 듯 파리한 얼굴로 일어납니다. 마트 일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오니 낯선 여자 메리(엘렌 버스틴)가 인사를 합니다. 문이 열려 있어 걱정이 되어 들어왔다는 여자는 잠시 뒤 느닷없이 데이트 신청을 합니다.

너무나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메리. 로버트는 마트 사장 마이크를 비롯해 동료들에게서 각종 데이트 비법을 전수(?) 받으며 설레는 가슴을 주체하지 못합니다. 이를 두 번이나 닦고 한껏 멋을 낸 뒤 프랑스식 레스토랑에서 고대하던 데이트를 합니다. 로버트 자신이 스스로에게 준 선물 하나만 덩그러니 놓여있던 쓸쓸한 크리스마스트리 따위는 이제 안녕입니다.

그러나 영화는 흔한 '로맨스그레이'에 머물지 않습니다. 첫 데이트가 끝나고 로버트가 움푹 패인 주름진 얼굴에 어린 아이 같은 미소를 띠며 행복한 모습으로 잠드는 반면 메리는 수심이 가득한 얼굴로 잠을 청합니다. 메리가 간직한 로버트에게 말 못할 비밀은 오프닝 장면, 마트에서 잠시 쉬는 동안 퍼즐 그림을 그리는 로버트를 형언할 수 없는 눈으로 바라보는 그녀의 눈길에 예고되어 있습니다. 

이사 온 첫날 로버트에게 데이트 신청을 하고 밤늦도록 그의 집을 바라보는 메리. 크리스마스이브, 메리는 로버트와의 데이트에서 "난 달을 좋아해요. 눈에 보이지 않을 때도 항상 우리 곁에 있으니까요. 당신과 만난 지 1주일 밖에 안 됐지만 마치 평생을 함께 한 사람 같아요"라며 의미심장한 말을 던지고는 첫 키스를 나눕니다.

사실 영화는 이들의 의문스러운 행보에 대한 힌트를 관객들에게 예시합니다. 매일 아침 알람소리에 맞춰 일어나는 처참하게 일그러져 있는 로버트의 얼굴. 그리고 그가 음습하고 불길한, 붉은 색 연기가 자욱하고 혼돈스러운 꿈에 밤새도록 짓눌리는 장면을 반복적으로 보여줍니다. 로버트는 50대면 누구나 두려워하고, 가족들은 어쩔 줄 몰라 하고, 사회는 부담스러워 한다는 '치매'를 앓고 있었던 것입니다.

치매 노인의 가슴에도 '사랑의 불씨'는 살아 있다

 첫 키스를 하고 은빛 가득히 쏟아지는 눈을 맞으며 로버트와 메리가 하염없이 춤을 추며 말없는 사랑을 교감한다.

첫 키스를 하고 은빛 가득히 쏟아지는 눈을 맞으며 로버트와 메리가 하염없이 춤을 추며 말없는 사랑을 교감한다. ⓒ (주)에스와이코마드


영화는 23살 감독이 만들었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인생과 사랑에 대한 깊이 있는 성찰을 펼쳐 놓습니다. 특히 부부라는 이름의 인생 동반자가 어떤 모습으로 서로를 바라보며, 비추고, 다가서다 마침내 어떻게 하나로 합일해 가야하는 지를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게 직조해낸 장면들은 탄성을 자아내게 합니다.

카메라 앵글이 로버트의 거칠고 투박한 주름진 손을 쓸어주는 메리의 손길을 클로즈업하고, 그 둘이 서로의 눈길을 받아들이며 하얗게 쏟아지는 눈 속에서 하염없이 춤을 추는 모습은 '여전히 사랑스러워'라는 영화 제목의 발현 그 자체입니다. 비록 마른 볏짚단처럼 버석거리는 인생의 끝자락에 서 있어도 함께 인생을 감내해 온 주름과 주름의 깊디깊은 교감 속에서 아름다운 사랑의 화음은 갈무리됩니다.

영화는 로버트를 통해 치매를 앓는 노인들에게도 가슴 한 켠에 사랑의 불씨가 살아 있음을 보여줍니다. 첫 데이트 다음 날, 애프터 전화를 기다리지만 전화통은 묵묵부답. 밥맛도 없고 초조하기만 합니다. 침대야 꺼져라, 한 숨을 토해내는 참에 메리가 찾아오고, 기다림의 설렘은 메마른 그의 삶에 온기를 가득 채웁니다. 전희식이 <똥꽃>에서 "고생하니 쑥 한 그릇 먹으라"고 말하는 어머니의 모습에서 치매를 앓아도 모성은 간직하고 있었다고 말했듯이 말이지요.

지난 19일 KBS 2TV <다큐멘터리 3일>에서는 노인요양원에서 황혼을 맞고 있는 노인들의 삶을 다룬 '황혼-노인요양원에서 보낸 3일'이 방송됐습니다. 방송에 따르면 전국 3267개의 노인요양원에서 8만7474명의 노인들이 요양하고 있으며, 10명 가운데 9명이 치매증상을 갖고 있다고 합니다. 요양원에서만 8만 명에 육박하는 노인들이 치매를 앓고 있다는 계산이 나옵니다.

고령화 사회로 진입한 한국의 치매환자 숫자는 급속히 늘어나고 있습니다. 지난해 보건복지가족부가 발표한 2008년 치매 유병률 조사에 따르면 우리나라 65세 이상 치매환자는 42만여 명에 이르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치매 위험이 높은 경도인지장애도 4명 중 한 명꼴인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2027년에는 치매 환자가 100만 명을 넘을 것으로 전망하고 있습니다. 노인 인구가 급증하면서 치매 환자의 수 또한 수직 상승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최근 노인성치매 임상연구센터 연구결과 65세 미만에서 치매의 주원인인 알츠하이머병을 앓는 환자가 18.4%에 이르러 국가적 대책이 시급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이런 치매로 치러야 할 사회·경제적 비용 역시 막대합니다. 건강보험공단은 소요되는 비용을 연간 최소 3조4000억 원에서 최대 7조3000억 원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치매와의 전쟁시대, 거꾸로 가는 노인복지

 인생의 동반자로 모든 것을 함께 감내해 온 노부부의 눈길에서 영화는 치매를 앓는 노인의 삶에도 진실한 사랑은 있다고 나직이 말한다.

인생의 동반자로 모든 것을 함께 감내해 온 노부부의 눈길에서 영화는 치매를 앓는 노인의 삶에도 진실한 사랑은 있다고 나직이 말한다. ⓒ (주)에스와이코마드


영화에서 로버트는 3일간 약을 먹지 못해 극심한 망상에 시달리다 병원에 입원합니다. 입원 직전, 메리는 로버트가 스스로에게 준 크리스마스 선물 상자에서 권총을 보고 경악합니다. 권총에 대해 묻는 메리의 질문에 "살아 있는 게 너무 고통스럽고 외로웠다"는 로버트의 고백은 '치매로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극명하게 보여줍니다. 그럼에도 영화에서 로버트가 철저한 시장논리에 따라 민영화된 미국의 의료보험에서 '병원에 입원했다'는 것은 시쳇말로 '살만하다'는 것을 뜻합니다.

반면 우리나라 치매 환자 중 적극적으로 치료를 받는 경우는 42만여 명 가운데 32%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그나마 장기요양보험 시행에 따라 노인요양원에서 요양하는 노인들을 제외하면 경제적 부담 등으로 인해 방치되다시피 하는 노인들이 다수를 이루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결국 노인 삶의 질을 결정하는데 있어 관건이 되는 '치매와의 전쟁'은 국가적, 사회적 차원에서 조기발견 시스템을 갖추고, 치료하고, 체계적으로 관리하는 것으로 그 해결책이 요약됩니다.

그런데 지난 날치기 국회에서 한나라당은 노인 관련 9개 사업에서 120억 원을 삭감시켰고, 그 중 노인치매병원 확충 예산은 62억 원에서 33억 원으로 29억 원이나 삭감시켜 버렸습니다. 반면 대한노인회 등에 대한 지원은 33억8100만 원에서 276억8100만 원으로 8배 가까이 증액했습니다. 노인복지에서도 겉과 속이 다른 '두 얼굴의 예산'이 진행되고 있는 것입니다.

'9988234'. 99살까지 팔팔하게 살다 2~3일 앓고 4일째 되는 날 죽자는 우스갯소리지만, 세상을 떠날 때만큼은 자신의 의지대로, 길게 끌지 않고, 곱게 죽고 싶은 바람을 상징하는 숫자이기도 합니다. 아름다운 반전을 예고한 영화에서 메리는 포기하라는 의사의 말에 로버트 손에 반지를 끼워주고, 그 손에 키스를 하며 엔딩 크레딧은 올라갑니다. 비록 자신의 의지대로 삶을 정리할 수 없는 치매라 할지라도 메리처럼 마음을 헤아려준다면, 인생은 충분히 행복할 수 있다고 영화는 말한 것입니다.

연말연시. 전희식이 '똥꽃'을 한 편의 시로 표현한 글을 되짚으며 사람은 누구나 노인이 되고 죽는다는 평범한 진리를 잠시 '망각의 방'으로 몰아넣고, 이물질처럼 끼어든 치매와 노년의 삶을 반추해 봅니다.

감자 놓던 뒷밭 언덕에 / 연분홍 진달래 피었더니 / 방안에는 / 묵은 된장 같은 똥꽃이 활짝 피었네 / 어머니 옮겨 다니신 걸음마다 / 검노란 똥자국들

어머니 신산했던 세월이 / 방바닥 여기저기 / 이불 두 채에 / 고스란히 담겼네 / 어릴 적 내 봄날은 / 보리밭 밀밭에서 / 구릿한 수황냄새로 풍겨났지 / 어머니 창창하시던 그 시절 그때처럼 / 고색창연한 봄날이 방안에 가득 찼네

진달래꽃 / 몇 잎 따다 / 깔아 놓아야지

러블리, 스틸 치매 노인복지 똥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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